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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게시물ID : readers_7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도꼬마
추천 : 10
조회수 : 142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7/10/30 21:16:43
 이지숙은 눈이 뜨이자마자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앉은뱅이책상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라디오를 켰다.
 [……북괴군들이 삼팔선 전역에 걸쳐 대거 남침을 강행해왔습니다.]
 잡음과 함께 라디오가 토하는 말이었다. 태평스럽게 하품을 하고 있던 이지숙의 동작이 순간적으로 딱 멎었다.
 [이 불법남침을 격퇴하기 위하여 국군은 즉각 반격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시민과 국민 여러분들께서는 추호도 동요하지 마시고 생업에 종사하시기 바……]
 충격을 겨우 수수브한 이지숙은 허겁지겁 라디오 불륨을 낮추었다. 아나운서의 소리가 도망치듯 까마득하게 멀어지면서 지글지글 끊는 잡음만 더 소란스러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그런 반사적인 행동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라는 판단은 그 다음에 왔다. 그것은 틀림없는 남쪽의 국영방송이었던 것이다. 정신을 바로잡은 이지숙은 조심스럽게 불륨을 다시 높였다.
 [……전국의 국민 여러분들께 다시 알려드립ㄴ디ㅏ. 오늘 새벽 네 시를 기하여 북괴군들이 삼팔선 전역에 걸쳐 대거 남침을 감해해 왔습니다. 이 불법……]
 두 무릎을 깍지 끼어 쪼그리고앉아 있는 이지숙의 가슴은 계속 벌떡거리고 있었다. 처음에 가슴을 쳐온 충격은 예비되지 않은 갑작스러움 때문이었고, 되풀이되는 방송을 따라 그 충격은 감격으로 바뀌며 가슴에 거셈 물줄기을 일구고 있었다. 평소와는 판이하게 긴장감과 다급함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에 통쾌감과 승리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중략)

 권 서장은 라디오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똑같은 내용만 되풀이하고 있는 보도를 그대로 놓고 보자면, 전쟁은 북쪽에서 먼저 도발한 것이고, 그 양상은 전면적이고, 상황은 이쪽이 불리하다는 인상이었다. 그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대통령이 멸공통일·북진통일을 당당하게 내세운 것이 언제부터였으며, 대통령의 그 힘찬 주장에 발맞추어 국방장관이고 참모총장이 입을 모아, 하시라도 명령만 내리시면 점심밥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밥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다는 호언장담은 그 얼마나 자주 했던 것인가. 그런데 북족한테 먼저 공격을 당하는 것은 뭐며, 상황이 불리해진 것은 또 뭐란 말인가, 국방장관이고 참모총장이고 정작 별다른 실속도 없으면서 대통령이 듣기 좋도록 허풍만 떨어댔단 말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더 이해가 안되는 것은 북쪽의 행위를 놓고'불법남침'운운하는 점이었다. 주의를 달리하는 두 정권사이에 상호협약한 무슨 법이라고 있었던 것인가. 그런 법이란 애초에 없었던 상태로 이쪽에서는 멸공북진통일을 내세우며 남쪽의 빨갱이들을 소탕해왔고, 저쪽에서는 공산혁명통일을 내세우며 남쪽의 자기편을 지원하는 상태로 싸움은 벌써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까. 그런데 이제와서 '불법'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린가.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다급해서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쪽 이쪽의 멸공북진통일은 '합법'이고 저쪽의 공산혁명통일은 '불법'이라는 것인가. 도대체가 모를 소리다. 불법을 따지자면 이차대전 때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폭격한 경우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쪽에서는 저쪽 공산정권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한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무엇을 근거로 해서 따지고 있는 불법인가. 이쪽의 정권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저쪽에서도 이쪽이 북진통일을 감행하는 경우 불법을 따질 근거가 없기는 매일반 아닌가. 그 동안 공산혁명을 하겠다고 태백산맥을 통해 지속적으로 남파시킨 빨치산과 이번의 도발과는 뭐가 다른가. 수의 많고 적음이 다를 뿐이 아닌가. 싸움의 규모가 크고 작음이 다를 뿐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때는 불법이라고 하지않고 이제와서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인가.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소리다. 싸움이 크게 벌어졌으면 그에 맞서 싸우는 일뿐이 없지 않은가. 잠꼬대 같은 엉뚱한 소리 지껼여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싸움은 총으로 하는 것이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잖은가. 빌어먹을……


-소설 태백산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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