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분명히 박정희정권과 장면내각의 차이점을 기술하려고 그 논술을 인용했던 것인데요 ?
이 논문은 박정희정권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논문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에 대한 기술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장면내각의 정책과 박정희정책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그 자료로를 가져왔는데요?
연도에는 도약단계를 준비하기 위한 요소공격식 접근법을 취할 것을 밝혔다. 그리고 ‘현재 작성 중에 있는 제1차5개년계획은 이와같은 현실의식에 입각’하고 있다고 하면서 제1차5개년계획의 ‘3가지 지도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① 전력, 석탄 등의 전략적 부문에 대한 중점적 투자를 통하여 산업기반을 구축하고,
② 유휴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국토의 개발과 고용의 확대를 꾀하고,
③ 농업생산력을 증대하여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둔다.
이러한 원칙과 방향에 따라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1961년 2월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요강」이라는 문건을 작성하였다. 이 요강을 토대로 1961년 3월 13일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부흥부 특별고문 자격으로 내한한 미국의 찰스 울프 박사와 함께 경제개발계획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 때 브리핑은 김립삼이 맡았다고 한다. 산업개발위원회에서의 토론 후 찰스 울프 박사는 3월 28일자로 부흥부 장관 태완선에게 보고서를 작성하여 답변했다.
1961년 2월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을 작성한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이것을 울프 박사에게 보여 자문을 구했다. 태완선 부흥부 장관은 1961년 3월 4일 찰스 울프 박사에게 수립요강에 대한 정밀하고 충분한 평가를 요청하면서, 2가지 사항에 대해 특별한 의견을 구했다. 첫째, 불균형 성장 전략과 균형 성장 전략에 대한 이론적 평가를 요청했다. 둘째 정부의 경제기구 개편안에 대한 평가도 요청했다. 이것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이미 확정된 상태에 있는 불균형 성장 전략과 경제기구개혁안에 대한 평가를 요청한 것이었다.
울프는 1961년 3월 28일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그 제목은 「한국경제개발5개년계획에 관한 관견」으로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울프의 견해는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대부분이 반영되었다. 따라서 자세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제1편 <한국경제현황과 신오개년계획>에서는 한국 경제의 경제성장률에 대해 언급하면서 저성장 사실보다는 성장률 저하 현상을 역전시키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했다. 또 북한과의 경쟁을 지나치게 의식하기보다는 국민의 복지와 만족도에 유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국민 소득에 대한 우선적 고려는 수립요강의 취지와 같은 것이다. 그는 한국의 시장 기능의 불완전성과 경직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과도한 국방비 부담과 미국의 소비재 중심의 원조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는데 대해 비판적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도매물가 지수가 20% 이상 상승되었음을 지적하면서,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물가의 안정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
그의 입장은 감군을 통해 국방비를 절감하여 이것을 경제개발계획 자금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또 과도한 투자를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의도를 견제하면서 물가안정에 바탕을 둔 적정 규모의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제2편 <균형 성장 대 전략부문 중점 성장(불균형 성장) 개념의 평가>에서는 불균형 성장이론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로스토우(Rostow)의 역사적 관점에서의 불균형 성장이론, 자원부족을 강조하여 희소자원의 특정 부문 집중 투자를 강조하는 싱가(Singer)의 이론, 경영 능력과 판단 결정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특정 부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허쉬만(Hirschman)의 이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울프는 싱거와 허쉬만의 불균형성장이론이 한국에 타당하다고 했다. 집중 투자해야 할 분야로 <동력>과 <농업>을 추천했다.
이것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채택한 불균형 성장 전략에 찬성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단서를 달았다. 경제개발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자립적 경제성장의 달성’이라는 목표를 1차에서 달성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서둘지 말고 장기적인 계획하에 점진적으로 추진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울프의 제안을 한국측에서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특히 그의 안정적 성장론은 민주당의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의 기본적 논조가 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제5장 <정부의 기능과 주요정책>에서 먼저 정부의 기능에 대해서는 정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의 국체’는 불변임을 강조했다. 따라서 ‘경제과정에 대한 정부의 위치 내지 기능은 어디까지나 자유경제적 질서를 지반으로 한 경제계획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적인 정치 사회적 상황을 언급하면서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의 ‘영도력’을 갖춘 제도 개혁방안이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계획의 ‘성격’에 대해 민주당안은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 혹은 ‘혼합경제체제’를 지향한다고 했다. 그리고 과거 이승만 정부의 균형성장 전략을 비판하고 공업화 중심의 불균형 성장 전략을 채택하였음을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공공부문에서는 정부의 주도로 민간 부문에서는 유도하는 정책을 취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군사정부의 계획에서도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한다고 했다. 동일하게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를 표방했던 것이다. 경제기획원의 계획에서 표방한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개념은 이미 제2공화국의 계획안에서 마련되었던 것이다. 다만 군사정부안에서는 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크게 강조하였다. 기존의 경제정책의 실패 원인을 민간 기업의 자유에 맡기는 자유방임정책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계획이 모두 불균형 성장 전략을 채택하고 있는 점도 동일하다. 다만 국가와 민간 기업의 역할, 산업별 경중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두 계획의 더 큰 차이는 경제성장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있다.
민주당안은 경제개발계획의 궁극적 목표를 국민생활의 향상을 통한 복지사회 건설에 두었
군사정권에서는 자본회전율이 낮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자본회전율이 높은 제1차산업과 제2차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을 높였다. 이를 통해 단기간 내에 경제성장률을 제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마치 공업화 전략 추진 의도가 더 두드린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군사정권에서는 자본회전율이 낮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자본회전율이 높은 제1차산업과 제2차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을 높였다. 이를 통해 단기간 내에 경제성장률을 제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마치 공업화 전략 추진 의도가 더 두드린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제2공화국의 경제정책,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연구는 9개월의 단명 정권인데다가 경제개발계획의 실체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그동안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 기껏해야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연구하는 데 대한 보조적인 혹은 부차적인 연구나 이승만 정권에서 군사정부로의 경제개발계획으로의 이행에서의 과도기적 성격으로서만 파악되었을 뿐이다.3)
이들의 연구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차이를 정권의 경제성장 의지의 차이로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은 고도 경제 성장 실천 의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고 낮게 평가되었다. 이러한 근거로는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과 대비되어 경제성장률을 7.1%보다 낮은 5.6%로 설정했다는 점,4) 정부가 주도하여 실시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부족했다는 점, 공업화 추진 전략도 상대적으로 취약했다는 점, 주체적 의지보다는 미국 측의 의도를 많이 반영했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제2공화국의 경제정책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근 연구로 유광호는 민주당 정권에서 작성한 경제정책 관련 자료에 대해 최초로 구체적인 분석을 진행했다. 그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4.19이후 표출된 경제개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고, 이후의 경제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은 완성되지 않았으며, 실천의지가 부족했다고 평가했다.5)
박진희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 전반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여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한 것 자체는 평가했지만, 실천의지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함으로써 기존의 부정적 평가를 답습하였다. 6)
김기승은 당시에 나온 자료를 토대로 1961년 5월 건설부시안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이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완성판임을 완곡하게 밝히면서 건설부 시안의 형식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 으로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분석하면서 이 계획이 비록 짧은 통치기간으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으나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점을 들어 높이 평가 하고 있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