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나는 동물과 곤충 등을 매우 이뻐하고 좋아해서 키우고 싶었지만 생각대로 제대로 키워본 적이 없었다.
학교앞에서 샀던 성별도 모르던 병아리는 "날아라 병아리"처럼 나와 함께 한 시간을 몇 일 되지도 않았다.
"삐약이"라는 누구나 지어줄 수 있는 흔한 병아리의 이름을 지어주고, 어머니 몰래 보양식으로 찹쌀도 먹여주며 함께 노래하며 놀던
삐약이가 퇴근 후 아니 퇴교 아니 하교 후 구름다리를 건넌 날 형에게 맞은 날보다 더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그런 나의 모습을 안쓰럽게 여긴 어머니께서 시골 장날 데려온 믹스견 돌돌이는 (돌처럼 강하게 크라는 의미로 지은 초등학교
3학년의 작명센스) 본인의 성정체성을 깨달은 성견이 될 무렵 더 넓은 세상과 암컷을 찾아 목줄을 직접 물어 뜯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갔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개새끼다.. 내가 먹을 고기도 안먹고 몰래 챙겨주고, 겨울에는 추울까봐 부모님 몰래 방안으로 데려와 재우고는 했는데....)
그날 나를 떠난 돌돌이를 찾으며 동네를 울고불고 다닌 기억이 난다. 그때 큰 형이 장난으로 아버지가 친구들과 잡아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때가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께 덤빈 날이 아닌가 싶다. 아버지께서는 대드는 나를 향해 단호하게 "이 자식아 난 냄새나서 개 안먹어, 그리고
같이 키우는 가족을 어떻게 먹냐" 라면서 화를 내셨다.
초등학교 이후 20년 동안 나와 애완동물은 맞지 않는구나 하면서 애완동물은 포기하고 살았다. 그러던 중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여자친구는 내게 자주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특히 무릎에 앉아서
애교도 부리고 퇴근하면 가장 먼저 달려와 다리 사이에 얼굴을 비비는 친구의 고양이를 봤을 때 너무 부러웠다는 말에 나는 "멀리서 찾지마
나도 너의 무릎에 앉아서 애교도 부리고, 가끔 너를 만나면 길거리에서도 너의 다리사이를 얼굴로 비벼줄 수 있다. 나는 심지어 백허그도 해줄 수 있다"라고 했다가 그녀의 아름답고 고운 입에서 나오는 거친 표현의 육두문자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퇴근 후 잠깐 만나자고 하는 연락에 나는 그녀에게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해주고 싶어 회사를 조퇴하고 고양이를 사기 위해
충무로에 갔다. 고양이가 이렇게 귀여운줄 몰랐는데, 아기 고양이들은 너무 귀여웠다. 물론 개들도 귀여웠다.
난 귀여움에 몸을 배배꼬며 흐르는 침을 닦으며, 사람 무릎에 잘 앉고, 얼굴로 다리를 잘 비비는 고양이 한 마리 추천을 해달라고 했다. 점원은 애교가 가장 많은 애라면서 검회색의 털과 에메랄드 눈빛을 가진 고양이를 데리고 왔다. 그 아기 고양이는 정말 귀여웠다. 고양이 장과 모래 (이때까지도 고양이가 대소변을 모래위에서 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화장실과 사료를 사들고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그녀가 좋아할까를 상상했다. "이거이거 길거리에서 좋다고 폴짝폴짝 뛰고 나한테 뽀뽀를 해주면 어떻게 하나 하하하"
이런 쓸데없는 하한가 세 번 맞은 주식 증권 조까리 같은 고민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약속장소로 나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환호할만한 멘트를 남겼다. "오빠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아무래도 우리는 안맞는거 같아..."
나는 "그래도 이 아기 고양이라도 데려가.. 너 고양이 기르고 싶어 했잖아. 내가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줘"
(물론 그 멘트를 남기기전에 제발 생각을 돌려보라며 그녀를 회유했지만, 그녀는 점심에 단호박 스프를 곱배기로 삶아 먹었는지 단호하게 싫어! 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기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대인배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 사실 마음에 없는 멘트를 날렸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고양이를 볼때마다 내가 생각날거 같다면서 거절해줬다. 결국 나는 아기 고양이와 고양이 용품 등을 들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녀와 헤어졌다는 아픔도 있었지만, 더 먼저 생각이 들었던 건 이 자식 이름을 뭘로 짓지 하는 고민이었다.
지금이었다면 오유에 이름 공모를 했겠지만, 그 당시 나는 실연의 아픔에 참치캔에 소주를 마시며 그 녀석을 바라보면서 이름들을 생각나는 데로
적었다. 톰 요크, 쥬드 로, 검둥이, 러시아 고양이니까 톨스토이, 효도르, 같이 자취하던 친구 이름인 봉구. 결국 난 친구놈을 약올리기 위해
봉구라고 지었다. (석달 후 봉구는 고양이와 같이 불리기 싫었는지 나를 버리고 장가를 갔다.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내겐 봉구가 있으니까)
그 뒤 나는 초보 집사가 되어 고양이 기르는 법을 학습했고, 봉구는 열심히 나와의 동거를 연습했다.
이 작은 놈이 아주 기특한게 대소변도 잘 가리고, 내가 와우를 하면 무릎에 앉아서 애드온 역할도 했으며, 가장 나를 미치게 한 건
퇴근하면 내 다리사이를 비비고 마치 "아빠" 하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나를 반겼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 내가 취해서 내가 현관에서
자면 추울까봐 내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함께 자주는 의리도 있는 놈이었다.
그렇게 봉구와 나는 좋은 주인(봉구)과 집사(나)의 관계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내가 해외로 2주간 출장을 가게 되어 집을 비우게 되었는데,
마땅히 봉구를 보낼 곳도 없고해서 부모님께 서울구경도 하실겸 서울에 오셔서 고양이 좀 봐달라고 했다.
(물론 처음에는 "내가 서울까지 가서 고양이 똥이나 치우라고! 하며 분노하시던 부모님도 "용돈 드릴께요" 하는 멘트에 생각을 바꾸시고 직접 손녀처럼 보겠다고 하셨다.)
드디어 부모님이 상경하시고 봉구와 처음 만나는 날, 봉구는 처음 보는 낯선 노인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었다.
(얼굴 비비기, 일어서서 매달리기, 무릎에 앉기 등) 낯선 고양이의 애교에 아버지는 당황하시는 표정이었고, 어머니는 자식들보다 더 애교있다고
좋아하셨다.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그런데 이 놈은 무슨 종이냐?
"네.. 러시안 블루요"
"무슨 술이름 처럼 생겼어, 종류가.."
"그런데 숫놈이냐 암놈이냐?"
"암놈이요"
"그럼 새끼 낳겠네!"
"못 나요.. 제가 중성화 수술 해서.."
"이런 썩을.. 왜 석녀를 만들어..사람이나 짐승이나 순리대로 새끼를 낳게 해야지."
"아.. 아버지 석녀가 뭐에요.. 새끼 때 자궁이 안좋아서 수술 해서 그래요..."
"근데 암놈인데 이름이 왜 봉구냐?"
"네.. 저 예전에 같이 살던 친구 이름이 봉구였잖아요. 그냥 걔 이름 딴거에요."
아버지는 마치 다스베이더가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내가 니 애비다" 했을때 스카이워커의 놀란 표정으로 "설마 너 그 자식 사랑했냐?"
"아니요! 그냥 그 친구 놀릴려고 지은 건데 이름이 착착 붙어서 봉구라고 부르는거에요."
아무튼.. 부모님께 봉구를 맡기고 난 2주간 중국에서 태국인 취급을 받으며 출장을 다녀왔다.
그런데 출장을 갔다 돌아왔는데, 집에 부모님도 봉구도 없었다. 심지어 봉구 용품들도 죄다 없어졌다.
설마 부모님이 봉구를 버리셨나! 분노하며 두 분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으신 아버지는 멘솔 담배처럼 아주 쿨하게 대답하셨다.
"어.. 봉구놈 몇일 전에 내가 데리고 내려갔다. 봉구도 넓은데서 살아야지 그리고 너 출근하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데 얼마나 불쌍하냐"
절대로 봉구가 이뻐서 데려갔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결국 봉구는 그렇게 나와 1년 2개월의 동거를 마치고 넓고 심지어 자신의 방까지 만들어준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 생활을 시작했다.
그뒤 봉구는 부모님께 8년째 엄청난 사랑을 받고 지내고 있다. 봉구가 내곁을 떠난 사실도 슬펐지만, 시골 집에 내려가면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나를 쳐다보며 "왔냐. 이놈.. 가서 닭가슴살이나 삶아라" 하는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봉구를 볼때
"이 건방진 자식..." 하는 생각도 들지만 부모님과 봉구 둘 다 모두 행복한 거 같아 다행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