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이사를 위해 집을 정리하다 대학시절 쓰던 물건들을 모아 놓은 상자에서 스무살 되던 해 사용했던 삐삐가 나왔다.
나는 잠시 과거의 추억에 빠졌다. (얼마나 소중히 간직했으면 인조가죽 케이스채 보관되어 있었다.)
지금의 10대와 20대에게 생소한 단어인 삐삐(무선호출기), 하지만 내가 20살이 되던 해는 바야흐로 삐삐의 전성시대였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던 해 부모님은 "이게 지금 도시에서 유행하는 것이여, 앞으로 떨어져 살게 되니 삐삐치면 바로 연락해라"
(그리고 부모님은 군대 가기 전 1년동안 내게 삐삐로 딱 1번 연락하셨다. 그 내용은 "너 영장나왔다..." 였다.)
하시면서 입학선물로 내게 삐삐를 사주셨다. 지금의 아이폰 크기만한 모토** 검은색 삐삐 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시골학교였는데 학생은 물론 선생님도 삐삐를 허리춤에 찬 분이 없었다. 그리고 내 고향에서 삐삐는
읍장님, 조합장님, 농약가게 사장님 등 노블리스 오블리제들만 착용하던 부와 권력과 그리고 명예의 상징이었다. )
시골에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눈감으면 코베인다는 서울이라는 낯설고도 먼 유학길을 떠난 나는 입학식 때
서울 아이들의 기에 눌리지 않기 위해 결혼식+장례식에만 입으셨던 아버지의 검은 양복과 스페인 검투사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붉은 색 넥타이,
그리고 허리 춤엔 시골에서는 부와 권력과 명예의 상징인 쇠고랑으로 엮은 가죽케이스 옷을 입혀준 삐삐를 당당히 차고 갔다.
서울 아이들의 기에 눌리지는 않았지만, 앤틱풍한 정장과 강렬한 메탈소재의 쇠고랑이라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는 감히 소화할 수 없는
촌스러움으로 무장한 내가 오히려 서울아이들의 시선테러를 통한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유심히 같은 과 학우들을 바라보니
유독 눈에 띄는 놈이 하나 있었다. (물론 그 놈도 나와같은 촌놈 이었다.)
그 놈은 차이나 칼라 양복에 양쪽 허리에 삐삐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머리는 우리 어머니께서 밭일 하실 때 즐겨입던 몸빼 바지와
완벽한 하모니를 소화하는 뽀글이 파마까지... 분명 범상치 않은 놈이었다. (훗날 그 놈과 친구가 되어 물어보니 한 쪽 허리에 차고 있던 것은
만보계 였다고 한다.)
마치 영역 싸움을 하는 맹수처럼 우리는 서로 견제하는 눈빛으로 힐끔힐끔 바라보며 앞으로 우리 과 패션테러리스트, 패션 악몽분야의
양대산맥 이 될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지금은 거의 보기 힘들지만, 길거리에는 공중전화가 참 많았다. 크게 두 분류로 나뉘었는데, 시외전화가 되는 일명 DDD 전화기와 지역 시내만
통화가 되는 전화기 였다. 삐삐가 유행하던 시절 두 종류의 전화기 뒤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는 했다. 그리고 통화를 3분 이상 하면
실례라는 암묵적인 룰도 있었다. 물론 길게 통화하는 사람은 뒷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켜 종종 멱살잡이가 벌어지고는 했었다.
(1단계 기다리는 사람이 뒤에서 신호를 줌 주로 "흠흠.. 짧게 합시다~" 2단계 뒷 사람이 전화박스를 발로 툭툭 참. 3단계 통화하던 사람
뒤돌아서서 도발 4단계 전화 끊고 뒷사람과 언쟁이후 멱살잡이 시작 "니가 전화기 전세 냈냐~"는 많이 듣던 문장이다.)
내게 삐삐 = 알람시계 였기 때문에 공중전화로 길게 통화할 일도 없었고, 굳이 전화 박스 뒤에 줄을 설 일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친구들에게오는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줄을 설 때 연인과 달콤한 통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부러웠다. 그들의 통화내용을 엿들으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지를 넘어 가끔은 뒤통수를 가격하거나 전기충격기가 있다면 감전시키고 싶다는 생각도 났었다. 하지만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눈으로만 연마한 금지된 권법인 북두신권으로 "넌 이미 죽어있다" 라며 때리고 싶은 건 수화기를 잡고 노래하는 놈들이었다.
"떨리는 수화기를 잡고 너를 사랑해" 이 노래 가사를 불렀던 놈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나는 "떨리는 수화기를 잡고 너를 패고 싶었다" 라고
해주고 싶다. 하지만 나도 구애의 세레나데를 잘 할 수 있는데 삐삐의 전성시대 시절 내게 그런 구애활동을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젠장 난 목소리도 좋은데, 그리고 심지어 감미로운데...
입학식 때 차이나 칼라 양복을 입고 왔던 나의 경쟁자는 한 학기 동안 노예처럼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돈을 모아 휴대폰을 샀다.
4가지의 다양한 벨소리, 강려크한 진동 그리고 크기와 두께, 아주 작은 전구로 찍히는 숫자들.. 모든 것이 부러웠다. 그 놈은 수업 받을 때 당당히
휴대폰을 책상위에 올려 놓는 것은 물론이고, 길거리 다닐 때 전화가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통화하고 있는 척 연기를 하며 다녔다.
하지만 그 당시 엄청난 고가의 아날로그 휴대폰은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았는데 첫 번째 지하와 오락실에서는 터지지 않았고, 두 번째 달리면 터지지
않았으며 세 번째 엄청나게 비싼 통화료가 (내 기억에 받기만 해도 통화료가 나갔던 걸로 기억난다.) 부담이었다. 사실 터지는데 보다 안터지는 곳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오히려 통화하다 자주 끊어져서 통화하는 사람 속만 펑펑 터졌던 것 같다.
그 놈은 항상 미팅이나 소개팅 나가는 자리에 가면 항상 허세를 부리며 휴대폰을 테이블에 딱 꺼내놓고 상대방이 신기해 하면 떨리는 목소리로
"한 번 통화해 보세요" 라며 허세를 떨었다. 그리고 30초가 지나면 "저 급하게 전화 올때가 있어서" 멘트를 날리며 휴대폰을 뺏고는 했다.
하지만 부와 권력과 명예를 넘어 최상위층인 휴대폰이 있어도 안생기는 놈은 안생긴다고 그 놈도 여자친구는 꾸준히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여자들이 남자 보는 눈은 참 현명했던 것 같다. 아무튼 휴대폰의 노예였던 그놈을 나는 한동안 휴대폰 있는 병신이라고 불렀다.
영원할 거 같은 삐삐의 전성시대는 의외로 짧았다.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수줍게 떨리는 목소리로 "사실은 너를 좋아했었다"면서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입대한 뒤(물론 그녀는 훗날 고맙게도 부대로 편지를 써줬다. 당연히 내용은 "우린 좋은 친구야!"군생활 잘해 라는 내용이었다.) 밖에서는 휴대폰 그것도 무려 디지털!!이 보급 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핸드폰 하나씩은 있고 통화하고 싶은 사람과 눈치보지 않고 자유롭게 통화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가끔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전화박스 뒤에서 설레이며 줄을 섰던 그 때가 그립기도 하다.
결론은 난 목소리가 좋다. 그리고 심지어 감미롭다. 하지만 삐삐의 시대에도 스마트폰 보급율이 세계 1위라는 시대에도 집-회사를 제외하면 내 목소리를 들려줄 곳이 거의 없다. 삐삐도 알람, 핸드폰도 알람! 아.. 악순환은 반복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