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친일 혈서, 창씨개명, 일본군 생활에 관한 최종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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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창씨개명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한 시기는 1940년 가을로 만주군관학교 학생신분이었다. 그 이전에는 1939년 10월3일
에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을 박정희라는 이름으로 치뤘고, 1940년 1월4일에 발표한 합격자 명단에서도 박정
희란 이름으로 15등으로 입학했다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44년 4월 일본육사 졸업생 명단에도
다카키 마사오로 되어 있다.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한 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1940년 가을 만주군관학교는 1940년에 입학한 조선
인 재학생 25명 전부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박정희는 이 때 다카키 마사오로 이름을 바꿨다.
오카모토 미노루가 또다른 박정희의 일본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진욱언이 동경대학출판회에서 발간한 일
본육해군종합사전을 내세우고 있다. 사실 오카모토는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제학교 대구사범의 교유라는 직책
을 가진 일본인 6급 공무원이었다. 임시육군군인군속계 기록을 보면 1945년 3월 1일까지도 다카키 마사오라
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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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친일 혈서
1.유증선의 주장을 토대로한 조갑제의 주장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는 혈서를 썼다는 주장은 문경 보통학교(문경 서부공립 심상소학교
) 동료교사였던 유증선의 증언에 기초한다.
유증선의 증언 내용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①호적에 1살 낮게 고치기. ②혈서 작성
①호적에 1살 낮게 고치기.
<1938년 5월경이라고 생각된다.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서로 털어놓을 때였다. 박 선
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일본 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
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박 선생은 호적상의 나이를 고치기 위한 방도를 이야기하면서 형 박상희에 대해서도 주섬주섬 말하는 것
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비해서 형은 굉장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깔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 형님은 지금 고향에서 면장을 하고 있소. 성격도 활달하시고, 저는 이렇게 작고 보잘 것이 없지만
형님은 체격이 크고 외모도 훤칠하시지요. 저는 형님을 존경합니다.”
나는 박 선생에게 “그러면 그 형님의 도움을 받아서 호적을 고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박 선생은
며칠동안 고향에 다녀와서 나이를 고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한 살 낮추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
==>실제 사실 : 호적을 고치지 않았다.
②혈서 작성
나와 박 선생은 숙직실에서 밤새 고민했다. 우리가 연구한 것은 ‘어떻게 하면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
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였다.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새끼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 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그때 편지가 만
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혈서가 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때 만주에 가 있던 대구사범 교련주임 아리카와 대좌가 도와줘서 그 혈서건이 신문에 났는지, 아니
면 만주군관학교에서 신문에 자료를 제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리카와가 보낸 편지가 박 선생 앞으로 도착했다.
박 선생은 “아리카와 대좌가 그렇게 군인이 되고 싶으면 자기에게 한번 다녀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
며칠 뒤 박 선생은 만주에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아리카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동양사
》 등 몇 권의 책들을 들고 왔는데 “한번 시험을 쳐보라고 했으니 해볼 수밖에 없지”라고 했다.
내 아들 柳浩文(유호문·전 건설부 산업입지국장)은 1939년에 문경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담임선생은 박 선
생이었다. 이 해 가을(1939년)에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시험을 쳤다.
==> 실제 사실: 실증자료가 없다.
1938년도 장춘군관학교 입학 가을 시험 응시도 아니고 그 다음 해에 치룰 입학청원 편지를 썼다는 증언은
의아할 따름이다. 1939년도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일자는 10월3일로 아직 시험공고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1
년 훨씬 전에 입학청원 혈서를 보냈다는 것은 상식선에서는 맞지 않다.
유증선의 말대로라면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1938년 5월 하순경에 혈서 이야기가 보도되어야 했다.
당시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만주일보가 있었다. (만주일보는 1919년 6월 이상업 선우일이 일본인 자금
으로 중국 선양(봉천)에서 발행한 신문으로 1920년3월17일에 폐간됐다. 이후 만주일일신문과 요동신보가
통합되어 1927년11월1일부터 만주일보가 되었다가(동아일보1927.11.1) 다시 만주일일신문이라는 명칭으로
1945년 경까지 발행됐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러한 내용은 없다.
적어도 그런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다면 만주국의 선무공작 차원에서 보도자료 배포를 통해 당시 만주 여러
언론에 보도되었을 것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늦어도 1주일 이내에 조선에서 발행하는 신문들도 단 한 줄이
라도 언급했을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세력들의 지탄으로 인해 풍문이 돌았을 것이지만 혈서사건은 야사에도
전하지 않는다. 일본으로서도 상징적 사건이었기에 정부차원에서 기록에 남겼을 것이지만 아직까지도 증명
되지 않고 있다.
종북단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관 ‘민족문제연구소’가 1939
년자 <만주신문> 기사를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썼다는 의혹을 제기
했으나 만주군관학교 합격 발표일자(1939년 2월 24일)와 혈서 관련 기사(3월 31일 7면)의 순서가 모순된다
는 사실이 밝혀져 사실상 사장됐다.
정용진이 쓴 '청년 박정희'에 의하면 박정희는 1939년에야 고향선배 상위 강재호의 조력을 받아 입학 청원
편지를 썼다고 한다. 당시 군관학교 입학응시 자격은 4년제 중학교 졸업자면 됐기에 박정희는 사범학교를
졸업한데다가 교련이수로 하사관 계급이 주어졌음으로 나이제한 기준초과를 용납해 줬을 것으로 보는게 더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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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일본군 생활
이후 박정희는 1942년 10월 1일 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 입학해서 1944년 4월 20일에 졸업했다. 일본육사 입
학은 만계 1등에 대한 특전이 아니라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한 일본인 졸업생 전원과 만계 졸업동기 가
운데 70여명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하던 일본은 1943년부
터 육사입학 자격을 더욱 낮추어 인원 충당을 꾀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가 일본 육군대신상을 수상했다(김삼웅)고 하지만 실제 은사상 수상자 25명의 목
록에 박정희 이름은 없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조선인 최초 입학은 1899년11월21일에 졸업한 11기 어담으로 보인다.
1911년5월27일에 졸업한 23기 김광서(김격천)가 있다. 1914년5월 28일에 졸업한 26기 이응준, 유승렬, 안종
인, 김준원, 박승훈, 지대형(지청천, 광복군초대사령관), 홍사익 등이 있다. 1915년5월25일에 졸업한 27기
김석원, 백홍석, 김인욱, 장석윤 등이 있다. 1917년 5월25일 졸업한 29기 이은(영친왕) 등이 있으며, 1918
년5월27일에 졸업한 30기 엄주명 등이 있다. 청나라는 1890년에 졸업한 1기생 모집 때부터 적극적으로 일본
육사에 진학했다. 일본측 주장은 조선정부도 1898년부터 일본육군사관학교 입학을 환영했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만주군관학교 졸업후 1942년 4월 1일부터 시작한 하얼빈 만주군 보병 제30연 177부대에서 보낸 6개월간의
대부근무 시기와 일본육사 졸업직후 1944년 5월 1일부터 제제합이(치치하르) 주둔 635부대에서 보낸 2개월
간의 견습기간이다. 박정희가 견습근무했던 곳은 아에 항일세력이 없던 지역이었으며 아직은 소련군이 남하
하지 않은 시기였다.
박정희는 1944년 7월 만주군 8단사령부(하북성 승덕현)에 전속됐다. 만주 제8단장은 중국인 상교 당제영,
부단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며, 박정희는 단장 부관겸 기수로서 명령전달과 부대 깃발 관리를 담당했다.
8단의 부대편제는 3개 대대로 구성됐다. 장교구성은 일본인 8명, 조선인 4명(신현준,방원철,박정희,이주일)
이고, 나머지는 모두 중국인 장교들이었다. 부관처는 갑종과 을종으로 나눠져 갑종은 시모노 대위가 부관처
장이고, 을종은 행정담당(반 모 중위) 인사담당(이 모 중위), 연락 및 8단기(부대깃발) 관리(박정희)였다.
(참고로 간부편성과 상관없지만 부대편성에 있어서의 갑종부대와 을종부대의 차이는 같은 이름의 부대이지
만 갑종부대는 화력과 병력수가 을종부대에 비해 더 많았다.)
그렇다면 만주군 5관구 예하 8단사령부로 발령 받은 박정희가 독립군을 죽이거나 체포하는 친일에 참여 했
느냐다.
1944년에서 1945년에 만주 8군이 맡았던 전투는 모택동 공산군 팔로군과의 사이였다. 박정희가 근무하던 8
단 예하 6연은 준하에 주둔하면서 주변 지역에 출몰하던 팔로둔 11, 12단과의 소규모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
다. 팔로군 11,12단은 북경과 승덕현 사이에 있는 준하 지역 근처에 소수가 존재하고 있었다. 준하지역에는
8단 6연과 기관총연, 헌병대 등이 주둔하고 있었다.
8단사령부에서 근무하던 박정희가 맡은 보직을 따져보면 현지 작전에 투입될 수가 없다. 8단 사령부에서 박
정희는 8단장을 보조하는 부관으로 연락장교 역할을 하면서 부대 깃발(8단기)을 관리했다는 면에서 현장 일
선 중대장으로 나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8단은 주로 중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중국인이 팔로군의 중
국인과 전투를 벌이는 꼴이었다. 그래서 전투가 소규모에 불과했다.)
이로인해 가장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알 수 있는 일본측 자료에도 박정희가 8군 소속으로 팔로군 소탕작전에
나섰다는 기록이 없다.
훈장만 하더라도 일본 정부의 기록에 박정희가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이 없다. 이 밖에도 만주국으로부터 훈
장이나 기념장을 수여 받은 친일파가 무려 천여명 이상이나 됐지만 박정희는 단 하나도 받지 못했다.(만주
국 정부공보)
요약
1. 창씨개명은 만주 군관학교에서 강제로 당했다.
2. 유증선의 증언 자체가 허위였다. 조갑제는 틀렸다.
3. 혈서는 존재하지도 않고 증거도 없다.
4. 일본군 복무시절에는 독립군이나 항일세력과 마주칠일이 없었다.
창시개명은 도요타 다이쥬 선상님께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