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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잭규님 정신승리하시네요 ^^
게시물ID : sisa_3449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라라리호
추천 : 0/2
조회수 : 20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01/07 21:32:35

저는 그 논문을 통해서 박정희정권과 장면정부가 달랐던 부분을 서술할려고 했던 것인데요?

다시 한번 보실래요? ㅋㅋㅋ

아니 저는 논문에 들어있는 사실관계를 주장했던 것인데요?

다시한번 보여들리까요?
ㅎㅎ
박정희정권과 장면정권의 정책이 달랐고 그방향성이 달랐다는것을 설명하려고
박정희정권에 대해서 비판적인 논문까지 가지고 왔었던 것입니다
물론 비판적으로 해석하지만 그 논문에서도 박정희정권과 장면정권의 차이점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제가 가지고 온 자료들을 보시죠 ^^


저는 장면내각의 정책과 박정희정책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그 자료로를 가져왔는데요?
연도에는 도약단계를 준비하기 위한 요소공격식 접근법을 취할 것을 밝혔다. 그리고 ‘현재 작성 중에 있는 제1차5개년계획은 이와같은 현실의식에 입각’하고 있다고 하면서 제1차5개년계획의 ‘3가지 지도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① 전력, 석탄 등의 전략적 부문에 대한 중점적 투자를 통하여 산업기반을 구축하고,
  ② 유휴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국토의 개발과 고용의 확대를 꾀하고,
  ③ 농업생산력을 증대하여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둔다.

  이러한 원칙과 방향에 따라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1961년 2월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요강」이라는 문건을 작성하였다. 이 요강을 토대로 1961년 3월 13일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부흥부 특별고문 자격으로 내한한 미국의 찰스 울프 박사와 함께 경제개발계획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 때 브리핑은 김립삼이 맡았다고 한다. 산업개발위원회에서의 토론 후 찰스 울프 박사는 3월 28일자로 부흥부 장관 태완선에게 보고서를 작성하여 답변했다.


 1961년 2월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을 작성한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에서는 이것을 울프 박사에게 보여 자문을 구했다. 태완선 부흥부 장관은 1961년 3월 4일 찰스 울프 박사에게 수립요강에 대한 정밀하고 충분한 평가를 요청하면서, 2가지 사항에 대해 특별한 의견을 구했다. 첫째, 불균형 성장 전략과 균형 성장 전략에 대한 이론적 평가를 요청했다. 둘째 정부의 경제기구 개편안에 대한 평가도 요청했다. 이것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이미 확정된 상태에 있는 불균형 성장 전략과 경제기구개혁안에 대한 평가를 요청한 것이었다.
  울프는 1961년 3월 28일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그 제목은 「한국경제개발5개년계획에 관한 관견」으로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울프의 견해는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대부분이 반영되었다. 따라서 자세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제1편 <한국경제현황과 신오개년계획>에서는 한국 경제의 경제성장률에 대해 언급하면서 저성장 사실보다는 성장률 저하 현상을 역전시키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했다. 또 북한과의 경쟁을 지나치게 의식하기보다는 국민의 복지와 만족도에 유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국민 소득에 대한 우선적 고려는 수립요강의 취지와 같은 것이다. 그는 한국의 시장 기능의 불완전성과 경직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과도한 국방비 부담과 미국의 소비재 중심의 원조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는데 대해 비판적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도매물가 지수가 20% 이상 상승되었음을 지적하면서,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물가의 안정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
  그의 입장은 감군을 통해 국방비를 절감하여 이것을 경제개발계획 자금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또 과도한 투자를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의도를 견제하면서 물가안정에 바탕을 둔 적정 규모의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제2편 <균형 성장 대 전략부문 중점 성장(불균형 성장) 개념의 평가>에서는 불균형 성장이론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로스토우(Rostow)의 역사적 관점에서의 불균형 성장이론, 자원부족을 강조하여 희소자원의 특정 부문 집중 투자를 강조하는 싱가(Singer)의 이론, 경영 능력과 판단 결정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특정 부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허쉬만(Hirschman)의 이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울프는 싱거와 허쉬만의 불균형성장이론이 한국에 타당하다고 했다. 집중 투자해야 할 분야로 <동력>과 <농업>을 추천했다.
  이것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채택한 불균형 성장 전략에 찬성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단서를 달았다. 경제개발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자립적 경제성장의 달성’이라는 목표를 1차에서 달성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서둘지 말고 장기적인 계획하에 점진적으로 추진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울프의 제안을 한국측에서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특히 그의 안정적 성장론은 민주당의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의 기본적 논조가 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제 5장 <정부의 기능과 주요정책>에서 먼저 정부의 기능에 대해서는 정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의 국체’는 불변임을 강조했다. 따라서 ‘경제과정에 대한 정부의 위치 내지 기능은 어디까지나 자유경제적 질서를 지반으로 한 경제계획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적인 정치 사회적 상황을 언급하면서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의 ‘영도력’을 갖춘 제도 개혁방안이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계획의 ‘성격’에 대해 민주당안은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 혹은 ‘혼합경제체제’를 지향한다고 했다. 그리고 과거 이승만 정부의 균형성장 전략을 비판하고 공업화 중심의 불균형 성장 전략을 채택하였음을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공공부문에서는 정부의 주도로 민간 부문에서는 유도하는 정책을 취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군사정부의 계획에서도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한다고 했다. 동일하게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를 표방했던 것이다. 경제기획원의 계획에서 표방한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개념은 이미 제2공화국의 계획안에서 마련되었던 것이다. 다만 군사정부안에서는 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크게 강조하였다. 기존의 경제정책의 실패 원인을 민간 기업의 자유에 맡기는 자유방임정책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계획이 모두 불균형 성장 전략을 채택하고 있는 점도 동일하다. 다만 국가와 민간 기업의 역할, 산업별 경중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두 계획의 더 큰 차이는 경제성장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있다. 
  민주당안은 경제개발계획의 궁극적 목표를 국민생활의 향상을 통한 복지사회 건설에 두었

 군 사정권에서는 자본회전율이 낮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자본회전율이 높은 제1차산업과 제2차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을 높였다. 이를 통해 단기간 내에 경제성장률을 제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마치 공업화 전략 추진 의도가 더 두드린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군사정권에서는 자본회전율이 낮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자본회전율이 높은 제1차산업과 제2차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을 높였다. 이를 통해 단기간 내에 경제성장률을 제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마치 공업화 전략 추진 의도가 더 두드린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또한 다른 논문을 보여드리죠


   제2공화국의 경제정책,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연구는 9개월의 단명 정권인데다가 경제개발계획의 실체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그동안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 기껏해야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연구하는 데 대한 보조적인 혹은 부차적인 연구나 이승만 정권에서 군사정부로의 경제개발계획으로의 이행에서의 과도기적 성격으로서만 파악되었을 뿐이다.3)

   이들의 연구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차이를 정권의 경제성장 의지의 차이로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은 고도 경제 성장 실천 의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고 낮게 평가되었다. 이러한 근거로는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과 대비되어 경제성장률을 7.1%보다 낮은 5.6%로 설정했다는 점,4) 정부가 주도하여 실시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부족했다는 점, 공업화 추진 전략도 상대적으로 취약했다는 점, 주체적 의지보다는 미국 측의 의도를 많이 반영했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제2공화국의 경제정책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근 연구로 유광호는 민주당 정권에서 작성한 경제정책 관련 자료에 대해 최초로 구체적인 분석을 진행했다. 그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4.19이후 표출된 경제개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고, 이후의 경제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은 완성되지 않았으며, 실천의지가 부족했다고 평가했다.5)

   박진희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 전반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여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한 것 자체는 평가했지만, 실천의지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함으로써 기존의 부정적 평가를 답습하였다. 6)

   김기승은 당시에 나온 자료를 토대로 1961년 5월 건설부시안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이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완성판임을 완곡하게 밝히면서 건설부 시안의 형식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 으로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분석하면서 이 계획이 비록 짧은 통치기간으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으나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점을 들어 높이 평가 하고 있다.7)



 吳緯泳(오위영) 무임소 국무위원은 이 시안을 바탕으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4일 전인 5월12일 오후 4시부터 장면 총리를 방문한 뒤 약 한 시간 반 동안 정부가 1962년부터 시행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협의했다. <조선일보>는 다음날 1면을 통해 ‘민주당 내각─경제 5개년 계획 윤곽 판명/일본의 재산권배상이 아니면 미·영·독 등 차관 依據(의거)/우선 석탄 年産(연산) 2000만 톤 목표’란 제목으로 그 내용을 보도했다. 5월14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민주당 정부의 5개년 경제 계획론은 緣木求魚(연목구어)격’이란 제목으로 비판했다. 정소영의 회고─.
 
  “흔히 혁명정부가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모방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들 계획을 검토는 했지만 이용가치가 없어 새 계획을 짰던 겁니다.”
 
  이 밖에도 이들이 참고한 자료들로는 한국은행의 장기종합 경제개발 계획, 최고회의 기획위원회의 장기개발 계획 등이 있었다. 5월 중순부터 약 2주 동안 세 사람은 골방에 갇혀 기본전략판단을 내리는 데 골몰했다. 우선 균형 성장정책을 취할 것인가, 불균형 성장정책을 취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재원을 산업분야별로 고루 분배하는 균형성장정책은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데는 쉬 합의가 이루어졌다. 정소영은 이렇게 정리했다고 한다.
 
  “거지 옷 꿰매듯 해서는 안 됩니다. 자본회전속도가 빠르고, 작게 투자해서 빨리 이윤을 낼 수 있도록 자본계수가 작은 분야를 먼저 공략해야 합니다. 교육에 투자하면 20년 뒤에나 효과를 봅니다. 농업에 투자하면 종자개량이다, 수리사업이다 해서 최소한 10년은 걸립니다. 공업에 투자하면 공장 짓고 생산하는 데 5년이면 충분합니다. 빨리 富(부)를 늘리려면 1차 산업과 3차 산업에는 좀 미안하지만 2차 산업에 우선 투입하는 방법이 좋을 것 같습니다. 2차 산업에서 부를 늘려 1, 3차 산업에 투입하는 불균형 성장정책으로 결정합시다.”
 
  성장전략이 결정되자 성장률과 투자율을 산정했다. 기준연도인 1961년의 1인당 GNP는 83달러, 국내저축률은 3.9%, 투자율 13.1%, 수출 4087만 8000달러, 수입 3억 1600만 달러라는 참담한 경제규모였다. 민주당의 계획은 연 5%의 성장을 목표로 했으나 이들은 연 7.1%로 책정했다. 사회는 경제개발에의 기대가 팽배해 있었고 박정희 소장이 이들 세 사람에게 심어준 의지와 신념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용 가능한 자금 중 투자자금에 활용되는 비율인 ‘총가용자원에 대한 투자비율’은 21%, 총소득 중 저축을 뺀 ‘소비율’은 79%, 국내 저축률은 7.2% 등 목표수치를 구체화해 갔다. 이 계획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부의 역할을 한층 강조한 부분이었다.
 
  “생산수단을 정부가 장악하고 계획경제를 하던 공산주의와 달리 우리는 정부가 주도하되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살리는 정부주도 형태의 시장 경제체제를 만들어 본 겁니다. 일종의 혼합 경제체제였지요. 2차 산업의 자본형성에 대한 정부의 역할을 비약적으로 높이 책정했습니다. 종전의 비효율적인 투자의 원인을, 투자재원의 배분과 관리를 전적으로 민간인에게 의탁했다는 점과 가격기구의 매개기능을 자유방임 형태로 놓아 둔 것에서 찾았습니다. 시장경제를 제대로 해 낼 수 없는 나라가 무조건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시장경제를 흉내내니 악순환만 계속됐던 겁니다. 우리는 보고서를 통해 이런 민간주도의 경제운영을 비판하면서 국가주도의 경제운영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작업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갈 무렵 서울 商大(상대)에서 강의하던 朴喜範(박희범·뒤에 문교부 차관 역임) 교수도 참여했다. 7월 중순 확정된 안의 공식명칭은 ‘종합경제재건계획(안)’이었다. 네 사람은 7월20일경 최고회의 전체회의에서 보고회를 갖게 됐다. 박정희 의장을 위시해 각 부처 간부급 요원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 정소영 박사가 차트를 넘겨 가며 보고·설명을 했다. 박희범 교수는 경제 용어를 설명했다.
 
  “…불균형성장정책을 통해 우리가 강구해야 할 전술적 목표는 다음 두 가지가 되겠습니다. 첫째, 2차 산업을 제일 먼저 육성하되 수출주도형으로 합니다. 방식은 模倣成長(모방성장) 정책을 통해 고도성장을 목표로 합니다. 세계 시장에서 팔리는 물건을 빨리 모방해 가격을 낮게 책정함으로써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조립방식으로 가는 겁니다. 라디오를 생산하더라도 수백 가지 기초자재를 우리가 다 만들면서 수출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은 많으니 우선 부품을 수입한 뒤 조립해서 수출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처음에는 부가가치가 작게 발생하더라도 고용효과가 크고, 수출량을 늘릴 수 있습니다. 이윤이 축척되면 단계적으로 국산화 비율을 늘리고 그러면 언젠가는 순수 국산 라디오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정소영 박사가 브리핑을 하면서 보니 박정희 의장은 열심히 받아 적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브리핑이 끝나자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때 박 의장이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뒤돌아서면서 박수를 힘차게 치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선도에 따라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졌다. 완성된 ‘최고회의 종합경제재건계획’은 경제기획원으로 이관되어 ‘5개년 종합경제기획안’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수립하는 데 기초가 됐다.
http://www.natizen.com/board/view.asp?C_CC=AZ&C_IDX=38007&cpage=1



월 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의 기록은 ‘무능’과 ‘혼란’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져왔다. 독재정권의 종식으로 말미암아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성취되었으나 민주당 정권은 4월혁명의 주요동인이었던 사회적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한 결과 9개월간의 단명정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태생적 보수성에 기인한 민주당 정권은 개혁추구세력이라기 보다 구정권의 수혜자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기에1) 4월혁명은 지배층의 변경만을 초래하였을 뿐, 그 성격상의 한계로 말미암아 사회경제적 구조개편은 달성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기간 중 준비⋅입안되었거나 실시되었던 경제정책은 1961년 군사정변 후 등장한 각종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여진다. 예를 들자면 군사정변 후 3개월 만에 등장한 경제재건5개년계획(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이미 1960년 자유당 정부하의 復興部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준비된 경제개발계획이 장면정부를 거치면서 다시 손질되고, 그 바탕 위에서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등장한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이 기간에 준비되었거나 실시되었던 경제정책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장면정권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인식하는 데 매우 유익하고, 그 후에 전개되는 압축적 성장을 이룩한 개발연대의 출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2)

   따라서 본 발제에서는 장면정권기의 경제정책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 더불어 이시기의 관료임용, 경찰, 검찰의 숙정작업등에 대해 알아보겠다.


Ⅱ. 본문


  1. 연구사 정리


   제2공화국의 경제정책,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연구는 9개월의 단명 정권인데다가 경제개발계획의 실체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그동안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 기껏해야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연구하는 데 대한 보조적인 혹은 부차적인 연구나 이승만 정권에서 군사정부로의 경제개발계획으로의 이행에서의 과도기적 성격으로서만 파악되었을 뿐이다.3)

   이들의 연구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차이를 정권의 경제성장 의지의 차이로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은 고도 경제 성장 실천 의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고 낮게 평가되었다. 이러한 근거로는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과 대비되어 경제성장률을 7.1%보다 낮은 5.6%로 설정했다는 점,4) 정부가 주도하여 실시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부족했다는 점, 공업화 추진 전략도 상대적으로 취약했다는 점, 주체적 의지보다는 미국 측의 의도를 많이 반영했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제2공화국의 경제정책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근 연구로 유광호는 민주당 정권에서 작성한 경제정책 관련 자료에 대해 최초로 구체적인 분석을 진행했다. 그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4.19이후 표출된 경제개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고, 이후의 경제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은 완성되지 않았으며, 실천의지가 부족했다고 평가했다.5)

   박진희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 전반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여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한 것 자체는 평가했지만, 실천의지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함으로써 기존의 부정적 평가를 답습하였다. 6)

   김기승은 당시에 나온 자료를 토대로 1961년 5월 건설부시안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이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완성판임을 완곡하게 밝히면서 건설부 시안의 형식으로 발표된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 으로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분석하면서 이 계획이 비록 짧은 통치기간으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으나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점을 들어 높이 평가 하고 있다.7)

 

   2. 제2공화국 수립 전후 시기의 경제상황


   1957년으로부터 1960년에 이르는 4개년동안 한국의 국민총생산의 연평균성장률은 5%였다. 그러나 이 4개년동안 연성장률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었는데 1957년 8.6%, 1958년 6.9%, 1959년 5.2%, 1960년 2.3%를 나타내고 있었다.8)

   또 민주당 정부 출범에 즈음하여 예산부족은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 자유당정부가 3.15부정선거를 위하여 국고를 탕진해 버린데다가 세금도 잘 걷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전반적인 생산활동은 다소 위축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예상보다는 나은 상태였다. 당초, 기업인들이 부정축재자처리문제의 귀추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어 생산활동이 부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심각한 노사분규, 전력부족, 자금난 등도 생산활동을 위축시킬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심각한 노사분규를 겪은 업종과 전력사용이 많은 업종은 상당히 침체되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예상과 달리 보합수준을 유지하였다. 9)

     이 시기 가장 심각한 경제, 사회문제로는 실업자 문제를 들 수 있는데 노동행정의 취약으로 실업자의 분포상황이나 직능별 숫자 등은 파악되고 있지 않지만, 정부 측 자료는 실업자가 노동인구의 6.5%에 달하는 60만명 정도로 추정하였으나10) 유솜(USOM·미국대외원조처)30%를 넘는 3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였으며11), 합동연감은 노동인구의 최소한 15% 이상이 실업자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하였다.12) 이러한 많은 실업자의 존재는 임금저하에도 영향을 미쳐, 대구지역의 경우 평균 15,000~20,000환 수준이었으며, 부두하역은 그보다 낮은 12,000환~15,000환, 광업은 35,000환 정도, 그리고 제조업은 23,000환 내외의 정도로서, 전반적으로 최저생계비 이하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장면 정부 또한 실업자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13)

   농촌경제는 빈곤성이 지난 몇 년에 비해 상당히 개선되기는 하였지만 전농업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70만명의 농민이 秋收前期의 絶糧으로 인한 飢餓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14) 1960년 당시 벼 1석당 생산비는 2만6천환이었는데 현지 쌀값은 2만 2천환 남짓이었는데 이 같은 저곡가, 고생산비에 적자운영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부채는 누적되어갔다.15)이 로 인해 농촌이 당면하고 있는 곤란한 문제의 또 다른 하나는 年利100%를 넘는 고리채의 蔓延이었다. 총인구의 65%이상을 점하는 농업인구는 빈곤의 악순환과 低位의 생산성에서 영구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정부의 시급한 대책이 각별히 요청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16)

   또 1957년~1959년에 연평균 3억4천8백만불에 달하는 대규모의 무역적자는 경제구조의 취약성을 단적으로 보여주었고 이와 같은 거액의 수입초과는 주로 미국의 원조에 의하여 메꾸어져 왔다. 그러나 1957년 이후 미국은 개발차관기금(Development Loan Fund)을 설치하면서 제3세계에 대한 원조를 급속하게 줄이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단일국가로 가장 많은 양을 받고 있었던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1957년 3억8920 달러를 정점으로 58년 3억 2120만달러, 1959년 2억2220만 달러,1960년 2억4510만달러, 1961년 19910만달러로 감소하였다.17)

   덧붙여 인플레이션의 잠재적인 위협은 경제개발의 전제조건인 자본축적을 크게 阻害해왔는데 1957년에서 1960년이 이르는 4개년동안 도매물가지수는 20%이상 상승하였다. 곡물물가를 제외하면 40% 이상이나 騰貴한 것이다. 인플레이션 상태 하에서는 가격변동이 신투자의 화폐수익을 극도로 減價시키기 때문에 각종상품가격의 불안정성을 야기 시켰다.18)

   60년 상황만 놓고 본다면 물가는 60년 9월말 전국도매 물가지수는 10.4%의 증가율을 보였으며, 11월 말에는 5.6%의 증가율을 보였다. 곡물 물가지수는 1959년말을 기준으로 1960년 3월말 22.3%, 9월말 47.5%, 11월말에는 26.1%로 증가했다. 반면 곡물을 제외한 물가는 1959년 말을 기준으로 1960년 3월말에는 0.3%, 9월말에는 1.6%, 11월말에는 0.9%가 상승하였다. 따라서 1960년 중 물가상승은 곡가앙등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곡가앙등은 곡물을 담보로 융자를 얻기 위하여 담보곡물이 증가함에 따라 시장출하량이 감소하였기 때문이며, 사회상황이 불안정한데 따른 심리적 요인도 작용한 것이었다.19)

   따라서 4․19 직후 경제문제는 지속적으로 물가상승을 억제하고 실업자 감소를 위한 대책마련이었다. 또한 그동안 대한원조의 비효율적 운영문제를 해결하고, 원조액 감소에 따른 여파를 최소화시키기 위해선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경제개발정책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점들은 국민들의 요구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당시 국민들은 실업자구제, 물가안정, 농산물가격안정, 그리고 농어촌고리채안정 등 경제문제의 해결을 새로 수립될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요구하고 있었다.20)


   3. 제2공화국의 경제정책

 

     (1)환율인상과 공공요금인상


   장면 정부는 1960년 10월 김영선을 대표로 하는 한미경제협상단을 미국에 파견하였고 이를 통해 미국과의 공조관계를 더욱더 공고히 하여 경제개발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김영선 재무부장관은 딜론 미국무부차관이 장면국무총리에게 보내는 각서를 가지고 10월 31일 1주일간의 체류일정을 마치고 귀국하였는데, ‘딜 론각서(Dillon Package)'에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원조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환율의 조정, 원조과정 정상화, 공공요금 인상, 원조의 효율적 사용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장면정부는 미국의 요구사항을 수용하고자 하였으며, 물가상승의 위험성과 관련된 경고가 제기되었음에도 환율 개정, 공공요금 인상 등을 실시하게 된다.21)

   우선 장면 정부는 1961년 1월 1일자로 종전의 650:1의 환율을 1,000:1로 인상하였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환율체계는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당시의 환율체계는  650:1의 圜弗貨공정환율이 적용되는 부문과 입찰방식이나 개인간 매매방식으로 형성되는 자유환율이 적용되는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공정환율과 대충자금환율은 韓美간의 합의에 의해 수시로 변경될 수 있는 반면, 그 외 환율은 대통령 또는 재무부장관의 특별조치 등으로 변동되었다.22)

   따라서 정부는 달러원조를 배정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었고, 원조물자 배분과정에서 특혜를 둘러싼 정경유착이 가능했다.23)

   장면 정부는 환율인상조치를 발표하면서 비현실적인 환율의 차액으로 이승만정권의 특권과 부패가 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환율현실화가 이루어져야 이러한 부패고리가 청산된다고 공언하였다. 즉, 환율인상이 경제요인의 정상화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금리, 환율, 각종 관영요금, 국유재산 불하가격 등의 정상화 또는 현실화라는 조치가 단시일 내에 완료되어야 미국으로부터 추가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24)

   그러나 이미 환율인상조치가 실시되기 전부터 대책 없이 환율 변경이 실시될 경우 제기될 문제점이 거론되고 있었다. 첫째, 주한유엔군의 원화 매입 및 전기․수도사용료 수입이 연간 약2천 5백만불이 감소하고 수출증가나 관광수입증가 등이 이를 만회하지 못하여 더욱 심한 국제수지의 악화를 가져올 것이다. 둘째, 원면, 비료, 유류 등 각종 수입물가격의 앙등으로 물가체계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와 이것이 심리적 영향과 함께 인플레를 재발시킬 것이다. 셋째 시설비용을 올려 투자의욕을 감퇴시키고 이미 DLF차관을 얻어서 시설중인 큰 기업이 곤란을 당할 것이라는 점 등이다.25) 당시 한국의 경제는 원조규모의 감소에 따라 대충자금에 의한 세입확보에 곤란을 겪게 되고, 부족한 외환을 메꾸기 위해서는 수출확대가 필요한 실정이었다. 민주당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환율인상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환율인상에 따른 평가절하로 수출확대를 꾀하는 것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원료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구조에서 환율인상은 수출확대보다 원자재의 가격등귀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수출품의 대부분이 가격탄력성이 낮은 농산물, 광물 등이었기 때문에 수출확대 효과도 크게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환율인상은 민주당정부의 주장처럼 수출확대 효과보다는 국내 물가상승만을 초래 할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정부는 환율인상에 따른 급격한 물가등귀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환율인상 조치 직후 쌀값이 크게 폭등함으로써 일반의 우려를 증명하였다.26)

또 정부의 1961년도 예산편성안에는 이러한 환율인상을 전제로 재정규모가 전년도에 비해 825억환이 증가된 5,067억환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환율인상조치의 결과 대충자금수입이 전년에 비해 약 1,111억환이 증가된 2,444억환으로 늘어난데 따른 것이었다. 재정규모의 증가는 대부분 外援물자에 대한 환율개정으로 인한 것으로, 이것은 외원의존도를 더욱 높이고 국민경제발전에 미치는 불안과 위축 등 그 영향이 크다는 비판을 면치못하였다. 또한 미국의 잉여농산물의 도입은 국내 농산물가격을 억제하고 농가소득의 감소와 농업생산의 저하를 불가피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外援획득에 있어 계속적인 잉여농산물 增援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고 비판받았다.27) 또한 圜貨의 평가절하로 수입품가격이 폭등하였고, 1960년 12월까지도 안정세를 유지했던 물가는 환율변경 후 첫 2개월동안 15%나 뛰어올랐다. 반면 공업생산도는 1개월동안에 24%가 떨어졌다.28) 이어 장면정부는 환율인상에 대한 비판여론과 인상조치에 따른 물가앙등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2월 2일 1,000:1의 환율을 1,300:1로 인상하였다. 이  또한 미국측의 요구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1,000:1 환율인상이 시행된 직후 환율 재책정을 목적으로 미국경제담당차관보대리가 내한하였다. 이때 미대통령 특별기금 약 2천5백만불과 국토개발자금 1천만불을 원조하는 대신 환율을 1,200:1 내지 1,300:1로 재인상할 것이 논의되었다.29) 이미 미국은 민주당정부가 5천만불의 추가원조를 요청하였을 때 그 조건으로 이정도의 환율인상과 관영요금인상을 요구한 바 있었다.30)

관 영요금의 인상은 그동안 국영기업체들이 불합리한 운영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있었고, 이를 재정자금으로 보충함으로써 인플레의 한 요인이 되어왔기 때문에 이를 시정하기 위한 조치로 설명되었다. 유솜은 가정등 요금 85% 인상이 국회에서 부결되어 전업회사의 운영합리화가 어렵게 되고, 전업 3사였던 電業, 京電, 南電이 352억 2천만환의 부채를 지고 있다는 이유로 ICA자금에 의한 송배전 시설자재 구매를 당분간 보류시킨 바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사회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곧이어 전기요금을 49.9% 인상할 방침임을 천명하였다. 또한 교통부는 3월 3일부터 서울시내 버스요금을 1區에 50환, 2區에 70환, 지방버스는 1킬로미터당 8환에서 11환으로 인상한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31) 그 결과 1961년에 들어서면서 이승만정부의 정책만도 못하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킨 환율인상과 관영요금의 인상으로 물가는 급등하기 시작하였다.32)

    즉, 장면 정부는 이승만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거부해 왔던 환율인상문제에서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고 또한 미국의 요구에 의해 관영요금의 인상을 단행하였고 더 많은 원조를 받아내기 위해 원조자금 지출에 관한 미국의 감독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총예산 중 원조자금의 비중을 52%로 만들어 경제의 예속화를 부채질 한 것이다.


Ⅲ. 결론


장 면정부는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경제의 대내외적인 상황인 원조의 삭감, 국민경제 성장률의 지속적인 감소 등 국내외적인 경제적 환경 등에 의해 한국경제를 계획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무르익었다고 인식해 제1공화국 시기부터 제기되었던 한국경제의 장기개발계획, 국토개발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리하여 비록 9개월간의 짧은 통치기간 이었고, 당시 정치적 상황 등으로 정책추진력은 미약했으나 군사정부 출현 이전의 한국사회의 경제적 문제점과 욕구를 수렴하여 향후 군사정부의 경제개발 신화의 일단을 제공하였고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일조하였다.

그 러나 한국경제의 장기개발계획 이전에 장면정부가 취한 환율인상, 공공요금 인상조치 등은 비록 정책 의도의 타당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여타 물가상승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실업자 구제와 사회간접자본의 개발을 위한 국토건설사업도 분파간의 갈등,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예산배정, 시공업체의 선정과 공사지 선택과정에서의 이권개입 등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또한 장면정부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착에 필요한 사회경제적 기초와 관료, 검찰 등의 조직적 기반 등 체제운영 능력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 앙정부의 인사정책이 정실과 엽관 등으로 원칙 없이 행하여지자 공무원들의 불안과 동요는 커져갔고 보다 확실한 신분보장을 위해 정치적 배경을 추구하게 됨으로써 혼란과 동요는 더욱 심해졌다. 더욱이 민주당 실업당원의 처리를 위해 공무원 문호를 개방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자 그동안의 처우에 불만이 있던 공무원과 경찰의 불안과 동요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국가공무원법의 개정을 단행하였으나 이 또한 5⋅16 쿠데타로 인하여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군사정부로 그 역할을 넘기게 된 것이다.

결 국 장면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좌절되면서 개혁을 요구하던 세력들은 점차 반체제세력으로 변하여 갔고 그들의 이 같은 욕구와 장면정부에의 불만은 ‘2⋅8경제협정반대투쟁’, ‘2대악법반대투쟁’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장면정부는 이렇게 국민적 지지기반과 사회통제능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이는 군부의 정치개입의 명분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제2공화국은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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