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cgv에서 화려한 휴가 틀어주길레 보고 검색 해봤는데 이거레알?
게시물ID : sisa_3364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스트팬티
추천 : 0/3
조회수 : 262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2/12/23 12:25:19

총련이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켰을 때 위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는 조총련의 간계에 말려들어 조총련 충복 노룻을 하였던바, 바로 KBS가 "푸른 눈의 목격자"라 부르는 독일인 기자이다.  그가 촬영한 영상물은 지난 27년간 518유언비어 확산에 이용되어 왔던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영상물이 5.18논리의 급소를 찌르며, 5.18측 주장의 근거를 와르르 무너뜨린다.

   광주사태 증거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민군의 무장시점이다.  본래 시민군이란 미국의 참전을 막고 월남을 적화하는 방법으로 1975년 월맹군이 중부 다낭에 설치한 것으로 인민혁명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월남의 인민혁명당과 남한의 인혁당(인민혁명당)은 1975년에 같은 박자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광주시민군이 다낭시민군의 한국판이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만약 월남을 패망시키기 위해 공산세력이 창군한 시민군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면 시민 무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518측에서 광주폭동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할 때에 가장 큰 장애물이 민간인이 총기 무장한 사실이다.  그래서, 5.18논리는 총기 무장 시점을 최대로 늦추며 5월 21일 집단발포 유언비어를 지어낸다.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이란 시민군 총기조작 오발 사고로 네 명의 시민군이 사망한 사건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군인들에게 뒤집어씌우려 집단발포 유언비어를 지어내더니,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조준사격으로 영상화하였다.  이 영화에서 가장 공들이는 장면은 시민군 총기 무장 시점이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이후로 비쳐지게 하는 것이었으리라.

   만약 KBS가 힌츠페터의 광주사태 영상물을 지나치게 우려먹지 않았다라면 그런 속임수는 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힌츠페터의 광주사태 영상물이 518무장단체의 무장시점이 언제이었는지를 명확하게 가려내준다.  그들은 힌츠페터가 푸른 눈의 목격자가 부른다.  그런데, 그가 찍은 영상물은 5월 20일 광주에 도착하여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이전에 광주를 떠나기까지의 시민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5월 20일에 이미 시민군은 군용 트럭을 타고 다녔으며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광주사태에는 광주시민들이 몰랐던 사실, 탈북자들이 알려주는 사실이 있다.  광주사태 동안 시내의 시민들은 모르고 있었으나 무장시민군이 5월 19일부터 나주의 나주경찰서 등을 습격하며 무기를 탈취하고 있었다.  나주경찰서 기록이 최초 무기 피탈 날자가 19일이었음을 밝히며, 시민군이 나주에서 무기탈취한 날을 기념하여 김대중이 세운 공적비가 그 사실을 입증하되, 518측이 부정하는 사실이다.  

   힌츠페터의 송고에 의거하여 독일 방송은  5월 21일 전체 시민군이 20만명이 넘었으며, 그 중 무장시민군 수가 3만명이 넘었다고 보도하였다.  갑자기 3만명이 넘는 시민군이 어디서 총기가 났다는 말인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트럭으로 동네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하지만, 동네 파출서에 그렇게 무기가 많은 것도 아니고, 더구나 공이를 제거해서 격발이 안된다.  따라서 영화 "화려한 휴가"는 현실성이 없다.   도대체 시민들이 어떻게 무기고 총기에는 공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공이를 준비했을까?  아직껏 풀리지 않은 광주사태의 수수께끼이다.

   이러한 수수께끼들에 대한 실마리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제공해 준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기 탈취는 여러 달 머리를 장발로 기르고 서울말을 익힌 북한군 특수부대가 하였다는 것이다.  모든 시민군의 증언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이십 만 명의 시민군 중 아직 그 누구도 자신이 무기 탈취를 선동했다고 나서는 이가 없다.  광주민주화 유공자는 무수히 많되 무기 탈취범은 없다.  만약 정말로 광주시민 중에는 무기 탈취를 선동한 이가 없었는데도 무기가 탈취되었다면 결국 북한군 특수부대가 무기 탈취를 선동하였다는 증언이 입증된다. 시민군 역시 낯모르는 이들에게 선동되어 나주경찰서 등 광주 외곽 경찰서들을 습격하며 무기 탈취했었다고 이구 동성으로 증언한다. 

  

   힌츠페터는 5월 20일 광주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군용 트럭을 타고 광주 중심지로 들어가는 시위대 차량 행렬이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라.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만약 시위대가 광주 중심지에 있었다면 광주 중심지에서 바깥 방향으로 이동하였을 터인데, 광주 외곽에서 광주 중심지로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기분으로 군용 트럭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아래 동영상에서 애국가가 배경 음악으로 들리지만, 그것은 KBS의 음향 편집이요, 실제로는 어느 나라 국가를 불렀는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모른다.  

   만약 광주민주화 유공자는 무수히 많되 무기 탈취를 선동했다는 이는 아무도없으면 이제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경청해 볼 차례이다.  만약 탈북자들의 증언이 사실일 경우 군용 트럭의 인물들 중에는 북한군이 있었다.  따라서 위 영상물은 무기 탈취를 선동한 북한군 및 자생 간첩단 역할을 하며 북한군에 무기고 소재를 알려준 이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그런데, 트럭 위의 인물들 중에는 북한군에 희생당할 인물들도 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시민군 틈에 섞여 있던 북한군은 뒤에서 시민군을 쏘아 죽인 뒤 국군이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이것이 초창기 총상은 대한민국에 없는 무성 총기에 의한 총상이었던 이유였다.  그들이 광주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침투할 때 소지한 총은 동유럽산 무성총기였다.    

   힌츠페터의 동영상 전체를 보면 총기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었으면서도 시민군 총상 방향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장면이 나온다.  시민군들 역시 군인이 전혀 없는 지역에서 시민군 방향에서 시민에게 날라온 총탄에 의한 사망 및 부상에 대하여 수수께끼 Question 부호를 그들의 증언에 크게 찍어 놓는다.  시민이 죽었다.  그러나, 시민군 목격자들 역시 군인이 없는 곳에서, 시민군 방향에서 날아온 총탄이었음을 증언하며, 광주의사들 역시 시민군에게만 있는 총기에 의한 총상이었다는 소견을 남겨놓았다. 

   5월 20일 이미 시위대가 군용 트럭을 타고 다니며 무장하기 시작하였음을 명확히 증언하는 힌츠페터의 영상물은 또한 시민군에게 실탄이 지급된 시점을 명확하게 입증한다.  항간의 깊은 오해와 달리 광주사태 동안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었다.  사병들에게 실탄을 지급하는 것은 곧 발포 명령을 의미한다.  실탄이 지급되어야 발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찰과 과거사위가 발포 명령자는 없었다고 발표하였을 때 그 의미는 사병들에게는 전혀 실탄이 지급된 적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5월 21일 한시경 시민군 장갑차가 도청광장에서 군인들을 깔아죽이기 시작하였을 때 장교들에게만 공포탄 몇발씩 지급된 것을 가리켜 발포 명령은커녕 실탄 지급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병들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조준사격은 사병들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어야 가능한 것이기에 영화 "화려한 휴가"는 터무니 없는 왜곡인 것이다.

   항간의 유언비어와 달리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으며, 5월 21일 공수부대는 광주를 영영 떠났다.  힌츠페터의 무식한 발언을 인용한 518 영상물에서 공수부대가 5월 27일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났다는 나레이션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도청진압작전을 위해 동원된 병력은 20사였으며, 20사는 공수부대가 아니다.  이점에 관한 한 힌츠페터는 정말 무식하였음에도 518 영상물에서 그 무식이 27년째 재생산되고 있다.  5월 27일 새벽 최규하 대통령이 군 자위권 발동 재가를 해준 병력은 20사였으며, 공수부대 사병들에게는 실탄이 지급된 적이 없다.  5월 27일 새벽 시민군이 선제 사격하여 20사 소속 사병 3명이 사살되었기에 자위권이 발동되어 맞사격이 있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사격한 일이 없음에도 독일인 힌츠페터의 무식 때문에 한국의 특전사가 여태껏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최측근 윤상원의 간사한 달변에 현혹되어 518시민군 옹호에 여생을 바쳤던 힌츠페터의 영상물이 아이러니하게도 시민군의 치부를 폭로한다.  공수부대 편에서는 사지에 몰려서도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는데, 시민군 편에서는 도청광장 충돌 이전에 분명히 실탄이 지급되었다.  힌츠페터는 시민군에 실탄이 지급되는 것을 보자 섬뜻 위기감을 느끼고 급히 광주를 빠져나갔다.  그는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이전에 광주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녹음장비는 시민군에 실탄이 지급되는 장면을 포착하였다.  이것이  518무장시민군에 실탄이 지급된 시점에 대한 명확한 증거물이다.





영화가 참;;각색이 많이 됐네요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