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차 시국회의가 있던 엊그제, 수도권의 경찰 차량들은 서울 시청과 광화문 주변으로 집결했던 것 같습디다. 서울광장은 물론 거기에 이르는 주변 도로들까지 범퍼와 범퍼가 맞닿은 경찰 차량, 그리고 경찰 병력으로 빈틈없이 차단돼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흉물 ‘만리차벽’과 경찰 병마용이 등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국정원 공작을 규탄하는 시국회의 참석자는 회를 거듭할수록 두 배 이상씩 늘었습니다. 가급적 숫자를 줄이려고 온갖 꾀를 내던 경찰도 6차 회의 참석자 규모를 5차보다 무려 4~5배 많게 추정했더군요. 그걸 보고는 평범한 진리, 즉 백성은 물과 같다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비좁은 입구 두어 곳을 남기고 나머지는 차벽을 쌓았는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물처럼 능소능대 혹은 자유자재한 ‘물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게다가 권력에 반대하고 거스르는 건 지독하게 귀찮고 힘들고 번거로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생업의 우려와 찌는 더위의 불편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성정을 어쩌지 못하는 물과 같은 거죠. 막으면 돌아서고, 더 막으면 고이고 고이다 넘치고, 더 높이 막으면 벽을 무너뜨리면서 흐르는 물 말입니다. 설마하니 님은 전임 정권이 컨테이너 벽으로 끓는 민심을 막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님도 인정한 것처럼 국민이 물러선 것이 아니라, 국민은 아예 이명박 대통령을 버렸습니다. 물을 잃은 그 배는 당시 사실상 뻘 속에 갇힌 신세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대통령선거는 개나 소나 이명박 정권을 부정하는 판이었습니다. 그가 취했던 정책을 모두 뒤집는 판이었고요. 사실 님에겐 그것이 승리의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이명박 정부는 댐으로 4대강의 물 흐름을 막으려 했듯이, 여론의 흐름을 막으려 했습니다. 국민과 맞서고 국민을 이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도 주말마다 민심과 맞서고 이기려는 차벽이 부활했습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님은 지금 공연히 병을 키우고 있습니다. 종기에 불과하던 것, 간단히 도려낼 수 있었던 것을 악성 종양으로 배양하고 있습니다. 머잖아 그 주변엔 건강한 세포가 살아남기 힘들게 됩니다. 이미 합리적이고 건강한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가고 있습니다. 종양이 최종적으로 먹어치우는 것은 숙주의 생명입니다. 기묘하게도 그런 양질 전환의 순간에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등장했습니다. 지금까지 님이 선택한 인물 중엔 유신체제와 간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이 많았습니다. 직접 몸담았던 사람은 없었죠. 그러나 김 실장은 ‘유신의 얼굴’과도 같은 인물입니다. 헌법도 기초하고, 중정에서 유신을 지키는 뼈대 구실도 했습니다. 유신 스타일의 전형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엊그제 만난 한 원로 정치인의 희망 섞인 분석은 조금은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그를 비서실장에 기용한 것은 박 대통령 주변의 별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 아닐까?” 남재준 국정원장,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박흥렬 대통령 경호실장 그리고 김관진 국방장관까지 포함하면 모두 16개의 별들이 빈틈없이 박 대통령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들은 평생 가상이든 실전이든 전쟁을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평화, 협상, 절충 운운하는 걸 겁쟁이로 여기고 ‘완승 혹은 완패’, ‘전부 아니면 전무’의 논리가 뼛속 깊이 생활화된 분들이죠. 따라서 그들의 존재감은 위기가 고조돼야 커집니다. 범상치 않긴 하지만 국정 전반을 관장할 순 없는 분들입니다. 아버지가 별들과 함께 정권을 잡은 것처럼 님의 정부도 그런 별들과 함께 출범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국정을 운영하다 보니 한반도 문제나 정치 현안에서 뜻대로 되는 것보다는 꼬이는 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별들을 견제할 인물이 필요해진 것 같다는 분석이었습니다. 김 실장이 누구입니까. 유신 때 체제의 복심이었습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는 끝까지 박근혜 후보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런 그의 ‘모사’로서의 내공은 첫 브리핑에서 서두로 꺼낸 ‘윗분의 뜻을 받들어…’라는 말에서 담박에 드러났습니다. 윗분의 뜻이라는데, 당·정·청 그 누가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무한한 충성심의 표현이기도 하면서 여권의 다른 실력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어법입니다. 종교인들이 제 말의 권위를 세우려 할 때 꼭 쓰는 말이 있죠. “이 말은 신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가 별들에 대한 견제가 될지 아니면 반대가 될지는 속단하지 못하겠습니다. 지난 8일 북한이 보내온 전통문을 놓고 벌인 해프닝은 그 가느다란 기대마저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회담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삼가 달라”는 북쪽의 항의에 대꾸하지 않았던 통일부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하루가 지나서 갑자기 ‘적절치 못한 표현’이라며 날을 세우는 통지문을 북한에 보내고 이를 보도진에게 알렸습니다. 무슨 작용이 있었는지는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거기엔 완승과 완패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서툴고 완고한 속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외교 관계에서 자존심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안전과 이익입니다. 민주당의 양자회담 요구에 대한 5자 회담 역제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담판 대상을 심판하는 주체로 놓아버린 게 5자 회담입니다. 아무리 무지렁이 같은 존재라도 누가, 가해자에게 엎드리는 회담 틀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김 실장에게 대통령은 여전히 유신 체제의 총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분들만 곁에 두니 어떻게 스스로 병을 치유하리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한달 전 언론사 논설·해설위원과의 오찬에서 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는 그 나라의 혼이다. 역사를 배우지 않고 자란다면 혼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너무 간명해서 역사에 대한 사유의 깊이와 식견을 가늠하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물음만큼은 피하기 힘들었습니다. 님은 과연 제대로 역사를 배웠을까? 왜냐하면 님이 국가의 정상이 되는 과정과 정상이 된 이후,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일들이 거듭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보기관의 정치공작, 권위주의 체제, 냉전 이데올로기의 부활과 강화 등 민주주의를 불구로 만드는 것들이죠. 역사가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진짜 찌질하게 모하는 짓거리냐
그렇게 야비하게 방해한다고 멈출 우리가 아닙니다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