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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핥기 로마사(7)-율리우스 카이사르
게시물ID : history_43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5
조회수 : 5564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2/05/07 10:25:51
카이사르의 조각상. 동양에서 제국의 전제군주를 "황제"라고 하듯이 서양에선 제국의 전제군주를 "카이사르"라고 부른다. 서구문명에 카이사르가 남긴 인상은 워낙 뚜렷해서, 심지어 후대의 극작가는 이 원숭이에게 "Caesar"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가히 Caesar라는 이름에 걸맞는 원숭이다. 아니, 인류를 멸망시켰으니 실제 카이사르보다 더 대단한가?;;; 1. 카이사르의 정치적 성장 카이사르의 사회진출은 주피터 사제로서 시작하였다. 카이사르는 술라가 수백명의 반대파를 숙청할 때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다. 마리우스의 처조카인데다가 킨나(마리우스가 죽은 후 마리우스파의 지도자)의 사위였기 때문인데, 얄궃게도 그 처가는 술라의 가문이기도 했고 카이사르 본인이 주피터 사제였던 덕에 죽음을 면하였다. 하지만 부인과 이혼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도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도피생활 중에는 사제직을 포기하고서 군대에 들어가 속주를 전전하였다. 술라가 죽은 후 로마로 돌아와서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로 명성을 얻고 정계에 진출하였고, 승승장구하여 대신관직과 법무관, 히스파니아 총독을 거쳐 집정관이 된다. 술라가 후계자로 키운 폼페이우스는 bc70년 집정관이 되었고, 특히 동방원정에서 넓은 영토를 정복하면서 명성과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가 그랬듯 정치적으로는 민중파 소속이었는데, 집정관이 된 후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연합하여 3두 정치를 펼친다. 현존하는 여러 흉상들과 꽤 많이 닮은 배우가 섭외됐다. 미드 Rome에 나오는 카이사르. 2. 갈리아 원정 집정관 임기가 끝난 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한직으로 돌려 카이사르의 성장에 제약을 두려고 했지만, 폼페이우스의 압력으로 인해 갈리아 총독이 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해 7년 동안 라인강 연안에 이르는 갈리아 영토 대부분을 평정했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 나가있는 동안 폼페이우스의 처인 카이사르의 딸이 출산 도중 사망했다. 로마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폼페이우스는 나름의 사정 때문에 3두정치를 결렬시키고 카이사르 반대파와 정략결혼으로 손을 잡는다. bc52년 알레시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갈리아 정복은 사실상 끝난다. 알레시아 전투는 요새에서 농성하는 8만의 군대를 카이사르가 4~5만의 병력으로 포위하고, 그 카이사르의 포위군을 갈리아 연합군 26만이 포위한 상태에서 벌어졌다. 효과적인 병력배치와 신속하고도 튼튼한 방어진지건설로 카이사르 측은 역포위군 26만을 패퇴시켰고, 농성군 측이 항복하면서 카이사르 측이 승리를 거둔다. 갈리아 정복이 끝났음에도 카이사르가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있자 폼페이우스 중심의 원로원 측은 카이사르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집정관 임기 동안 저지른 불법행위를 조사하려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결국 카이사르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3. 폼페이우스와의 내전 그 당시에는 카이사르 자신 뿐 아니라 다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카이사르의 결심은 로마공화국의 종말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그는 bc49년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서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다. 다급해진 원로원 측은 폼페이우스에게 해결을 요구했는데,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내에 병력이 없다는 이유로 귀족들을 데리고 로마를 떠나 아드리아해를 건넌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스페인으로 가서 폼페이우스에게 충성하는 군단을 무찔렀다. 동방으로 건너가 폼페이우스 추격을 계속했으나, 폼페이우스는 싸움을 지구전으로 끌고 갈 경우 군인들에게 봉급도 주지 못하고 보급물자마저 부족한 카이사르가 스스로 붕괴될 것으로 여겼다. 실제로 이 시기에 갈리아 원정 당시 오른팔 역할을 했던 카이사르 막하 최고참 군단장마저 폼페이우스 측으로 배반을 했다. 하지만 로마를 떠난지 1년이 넘은 것을 견디지 못해하는 귀족들이 폼페이우스에게 결전을 벌일 것을 종용했고,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에서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에게 승리했다. 파르살루스에서는 2배 이상의 병력 차에도 불구하고 보병의 후방횡대를 빼돌려 폼페이우스군을 역포위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4. 권력을 장악한 카이사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알렉산드리아까지 추적하였고, 폼페이우스는 암살당하였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오래 머물면서 이집트 왕위계승 전쟁에 말려들었고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에 빠진다. 아프리카와 스페인에서의 폼페이우스 잔당들을 진압하고 루비콘 도하 4년만인 bc45년 내전을 종결시켰다. 그는 종신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반대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국정을 운영했다. 이 정책들은 대체로 성과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극심한 혼란에 빠진 로마의 질서가 회복되었고, 율리우스력을 도입했으며, 고리대금업자들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동전에 자기 얼굴을 새겨넣은 것은 카이사르가 최초이다. 5. 공화국의 종말 권력을 장악한지 불과 15개월, bc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살해당했다. 파르티아 원정계획을 공표한 직후였다. 그를 암살한 자들의 살해동기는 매우 복잡했지만, 아마도 카이사르가 왕을 자칭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것같다. 카이사르를 살해한 자들은 공화정 수호를 위한 결정이었다며 스스로 선언했으나 정작 현실의 문제에 대해 해법을 내놓지 못했고, 그리하여 이번에는 암살공모자들에 대한 반감이 거세게 일었다. 결국 암살공모자들은 모두 로마에서 도망을 가야했고 카이사르는 사람들에게 신으로 추앙되었다. 카이사르는 자기의 후계자로 1순위 옥타비아누스, 2순위 브루투스를 지정해두었다. 여기에 부관 안토니우스가 숫가락을 얹으려는 의도를 개입시키며 시대는 또다시 풍운에 휩싸인다. <카이사르의 암살>. 유명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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