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도 가난했던걸로 기억한다.
아니, 가난이란 개념이 뭔지 정확히 몰랐기에
그저 친구 집엔 있고 우리 집엔 없는 어항이나 장난감, 게임기가 부러울 뿐이었다.
오락실의 게임 한판이 50원 하던 시절 일주일 용돈 300원을 들고 친구들과 오락실에 간 기억.
나도 한판만 하게 해달라며 집까지 친구 가방을 들어줬던 기억.
크레파스가 없어 매일 빌려 쓰다 빌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았던 일.
그런 기억의 단편을 모아 보았을 때 우리 집은 가난 했던게 확실한 것 같다.
노가다 인부였던 아버지는 3일에 이틀은 술에 취해 어머니를 때렸고 불쌍한 어머니는
가정부, 붕어빵, 노점 등을 하며 악바리로 우리 형제를 키웠다.
웃음보다 울음소리가 퍼져나가는 집이었고 아버지는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폭군이던 아버지가 사라지니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평화는 고통과 같이 왔다.
어머니는 혼자 어린 남자 아이 둘을 키워야 했기에 조립공장에 나가셨고
새벽 5시에 출근해 밤 11시는 되어야 집에 돌아 오셨다.
7살 이었던 난 어머니가 보고 싶어 잠을 참고 기다렸지만 항상 10시를 넘기지 못하고 잠들었고
어머니를 보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새벽 잠결에 이불을 덮어 주시는 손길만 느끼고
혼자 일어나 반찬을 꺼내 밥을 먹었다.
밥이 없는 날은 500원짜리 동전이 하나 놓여 있어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땐 다른 애들도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리고 국민학교에 들어가서야 나는 뭔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8살 비가 오는 날에 나혼자 비를 맞으며 걸어갈 때
친구들은 어머니가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보았을 때..
감기가 심하게 걸려 집에서 혼자 숟가락에 가루약을 타 먹다가 토를 했는데
열이 38도를 넘었지만 어머니 오기전에 이걸 닦아야 된다는 걱정 때문에 내가 아픈 것도 몰랐을 때..
소풍 때, 운동회 때 항상 혼자거나 어쩌다 숙모가 어머니 대신 와줬을 때..
확실히 나는 조금 달랐다.
2학년이 되자 어머니회라는게 생겼다.
학교 앞에서 친구 어머니들이 교통지도를 했고
스승의날, 선생님 생일 땐 항상 선생님 책상에 선물이 한가득했고
그당시 40대의 여선생님은 어머니들께 전화 돌리기 바빴다.
나의 어머니는 단 한번도 교통지도를 한적도, 선물을 보낸적도, 전화를 받은 적도 없었다.
내가 준비물이 필요하다는 말도 단한번 하지 않았고
부모님 보여 드리라는 어머니회 참석 전달문도 전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유값, 저축비 등 돈과 관련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런걸 알리면 어머니가 슬퍼하시고 미안해 하실 것 같았다.
난 꽤나 조숙했던 아이였다.
결국 선생님이 직접 어머니께 전화를 했고 교통지도와 회비, 참석을 요구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만 하시는 어머니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고
사정을 이야기 한 후 참석을 못 한다고 하셨다. 그때부터였다.
어른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느낀게.
난 2학기 학급반장 투표에서 제일 많은 표를 받았지만 청소반장이 되었다.
대신 반장은 항상 깔끔한 양복 같은 걸 입고 아이보다 학교를 더 자주오는 어떤 아주머니의 아들이 되었다.
그 아주머니는 자기 아들이 반장이 된 다음날 햄버거와 콜라를 들고 반 아이들에게 돌렸고
선생님께도 포장지가 이쁜 선물을 줬다.
그일 이후 선생님에겐 아무 피해도 가지 않았고
어머니회에선 그 이야길 전해듣고 아무 날도 아닌데 선생님께 더 큰 선물들을 보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우리 어머니도 선생님께 사죄를 한 것 같다.
정말 병신같은 일이지만 그땐 분위기가 그랬다.
가난은 정말 죄고 우리 가족은 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