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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치과를 처음 간 이야기
게시물ID : humorstory_4364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성성2
추천 : 27
조회수 : 2970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5/05/18 10:16:27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은 문을 열면 넓은 넓은 고추밭이 보였고, 사람의 소리보다 닭의 소리가 더 우렁차게 울리는 시골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3형제를 대관령 목장에서 풀뜯는 젖소만큼이나 철저하게 모든면에서 방목을 하셨는데, 부모님께서는 공부는 될 놈은 되고 안될 놈은 돈을 쳐 박아도 안된다는 자녀 육성관이 있으셔서 그런지 그리 공부를 강요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농사는 될 놈, 안될 놈이 따로 없고 일하는 놈, 농땡이 치는 놈만 있다고 생각하셔서 농땡이치는 놈은 되지말라 하시며 마치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이집트 노예처럼 호되게 농사일을 시키셨다. 덕분에 나는 연필보다 호미를 먼저 쥐었고, 남들이 한글을 읽는다고 칭찬들을 나이에 모판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농업 신동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 형제에게 별도로 간식 또는 영양보충을 챙겨주시지 않으셔서 우리 형제는 자급자족으로 비타민을 보충하기 위해 무와 배추 그리고 가끔 고추를 고라니를 라이벌 삼아 갉아 먹었고, 단백질을 위해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기르시던 닭을 잡아먹고 아버지에게 닭잡아먹고 걸려 혼난 날이면 집에서 쫓겨나면 개구리를 잡아먹으며 건강을 챙기곤 했다.
 
그렇게 길거리의 돌도 씹어먹어도 멀쩡하던 나의 치아가 아프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어머니께 이가 아프다고 말씀 드렸을 떄 어머니는
니가 하도 길거리에 있는 아무거나 줏어먹고 다닌다면서 이제 이가 빠지고 새 이가 나오려고 아픈거라면서 무시하셨다.
하지만 나는 몇 일을 이가 아프다고 울고 불며 어머니께 떼를 쓰는 막내의 모습을 보이자 그제서야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읍내에 있는 치과를 가게
되었다.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데, 아버지께서 세상 어느것 보다 아끼시던 봉고 트럭에 아버지께서는 운전하시고 어머니와 고귀한 존재인 큰 형은 조수석에 그리고 큰 바보, 작은 바보라 불리던 작은 형과 나는 비료푸대와 함께 뒤에 실렸다. 나는 치과에 대한 온갖 상상에 공포에 벌벌 떨며 있는데, 저 바보는 읍내 가서 짜장면 먹는다고 마냥 좋아서 비료푸대를 껴안고 있었다.
 
읍내에 유일하게 있는 치과의 이름은 '박치과' 하지만 간판의 한쪽이 떨어져서 '박치괴'라고 되어 있었다. 우리 형제는 박치괴에서 차례로 검진을
받았다. 큰 형과 작은 형은 무사 통과 선생님 말씀으로는 자동차 타이어를 씹어먹어도 될 이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멍청한 작은 형은 분명히 타이어를 입으로 뜯어 봤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차례가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선생님이 한 번 보시면 이제 이가 안아플거야라고 하시며 나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 안에는 아주머니 한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할아버지 아니 의사 선생님은 내 이를 보더니 "허허.. 이제 8살인 놈이 나보다 이 상태가 더 안좋네 허허허.." 하시면서 뭔가 새로운 퀘스트를 받은 전사처럼 눈빛이 변하셨다. 그리고 무기 아니 치과 의료도구를 들고 내게 다가오며 "아~~"해봐 하실 떄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꽉 다물었고, 선생님은 비장한 표정과 말투로 간호사 아주머니에게 "그거 가져와"라고 하셨다.
눈을 꽉 감고 이를 악물고 있는 내게 선생님은 "눈 떠봐 아무것도 안하니까.."라고 하셨다. 눈을 뜨자 눈이 뱅뱅 도는 모습의 안경과 콧수염과 코털 그리고 코가 큰 가면을 쓴 선생님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며 "깔깔깔"라고 웃는 순간 할아버지는 다급한 소리로 간호사 아주머니께 외쳤다. "이때야!!" 간호사님은 살짝 벌린 내 입의 양 볼을 잡으시고 어떤 기계를 넣어 강제로 내 입이 계속 벌리고 있게 만드셨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은 가면을 벗은 선생님이 치과 도구를 가지고 미소를 지으면서 나의 이를 향해 돌진하시는 모습이었다.
 
집에 온 뒤 볼을 잡고 울고 있는 나를 안고 계신 어머니와 덤덤하게 담배를 피우셨던 아버지는 나의 증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다.
"얘가 분유먹는 애들 100명중에 1명 꼴로 나오는 증상이라 치료를 당분간 받아야 한데요.."
아버지께서는 "지 형들이 엄마 젖을 다 빨아먹어서 젖이 안나와 분유먹이고 키웠더니만,..... 쯔쯔쯔.."
나는 동네 유명한 참젖이셨던 어머니의 젖을 몽땅 쳐먹은 그 새끼들이 너무 밉고, 내가 분유를 먹을 때 몰래 퍼먹고 있던 그 두 놈의 모습도 떠올라 더 크고 서럽게 울었다.
아버지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된데? 이제 8살인데 틀니하는거야?"
"아니요.. 틀니라뇨. 지금 있는 유치를 미리 다 뽑고 영구이가 나오면 된다는데요.."
"그럼 그동안 얘 밥은 어떻게 먹어? 죽 먹이는거야?"
"아니요. 일단 한 쪽을 다 뽑고, 그 다음에 반대쪽을 다 뽑는다고 하네요."
나는 이제 죽었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먹지 못해 한이 맺혔던 엄마 젖을 잡고 잠이 들었다.
 
그 뒤 거의 1년 동안 나는 치과를 매일 다녔다. 할아버지 선생님은 내가 이를 하나 뽑을 때마다 "이거 뽑으면 엄마가 성성2 장난감 하나 사주신데~"
라고 나를 설득하셨고, 어머니는 "저 노인네가 노망났나..." 하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시곤 하셨다.
결국 이를 하나 뽑을 때마다 장난감을 늘어났고(하지만 망나니같은 작은 형이 다 뺏어갔다. 그리고 그 바보는 자기도 이 뽑을테니까 장난감을 사달라고 어머니께 졸라댔다.)  1년이 지나고 치과를 다시 오게 되지 않는 그 날이 왔을 때 선생님은 내가 제일 좋아했던 야구 게임기를 선물로 주시며 "성성2 이 열심히 닦고 다시는 여기 오지마~" 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 선생님의 윤택한 노후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매년 방문해 생계에 도움을 드리는 착한 어린이가 되었다.
출처 내일...신경치료로 극복하지 못한 나의 소중한 치아를
임플란트 하러 갑니다. 무서워 죽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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