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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승리 하지 마시고요 ^^ 논리적인 반박부탁해요 ^^
게시물ID : sisa_3449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라라리호
추천 : 2/2
조회수 : 291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3/01/07 20:38:22



박정희정권과 장면정권의 차이점을 서술할려고 했었던 것인데요?


5.16 이후 박정희는 당시 18명의 재벌급 기업인을 부정축재자로 구속하고 51억원이 넘는 환수액을 통보했는데
군사정부는 임시특례법을 만들어 현금 대신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는 공장을 짓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독재정책들로 공업단지를 빠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吳緯泳(오위영) 무임소 국무위원은 이 시안을 바탕으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4일 전인 5월12일 오후 4시부터 장면 총리를 방문한 뒤 약 한 시간 반 동안 정부가 1962년부터 시행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협의했다. <조선일보>는 다음날 1면을 통해 ‘민주당 내각─경제 5개년 계획 윤곽 판명/일본의 재산권배상이 아니면 미·영·독 등 차관 依據(의거)/우선 석탄 年産(연산) 2000만 톤 목표’란 제목으로 그 내용을 보도했다. 5월14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민주당 정부의 5개년 경제 계획론은 緣木求魚(연목구어)격’이란 제목으로 비판했다. 정소영의 회고─.
 
  “흔히 혁명정부가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모방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들 계획을 검토는 했지만 이용가치가 없어 새 계획을 짰던 겁니다.”
 
  이 밖에도 이들이 참고한 자료들로는 한국은행의 장기종합 경제개발 계획, 최고회의 기획위원회의 장기개발 계획 등이 있었다. 5월 중순부터 약 2주 동안 세 사람은 골방에 갇혀 기본전략판단을 내리는 데 골몰했다. 우선 균형 성장정책을 취할 것인가, 불균형 성장정책을 취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재원을 산업분야별로 고루 분배하는 균형성장정책은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데는 쉬 합의가 이루어졌다. 정소영은 이렇게 정리했다고 한다.
 
  “거지 옷 꿰매듯 해서는 안 됩니다. 자본회전속도가 빠르고, 작게 투자해서 빨리 이윤을 낼 수 있도록 자본계수가 작은 분야를 먼저 공략해야 합니다. 교육에 투자하면 20년 뒤에나 효과를 봅니다. 농업에 투자하면 종자개량이다, 수리사업이다 해서 최소한 10년은 걸립니다. 공업에 투자하면 공장 짓고 생산하는 데 5년이면 충분합니다. 빨리 富(부)를 늘리려면 1차 산업과 3차 산업에는 좀 미안하지만 2차 산업에 우선 투입하는 방법이 좋을 것 같습니다. 2차 산업에서 부를 늘려 1, 3차 산업에 투입하는 불균형 성장정책으로 결정합시다.”
 
  성장전략이 결정되자 성장률과 투자율을 산정했다. 기준연도인 1961년의 1인당 GNP는 83달러, 국내저축률은 3.9%, 투자율 13.1%, 수출 4087만 8000달러, 수입 3억 1600만 달러라는 참담한 경제규모였다. 민주당의 계획은 연 5%의 성장을 목표로 했으나 이들은 연 7.1%로 책정했다. 사회는 경제개발에의 기대가 팽배해 있었고 박정희 소장이 이들 세 사람에게 심어준 의지와 신념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용 가능한 자금 중 투자자금에 활용되는 비율인 ‘총가용자원에 대한 투자비율’은 21%, 총소득 중 저축을 뺀 ‘소비율’은 79%, 국내 저축률은 7.2% 등 목표수치를 구체화해 갔다. 이 계획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부의 역할을 한층 강조한 부분이었다.
 
  “생산수단을 정부가 장악하고 계획경제를 하던 공산주의와 달리 우리는 정부가 주도하되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살리는 정부주도 형태의 시장 경제체제를 만들어 본 겁니다. 일종의 혼합 경제체제였지요. 2차 산업의 자본형성에 대한 정부의 역할을 비약적으로 높이 책정했습니다. 종전의 비효율적인 투자의 원인을, 투자재원의 배분과 관리를 전적으로 민간인에게 의탁했다는 점과 가격기구의 매개기능을 자유방임 형태로 놓아 둔 것에서 찾았습니다. 시장경제를 제대로 해 낼 수 없는 나라가 무조건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시장경제를 흉내내니 악순환만 계속됐던 겁니다. 우리는 보고서를 통해 이런 민간주도의 경제운영을 비판하면서 국가주도의 경제운영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작업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갈 무렵 서울 商大(상대)에서 강의하던 朴喜範(박희범·뒤에 문교부 차관 역임) 교수도 참여했다. 7월 중순 확정된 안의 공식명칭은 ‘종합경제재건계획(안)’이었다. 네 사람은 7월20일경 최고회의 전체회의에서 보고회를 갖게 됐다. 박정희 의장을 위시해 각 부처 간부급 요원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 정소영 박사가 차트를 넘겨 가며 보고·설명을 했다. 박희범 교수는 경제 용어를 설명했다.
 
  “…불균형성장정책을 통해 우리가 강구해야 할 전술적 목표는 다음 두 가지가 되겠습니다. 첫째, 2차 산업을 제일 먼저 육성하되 수출주도형으로 합니다. 방식은 模倣成長(모방성장) 정책을 통해 고도성장을 목표로 합니다. 세계 시장에서 팔리는 물건을 빨리 모방해 가격을 낮게 책정함으로써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조립방식으로 가는 겁니다. 라디오를 생산하더라도 수백 가지 기초자재를 우리가 다 만들면서 수출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은 많으니 우선 부품을 수입한 뒤 조립해서 수출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처음에는 부가가치가 작게 발생하더라도 고용효과가 크고, 수출량을 늘릴 수 있습니다. 이윤이 축척되면 단계적으로 국산화 비율을 늘리고 그러면 언젠가는 순수 국산 라디오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정소영 박사가 브리핑을 하면서 보니 박정희 의장은 열심히 받아 적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브리핑이 끝나자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때 박 의장이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뒤돌아서면서 박수를 힘차게 치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선도에 따라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졌다. 완성된 ‘최고회의 종합경제재건계획’은 경제기획원으로 이관되어 ‘5개년 종합경제기획안’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수립하는 데 기초가 됐다.
http://www.natizen.com/board/view.asp?C_CC=AZ&C_IDX=38007&cpage=1




저는 장면내각의 정책과 박정희정책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그 자료로를 가져왔는데요?
연도에는 도약단계를 준비하기 위한 요소공격식 접근법을 취할 것을 밝혔다. 그리고 ‘현재 작성 중에 있는 제1차5개년계획은 이와같은 현실의식에 입각’하고 있다고 하면서 제1차5개년계획의 ‘3가지 지도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① 전력, 석탄 등의 전략적 부문에 대한 중점적 투자를 통하여 산업기반을 구축하고,
  ② 유휴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국토의 개발과 고용의 확대를 꾀하고,
  ③ 농업생산력을 증대하여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둔다.

  이러한 원칙과 방향에 따라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1961년 2월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요강」이라는 문건을 작성하였다. 이 요강을 토대로 1961년 3월 13일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부흥부 특별고문 자격으로 내한한 미국의 찰스 울프 박사와 함께 경제개발계획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 때 브리핑은 김립삼이 맡았다고 한다. 산업개발위원회에서의 토론 후 찰스 울프 박사는 3월 28일자로 부흥부 장관 태완선에게 보고서를 작성하여 답변했다.


 1961년 2월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을 작성한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이것을 울프 박사에게 보여 자문을 구했다. 태완선 부흥부 장관은 1961년 3월 4일 찰스 울프 박사에게 수립요강에 대한 정밀하고 충분한 평가를 요청하면서, 2가지 사항에 대해 특별한 의견을 구했다. 첫째, 불균형 성장 전략과 균형 성장 전략에 대한 이론적 평가를 요청했다. 둘째 정부의 경제기구 개편안에 대한 평가도 요청했다. 이것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이미 확정된 상태에 있는 불균형 성장 전략과 경제기구개혁안에 대한 평가를 요청한 것이었다.
  울프는 1961년 3월 28일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그 제목은 「한국경제개발5개년계획에 관한 관견」으로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울프의 견해는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대부분이 반영되었다. 따라서 자세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제1편 <한국경제현황과 신오개년계획>에서는 한국 경제의 경제성장률에 대해 언급하면서 저성장 사실보다는 성장률 저하 현상을 역전시키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했다. 또 북한과의 경쟁을 지나치게 의식하기보다는 국민의 복지와 만족도에 유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국민 소득에 대한 우선적 고려는 수립요강의 취지와 같은 것이다. 그는 한국의 시장 기능의 불완전성과 경직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과도한 국방비 부담과 미국의 소비재 중심의 원조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는데 대해 비판적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도매물가 지수가 20% 이상 상승되었음을 지적하면서,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물가의 안정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
  그의 입장은 감군을 통해 국방비를 절감하여 이것을 경제개발계획 자금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또 과도한 투자를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의도를 견제하면서 물가안정에 바탕을 둔 적정 규모의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제2편 <균형 성장 대 전략부문 중점 성장(불균형 성장) 개념의 평가>에서는 불균형 성장이론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로스토우(Rostow)의 역사적 관점에서의 불균형 성장이론, 자원부족을 강조하여 희소자원의 특정 부문 집중 투자를 강조하는 싱가(Singer)의 이론, 경영 능력과 판단 결정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특정 부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허쉬만(Hirschman)의 이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울프는 싱거와 허쉬만의 불균형성장이론이 한국에 타당하다고 했다. 집중 투자해야 할 분야로 <동력>과 <농업>을 추천했다.
  이것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채택한 불균형 성장 전략에 찬성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단서를 달았다. 경제개발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자립적 경제성장의 달성’이라는 목표를 1차에서 달성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서둘지 말고 장기적인 계획하에 점진적으로 추진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울프의 제안을 한국측에서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특히 그의 안정적 성장론은 민주당의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의 기본적 논조가 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제5장 <정부의 기능과 주요정책>에서 먼저 정부의 기능에 대해서는 정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의 국체’는 불변임을 강조했다. 따라서 ‘경제과정에 대한 정부의 위치 내지 기능은 어디까지나 자유경제적 질서를 지반으로 한 경제계획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적인 정치 사회적 상황을 언급하면서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의 ‘영도력’을 갖춘 제도 개혁방안이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계획의 ‘성격’에 대해 민주당안은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 혹은 ‘혼합경제체제’를 지향한다고 했다. 그리고 과거 이승만 정부의 균형성장 전략을 비판하고 공업화 중심의 불균형 성장 전략을 채택하였음을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공공부문에서는 정부의 주도로 민간 부문에서는 유도하는 정책을 취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군사정부의 계획에서도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한다고 했다. 동일하게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를 표방했던 것이다. 경제기획원의 계획에서 표방한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개념은 이미 제2공화국의 계획안에서 마련되었던 것이다. 다만 군사정부안에서는 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크게 강조하였다. 기존의 경제정책의 실패 원인을 민간 기업의 자유에 맡기는 자유방임정책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계획이 모두 불균형 성장 전략을 채택하고 있는 점도 동일하다. 다만 국가와 민간 기업의 역할, 산업별 경중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두 계획의 더 큰 차이는 경제성장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있다.  
  민주당안은 경제개발계획의 궁극적 목표를 국민생활의 향상을 통한 복지사회 건설에 두었

 군사정권에서는 자본회전율이 낮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자본회전율이 높은 제1차산업과 제2차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을 높였다. 이를 통해 단기간 내에 경제성장률을 제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마치 공업화 전략 추진 의도가 더 두드린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군사정권에서는 자본회전율이 낮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자본회전율이 높은 제1차산업과 제2차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을 높였다. 이를 통해 단기간 내에 경제성장률을 제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마치 공업화 전략 추진 의도가 더 두드린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또한 다른 논문을 보여드리죠


   제2공화국의 경제정책,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연구는 9개월의 단명 정권인데다가 경제개발계획의 실체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그동안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 기껏해야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연구하는 데 대한 보조적인 혹은 부차적인 연구나 이승만 정권에서 군사정부로의 경제개발계획으로의 이행에서의 과도기적 성격으로서만 파악되었을 뿐이다.3)

   이들의 연구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차이를 정권의 경제성장 의지의 차이로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은 고도 경제 성장 실천 의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고 낮게 평가되었다. 이러한 근거로는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과 대비되어 경제성장률을 7.1%보다 낮은 5.6%로 설정했다는 점,4) 정부가 주도하여 실시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부족했다는 점, 공업화 추진 전략도 상대적으로 취약했다는 점, 주체적 의지보다는 미국 측의 의도를 많이 반영했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제2공화국의 경제정책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근 연구로 유광호는 민주당 정권에서 작성한 경제정책 관련 자료에 대해 최초로 구체적인 분석을 진행했다. 그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4.19이후 표출된 경제개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고, 이후의 경제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은 완성되지 않았으며, 실천의지가 부족했다고 평가했다.5)

   박진희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 전반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여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한 것 자체는 평가했지만, 실천의지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함으로써 기존의 부정적 평가를 답습하였다. 6)

   김기승은 당시에 나온 자료를 토대로 1961년 5월 건설부시안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이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완성판임을 완곡하게 밝히면서 건설부 시안의 형식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 으로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분석하면서 이 계획이 비록 짧은 통치기간으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으나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점을 들어 높이 평가 하고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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