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燕山君, 1476년 음력 11월 7일 (양력 12월 2일) ~ 1506년 11월 6일, 재위 1494년 ~ 1506년)은 조선의 제10대 임금이다.성은 이(李), 휘는 융(㦕), 본관은 전주(全州) [1]. 성종의 장남으로 폐비 윤씨의 소생이며,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모후 폐비 윤씨의 폐출 이후 정현왕후의 손에 자랐으나,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임을 알게 되었다. 그 뒤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숭하려 하자,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왕비 추숭을 반대한 사림파 문인들과 갈등하다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빌미로 사림파를 제거했다. 또한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빌미로 발생한 갑자사화에서는 훈구파도 대량으로 숙청되어, 사림, 훈구 양측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사림파 관료들과의 감정대립으로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예문관 등을 대폭 축소하거나 감원하고, 성균관과 원각사 (圓覺寺)를 기생 양성소와 유흥장으로 만들었으며, 민간 여자들과 반가의 사대부가의 여자들을 자의 혹은 강제로 입궐시켜 성관계를 갖는 등 치세 후반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에 관여된 성종의 후궁들을 타살한 뒤 그 시체를 내다버리게 하였으며,인수대비의 초상 때는 3년상 대신 25일로 장례를 마쳐 성리학자들의 비난을 초래했다. 1506년 중종 반정 후 강화군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었다가 곧 그해 11월에 사망했다.
폐위되었기에 시호가 없으며 생존 때 받은 존호는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다.[2] 진성대군(중종)의 이복 형이자 처고모부가 된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지목되고 있다.[3] 모후인 폐비 윤씨가 폐위되기 전에 태어나 세자로 책봉되었으므로 대군으로 강등되어야 했으나 중종 반정 직후 후궁 소생 왕자들에게 부여되는 군으로 강등당했다. 허침, 조자서, 정여창의 문인이다.
출처-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