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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쓴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다"
게시물ID : humorbest_436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
추천 : 29
조회수 : 2865회
댓글수 : 2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4/06/08 13:47:55
원본글 작성시간 : 2004/06/08 11:09:43
원 출처는 어떤 일본인 사이트라고 하네요.
당연히 일본어로 써있겠지만.. 번역해주신 분이 있어서 네이버의 낭인풍운록에서 퍼왔습니다.
의미가 변하지 않는 선에서 매끄럽게 수정해봤습니다.( 안된부분도 있죠^^ )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지만 관심있는 분은 꼭 보세요. 저는 몰랐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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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조선이 중국(명,청)과의 관계가 책봉(작법)이라고 기술되었던 것이 그 원인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원인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시대( 한국, 북한는 「일제 시대」라고 부른다 )에 이것을 근대의 식민지와 같은 의미로 「곡해」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속국」이라고 하는 단어를 통해 "조선은 원래 「속국」이었으니까 일본이 지배해도 상관없는 것은 아닐까" 라고 하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책봉은 종속의 표시라기 보다 오히려 독립국인 증거이다. 중국의 주변 여러나라의 군주들은 의도적으로 중국에게 책봉 의뢰를 하였다. 중국 황제로부터의 책서를 통해 국왕에 봉해지는 것으로써 자신의 왕위에 권위를 부여하고 확고한 것으로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황제에게 보내는 의뢰서에는 군신관계의 기본 형태를 잡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나타낸다」라고 쓰는데 대해 황제로부터의 허가서에는 「~왕에게 설득한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체간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국왕은 별로 황제 힘으로 왕위에 오른 것도 아니고 , 자신 힘으로 얻은 왕위를 인정 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외교에 대해서만큼은 중국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지만(지금의 일본도 같다) , 그렇다고 내정에 대해 하나 하나 지시나 간섭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조공」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방물을 주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중국 황제로부터의 답례인 회결실(반결실) 쪽이 양이 많았다. 청이 3년에 한 번의 조공을 요구한 것에 대해 조선측이 일년에 세번의 조공을 신청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책봉 관계란 일종의 불평등 조약의 체결이지만 실제적인 손해는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책봉 관계를 통한 효과는 1)쌍방에 있어 평화가 유지되는 것. 2)조공국측은 국내적으로 권위를 높일 수 있는 것  3)중국 측은 자존심을 채워 세계의 왕자인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조공국이 독립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어서 이것을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식민지라고 생각할 수 없다. 

 중국과 국경을 접한 여러나라는 옛부터 책봉이라고 하는 형태로 내정과 외교를 안정시켜 왔다. 확실히 일석이조이다. 그러나 바다에서 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일본에게 만큼은 필요한 때만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방자함이 용인되고 있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삼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일본국왕사」를 중국에 보낸 것은 무역에 의한 이익을 요구한 것이다. 국서에는 「日本王臣源表스」라고 기록되고 있었지만 요시미츠에게 스스로 왕이 되고 싶다고 하는 야심이 있었고 그러했기에 중국 황제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도 생각된다.

「천황」이라고 하는 호칭도 동아시아의 전통상 私칭이지만 그 칭호로 의해 누가 뭐라 할것도 없었다. 중국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좋은 바다의 저 편의 나라이니까. 쇼오토쿠타이시(성덕태자)가 "「해뜨는곳의 천자」가 「해지는곳(중국)의 천자」에게"라고 국서를 보내 수의 양제를 격노시켰다고 하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만일 이러한 국서를 보내면 중국 황제가 격노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폐하」라고 하는 요청도 본래는 중국 황제에 한정되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그린 한국의 드라마를 위성방송으로 본 적이 있지만 조선 국왕은 신하들로부터 「전하」라고 불리고 있었다.

 일본의 에도시대, 유일한 국교가 있는 나라는 조선이었다. 임진왜란의 기억이 생생한 조선측은 일본의 사절을 동래(지금의 부산)로부터 더 내륙으로 들어가는걸 막았지만 조선 통신사는  호화로운 행렬을 지어 에도까지 왔다. 쓰시마번(대조선 무역기지)을 통한 무역도 번창해 나가사키에서의 무역량을 넘어서는 해도 많았다. 참고로 나가사키에서의 무역의 대부분은 중국과의 무역이며 네델란드 무역의 비중은 보통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낮다. 조선과의 국교는 「교린」으로서 행해졌다. 막부가 중국에 조공 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동격의 나라 끼리의 교제로서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어 막부도 그 형식을 지키는 것에 신경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메이지 유신에 의해 바뀌기 시작했다. 신정권이 조선에 보낸 외교 문서가 완전하게 무시되어 정한론(한국정벌론)은 이 「무례」를 허락하지 말아라 라고 하는 것을 대의명분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례」한 쪽은 일본 쪽이다. 문서는 에도시대의 관례에 따라 일본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동래부사에 도착되었지만 , 내용은 「막부는 멸망하고 유신 정부가 생겼다. 따라서 양국의 수호와 통상을 재개하고 싶다. 그뜻을 중앙정부에게 전해라」라고 하는 명령 어조의 것이었다. 그것보다 조선측을 더 격노시킨 것은 신정권의 성격을 설명한 부분의 「황조 연면 , 황상등극 , 봉칙 친재만기」라고 하는 표현이었다. 「皇황」이나 「칙」은  중국 황제 밖에 사용하지 않는 글자이며 중국을 대신해 일본에게 조공해!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해 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씨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명의 책봉을 받을 즈음해 나라의 이름을 「화녕」이라고 할까 「조선」이라고 하는가 하는 질문을 보냈다. 명은 옛부터 중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조선」을 선택했다. 「화녕」은 이성계의 출신지이지만 이것은 일종의 대항마(쿠데타에 대한 인정을 받기 위한 술책)이며 「조선」이라고 하는 국호는 이성계라고 해도 예정대로 쓸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국호는1392년부터 500여년에 걸쳐 사용되게 되었다. 국호가 「대한제국」이라고 바뀐 것은1897년의 일이다. 여기서 「제국」이라고 하는 호칭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일단 중국과 대등한 것을 선언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은 이 시점에서 조선은 벌써 일본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고 있었다. 「제국」이라고 하는 국호의 채용에는 조선을 중국에서 갈라 놓으려고한 일본의 의사가 움직이고 있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조선 통치를 담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아직 어린 한국 황태자를 일본에 데리고 돌아가 일본의 교육을 받게 했다. 그리고 1910년  「대한제국」은 「한일합방」에 의해 명실공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반도는 다시 「조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후의 경과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만 원고가 허락치 않는다. 일본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한국의 신문은 최근까지 쭉 일본의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기까지 읽어본 분에게는 곧바로 이해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일본의 조선의 역사에 대한 기술은 최근까지 식민지 통치 시대의 생각을 질질 끌고 왔었다. 조선의 역사는 항상 외국에 지배되는 한심한 것같은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허심탄회하게 생각해 보면 대륙으로부터 조금 뚫고 나온 작은 반도가 오늘도 독립하고 있는데는 오히려 놀랄만한 일인 것이다. 현재 漢民族(중국)의 인구는 방대하지만 그 중에는 漢民族에게 동화된 다양한 異民族의 후예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수양제의 대군을 격퇴한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 , 거란군을 물리친 고려의 강감찬 , 그리고 히데요시의 수군을 괴멸시킨 이순신등의 구국의 영웅의 이름은 오늘의 남북조선에서는 상식이다. 이 중 이순신의 이름만은 일본의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며 다른 두 명은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수험 공부를 하고 있었을 무렵의 교과서나 참고서의 연표에는 일청 , 러일 전쟁은 고딕체로 기록된 것에 반해 「한일합방」은 보통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 이 표기는 일본과 한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병합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 병합”이라고 기록되는 것이 보통 ).  게다가 1919년 5월 4일에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이 고딕체로 기록되고 있는데 반해 같은 해의 3월 1일에 조선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은 단지 「만세 사건」이라고 기록되어 보통 문자로 쓰여져 있었다. 일부에는 지금도 이런식으로 적은 참고서를 보기 시작하지만 실로 이상하다. 일청 , 러일 전쟁이 원인이 조선 쟁탈전에서 비롯된 것은 벌써 당시 부터 널리 인식되고 있었다. 후란스릐비고(1860-1927)에 의한 풍자화도 그것을 나타내고 있다. 나막신을 신은 일본의 무사가 중국인과 싸워 낚아 올리려 하고 있는 물고기에는”Corée(조선)"라고 쓰여져 있고 저 편에서는 러시아가 형세를 살피고 있다. 「5.4운동」은 중국의 독립운동가 자신이 말하는 대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며 그 역은 아니다. 5월이 3월부터 먼저 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니까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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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읽기 쉽게 바꿔봤지만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제법 많네요. 죄송합니다.

혹시 귀차니즘에 빠지신 몇몇 분들을 위해 단락별 요약을 하자면

1. 과거 조선과 중국의 책봉관계는 종속이 아닌 오히려 독립국이었음을 반증한다.

2. 일본에게 있어 중국은 지형과 거리상의 이유로 외교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적었으며 무역의 이득을 취할 시에는 책봉관계를 맺었다.

3. 중국의 주변 국가는 폐하의 호칭 및 황이나 칙등을 사용할 수 없었으나 일본은 2의 이유로 스스로 천황이라 사칭할 수 있었다.

4. 한때 조선이 대한제국의 명칭을 취한바 있으나 이것은 일본의 식민지화 전략상의 술책일 가능성이 높다.

5. 과거 조선은 중국과 전쟁도 불사했던 역사가 있으며 나라를 지켜왔던 유명한 장군들이 있다. 그리고 현재 남북한은 이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인식한다.

6. 일본내의 조선사 기록은 아직까지도 편파적이다. 사건의 대소와 선후를 무시하는 기록을 행하고 있다.


이 정도로 정리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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