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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학
게시물ID : readers_43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wkokwk
추천 : 1
조회수 : 252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2/12/01 15:06:43

시작은 11 22. 늦은 밤 9시였다.

 

그날도 우리는 피곤한 몸을 웃음으로 씻어내리려 유머 사이트에 접속했다. 유머인지 시사인지 모를 사이트. 현실부터가 유머인지 판타지인지 모를 이 시기에, 유머라는 정체성을 잃고 싸우는 사이트에서 노는 것도 나름 아이러니컬하지 않을까, 하는 허세를 잔뜩 집어넣고.

 

[오유 문학제 최종 공지]

 

궁금함에 클릭을 해 본다. 자격은 누구나. 상품은 전자책 출판과 VIP 식사권. 물론 허세에 가득찬 중 2병 대학생에게 식사권이라는 것은 첫 번호부터 틀려먹은 로또와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해 볼까?"

 

어짜피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 해도 내 지식이 낳은 성적은 낮다. 낮은 곳에서 나은 곳으로 가려고 뻗은 손 조차도 짧아 희망이 보이진 않는다. 무료한 일상에 무기력한 인생. 거기에 한 줌 햇빛을 빙자한 백열등 불빛 한 가닥을 넣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운문과 산문, 둘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는 조건. 어찌 생각하면 운문이 쉽다, 라고 생각한다. , 초등학교 때 일기에 쓸 게 없으면 적어넣었던 것이 시 아니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운문으로 모일 것이다. 자연히, 산문에는 경쟁이 적어진다. 어차피 두 페이지. 그다지 길지도 않다. 운문은 천재의 것이고 산문은 노력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애초에 재능도 없고 노력도 없는 내게는 둘 다 같지만, 내 능력으로 지은 운문에는 의문만이 가득 할 것이므로 산문에 머리를 넣어보자.

 

짧은 결정을 마치고 기다린다. 주제가 정해지면 무엇을 쓸까.

 

12 1일 오전 11. 게임 몇 판 하다가 오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슬슬 게시판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이 게시판은 글 수가 적다.

 

12.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씹는다. 쌀은 내 성적과 같이 떨어진 지 오래고, 돈은 내 인생처럼 바닥에 머물러 있다. 주리는 배를 비워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김치를 씹는다. 내 모습이 매우 처량해 보이겠지.

 

1. 시작했다. 아니, 시작했어야 했다. 하지만 주최자는 보이지 않는다. 늦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시간은 풍족하지 않지만 우리 마음마저 팍팍하지는 않다. 젓가락질과 클릭질을 멈추지 않으며 기다린다. 여전히 주최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보이는 것은 오로지 김치 반찬통의 바닥. 그저 붉은 국물만이 보인다.

 

1 30. 서서히 다른 사람들의 의문의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대체 주최자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날짜를 확인한다. 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다시 공지를 확인한다. 내 기억과 일치한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일치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진다.

 

애초에 사람을 믿으면 안됐다. 익명이라는 탈을 쓴 게시판에서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다. 믿는 것이 이상한 것이지. 라고 생각하려다 관둔다. 적어도 로또를 산 날처럼 잠깐동안 기쁨을 느꼈으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하면서도 내 오른 손은 새로고침을 클릭한다.

 

2. 서서히 의문이 분노로 바뀐다. 아무런 말이 없다. 아무런 공지가 없다. 참가자와 후원자와 관객은 존재하지만 주최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최자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대회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습지만, 현실이다. 주최자, 후원자, 참가자, 관객의 네다리 밥상이 한쪽 다리를 잃어 기능을 잃었다.

 

2 30. 결국, 이렇게 되었다. 모두는 분노에 이기지 못했다. 보이콧을 선언하는 사람이 있다. 현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분노를 내뿜는 사람이 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들 중 그 누구도 시간과 기대감 이외에 다른 것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대감이 워낙 거대했던 것이었을까. 그 누구도 주최자에게 돌을 날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3. 결국 후원자가 다시 등장했다. 새로운 주최자가 등장했다. 참가자는 떠난 사람도, 남은 사람도 있다. 관객들은 뭐, 대회가 홍보될 때마다 언제나 등장하는 법이니까.

 

룰이 다시 정해진다. 상품이 다시 정해진다. 같은 이름, 같은 조건 하에, 같은 참가자를 데리고서. 모든 것이 똑같이, 다시 이루어진다. 주최자만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을 뿐. 기계의 톱니바퀴 하나를 갈아내는 것과 똑같이,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전 주최자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되었을까, 무슨 사정이 생겼을까.

 

나는 더 이상 먹을 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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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김에 그냥 2페이지 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 체크도 할 겸 한편 써 봤습니다. 30분정도 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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