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인가 1993년인가 늦가을인가 늦봄인가의 어느날 오후2시 과천현대미술관내 대강당에서 '백남준과의 대화'라는 행사가 있었다.
결석과다로 에프의 위기에 몰린 오후과목에 대해 한 20초간 고민을 하다 현대미술관으로 달려갔다. 국내 유명한 예술,문화계인사들과 일반참석자로 초만원을 이뤘다.
행사는 주최측이 요구한 것에 대한 백남준의 설명이 있은후 문화계인사들의 질문과대답, 일반인들의 질문 순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재미난 것 몇가지를 소개한다.
굵은 글씨는 백남준의 대답이다.
기자 :서울올림픽때 했던 위성비디오쇼에 왜 일본 마라토너의 모습이 자주나왔나요?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국제행사에.. 우리나라의.. 어쩌구 저쩌구..(질문 한 3분걸렸다) 왜 그랬나요?
삼성한테 티비와 기자재 스폰서를 부탁했는데 거절당하고 어쩌나 하고 있던차에 소니가 좋은 조건으로 스폰서를 해주면서 그 마라토너를 많이 보여달라고 했거든. (끝)
기자 : 다빈치의 모나리자라든가..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유럽의 고전회화와.. 어쩌구 저쩌구.. 어찌생각하시나요?
실제로 가서 보면 별론데. 오히려 화집이 더 생생하게 찍혀있더라구. (끝)
평론가 : 존케이지와 친하신걸로 아는데.. 존케이지의 전위 음악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난해하고.. 어쩌구 저쩌구.. 더군다나 자주 접하지 못한 국내일반관객에겐 더 난해하게 받아들여질텐데.. 존케이지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죠.
그럴리가 없는데. 존케이지는 불교나 동양사상에 심취한 사람이라 우리한테 더 익숙한데. (끝)
평론가 : 예술은 이제 벽에 부딛혔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닌데. 아직 할게 많은데. (끝)
평론가 : 앞으로 예술의 흐름이 어떻게 가시리라고 보십니까?
옛날엔 냉장고나 티비를 갖고 싶어했지만 이제 집집마다 갖고 있고, 자동차도 다 갖고 있고, 비디오도 다 있고, 하드웨어는 이제 다 있거든, 이제 놀아야 되니까 소프트웨어가 필요하지. 하드웨어를 돌려줄 소프트웨어.
평론가 : 초기엔 행위를 주로 하시다가 어떻게 티비로 작업을 하시게 됐나요?
헤프닝은 우선 관심을 끌기엔 좋거든, 일단 관심은 끌었는데 헤프닝은 한번하면 사라지거든, 서른도 넘고, 사라지지 않고 소장할수 있는걸 해야 돈이 된단말이야. 돈이 있어야 예술도 하거든, 집에서 보내주는 돈도 끊겼고, 뭘 할까하다가 눈에 들어온게 티비지.
평론가 : 무어맨(여자, 미국, 행위예술가)과 염문 같은게 있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실재로 어느정도 친한 사이셨나요? 뭐 작업외에 특별한 애정 같은게 있었나요?
그런거 다 얘기하면 무슨 재미야. 미스테리가 있어야지.
문화계 인사 : 나는 예술이란.. 인간이 갖는 보편적 가치관을.. 어쩌구 저쩌구... (무려 10여분에 달하는 예술관을 죽 늘어놓으며) 이런걸 예술이라고 보는데 백선생께서는 예술을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예술에 대해서 아주 많이 아시네. 난 잘 모르는데. 다음 질문.
(장내는 뒤집어졌다)
중학생여자아이 : 선생님 저는요... 화실에서 그림 그릴때여 미술선생님이 넌 왜 맨날 아무생각 없이 그림 그리니 라고 하시면서 혼을 내시거든여. 선생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하세요?
너 정말 그림 그릴때 아무생각 없이 하니?
중학생여자아이 : 예.
너 대단하구나! 나두 아직 작업할때면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데. 앞으로 선생님 말 듣지 말고 계속 아무생각 없이 해라!
(장내엔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일주일뒤, 무슨 깡으로 또 결석을 했냐는 교수의 질문에 자초지종을 야그했다.
교수 : 그럼 에프를 각오하고 내수업 대신 그 세미나를 선택했다 이거지?
진국 : 예.
교수 : 그런 세미나 있으면 나한테도 알려주지. 혼자만 가냐?!
그 교수님은 같은 시간에 본인 강의보다 더 좋은 강의를 듣고 왔으니 됐다며 출석으로 인정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