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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바보가 되고 싶었던 아버지 이야기
게시물ID : humorstory_4348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성성2
추천 : 29
조회수 : 4288회
댓글수 : 43개
등록시간 : 2015/04/07 11:00:03
아버지께서는 큰 형이 태어났을 떄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났다면서 매우 기뻐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2년 후 작은 형이 태어났을 때
작은형의 다부진 얼굴을 보고 이제 밭일을 할 소 아니 듬직한 아들이 태어났다고 역시 기뻐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나를 임신하셨을 때 내심 이번엔 눈에 넣어도 안아플거 같은 딸이 태어나길 바라셨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아들이었다. 아버지꼐서 상상하셨던 모습은 두 아들이 밭을 갈고 자신은 귀여운 딸을 안고 흐뭇하게 아들들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기 검은소와 누렁소가 보이지? 쟤들 둘다 일 못해... 내가 제일 잘하지" 하면서 본인의 우월함을 뽐내고 싶으셨던 것 같다.
하지만 대대로 고추농사를 주업으로 해 타고난 고추파워 집안 내력을 지닌 우리 집안은 금딸의 집안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아버지 바람대로 우리는 걸음마를 떼면서 부터 재미있는 장난감이라고 물려받은 호미와 괭이 그리고 삽을 들고 밭에서 신나게 놀았다.
그때는 놀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철저하게 농업머신으로 조기 교육에 매진하신게 아닌가 싶다.
아버지는 흐뭇하게 세 아들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검은 소, 누렁 소, 동남아 소 중에서 그래도 작지만 동남아 소가 실하구만 허허허"
하시며 흐뭇해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밭으로 감시하러 나오신 어머니께 등짝 스매싱을 맞으시고 같이 밭일 하는 소 중의 한 마리가  
되고는 하셨다. 훗날 어머니께서는 "역시 늙은 소가 힘도 없고 제일 일도 못했지..심지어 밤일도..."라고 그때를 회고하셨다.
그리고 훗날 나는 군대에서 작업을 나갔을 때 선그라스 끼고 삿대질하며 지시하는 주임원사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했었다.
 
큰 형이 속도위반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형수님 집안에서는 "안되 이럴 수는 없어 내가 어떻게 기른 딸인데" 하며서 탄식할 때
(형수님은 무남독녀 외동딸이시다. 냉정하게 보았을 떄 귀엽다고 함부로 눈에 집어 넣으면 상당히 아플거 같이 생긴 외모이시다.)
우리 집안에서는, 아니 아버지는 이번에야 말로 손녀딸을 득템 아니 득녀할 기회라며 매우 기뻐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원이
삼신할매에게 통하였는지 산부인과 의사양반이 뀌뜸으로 "이쁜 옷 준비하세요. 분홍색으로" 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그날 온 가족을 모아놓고
(물론 형과 형수님은 그 당시 서울에 계셨다.) 막걸리를 즐기시면서 기쁨을 만끽하셨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은 어머니께서
곗돈 타셔서 아버지께서 용돈 받았을 때 눈먼 돈 생겼다고 비자금 조성하실 때와 어머니께서 동네 분들과 4박 5일로 태국 여행을 가셨을 때
이후로 처음 본 것 같았다.
나는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3남중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미소를 가진 막내의 얼굴로 "아빠, 엄마가 저 임신하셨을 때도
이렇게 기쁘셨어요?" 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어머니께 비자금을 걸렸을 때의 비통한 표정으로 돌변하시더니 "아니.. 어서 밥이나 먹어"
(그리고 고개 돌리고 내쪽 보고 밥먹지마.. 라고 하는 눈빛도 보내셨다.) 라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아버지께서 내 앞에서 부끄러우셔서 그렇게
말씀하신거라 믿고 있다. 후훗.. 아버지 츤데레 하시기는..
 
드디어 아버지께서 추곡수매를 마치고 돈이 들어오는 날 보다 더 기다렸던 손녀딸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하품하고 꼬물락 거리는조카를 보고 눈물을 거의 흘리실 뻔 했다. 그리고 형수님께 정말 고생했다. 수고했다 하시면서 감동하는 시아버지의 모습을 연출하셨다. 시골로 내려온 즉시 아버지는 조카의
이름을 짓겠노라 하면서 스님을 찾아가셨다. 스님께서는 복고풍을 선호하셨는지 격동의 60년대에나 어울릴만한 이름을 주셨다. 아버지는
스님의 법력을 피력하시며 강력하게 격동의 60년대 아이콘 같은 이름을 주장하셨지만, 어머니의 격렬한 반대(흠.. 어머니의 이름과 상당히
비슷해서 반대를 더 심하게 하셨던 거 같다.) 와 큰형과 형수님이 그럼 아이를 데리고 시골에 오지 않겠다는 협박에 결국 법력있는 스님이 지어주신
격동의 60년대의 아이콘과 같은 이름을 포기하셨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 조카가 시골에 내려온다. 조카가 내려가기전 아버지, 어머니는 온 집안의 대청소부터 시작해, 조카가 좋아하는 음식과 장난감, 그리고 혹시나 아이에게 위험할 거 같은 물건 (물론 나를 포함)을 격리한다. 특히 두 분이 뽀로로, 코코몽 등 아이와 놀아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율동과 노래를 연습하신 뒤 조카가 오면 자랑스럽게 선보이신다. 손녀의 말, 행동 아니 모든 순간이 두 분에게는 매우 소중한 시간인 것 같다. 나도 손녀를 하나 낳아드려야겠다. 안된다면 다음에 집에 갈때 여장이라도 한 번 해야되나..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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