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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 1등' 미현·정은이가 공고로 전학한 까닭
게시물ID : humorbest_436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취급주의
추천 : 73
조회수 : 4908회
댓글수 : 7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4/06/09 01:56:15
원본글 작성시간 : 2004/06/08 22:30:15
'전교 1등' 미현·정은이가 공고로 전학한 까닭
[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
▲ 미현이와 현지가 살고 있는 집의 주방. 냉장고가 작아 김치를 넣을 수가 없다.
ⓒ2004 박상규
기자는 대학 1학년이던 지난 95년 9월 한 달 동안 학보사 기자생활을 했다. 학보사 기자생활을 더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10월초에 학교로부터 받은 제적통지서는 나에게 학보사는 물론이고 학교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 사유는 '미등록 제적'이었다. 당시 내겐 등록금을 낼 돈이 없었다. 헝클어진 마음을 속으로 곱씹으며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전공 책을 챙겨들고 학보사 문을 나서면서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1년 후 등록금을 마련해 다시 학교에 들어갔지만 등록금의 무게는 언제나 나를 괴롭혔다. 이듬해 9월 나는 또 다시 미등록 제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번에 '짤리면' 다시는 학교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또 다시 학교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에 학보사 동기였던 용욱이란 친구가 찾아왔다. 편집장이 된 용욱이는 내게 돈 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부모님한테 네 이야기하고 빌려왔다. 갚는 건 천천히 생각하고 이걸로 먼저 등록금 내라. 너 작년에 학교 제적당하기 전에 도와줬어야 했는데 그땐 미처 생각을 못했다. 함께 학보사 생활 재밌게 할 수 있었는데 이제야 도와줘서 미안하다." 그때 친구 용욱이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쯤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 '가난한 전교1등' 김미현(19·가명)과 박정은(19·가명)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내 그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대학에 가고 싶은 청소년 가장 미현이
▲ 국가 지원금과 결연 후원금이 입금되는 통장
ⓒ2004 박상규
분당에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던 미현양은 작년 3월 구리시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로(이하 공고) 전학을 했다. 청소년가장으로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게 미현이에게 무척 버거웠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받는 '소년소녀가정' 6184명

정부가 지원하고 있는 '소년소녀가정'은 3994세대 6184명이다. 이들은 18세 미만의 아동으로만 구성된 세대이거나 부양능력이 없는 부모와 동거하는 세대를 말한다. 2003년 기준으로 살펴보면 연령대는 12~14세가 1589명, 15~17세가 2712명으로 10대 중반이 가장 많으며 12세 미만도 988명이나 된다. 국가로부터 소년소녀가정으로 지정되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해 최저생계비를 지원받게 된다. 2인으로 구성된 가구의 경우 1인당 부가급여 6만 5천원이 추가된 월 53만 6천원 가량의 현금을 지원 받는다. 그리고 올 1월부터 민간기업으로서는 '삼성'이 가구당 월 20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발생유형은 부모사망이 1681건, 가출행방불명이 1181건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이혼이 638건으로 나타났다. 이런 수치에 대해 강은나 사회복지사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부모들의 가출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고 평가했다. / 박상규 기자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와 계모는 미현이와 동생 김현지(17·가명)를 놔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고등학교 1학년인 동생 현지와 사글세방에서 자취를 시작한 지가 벌써 4년째. 처음엔 너무 힘들어 혼자서 질리도록 울며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이젠 세상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미현이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나 동생 이야기할 때 떨리는 목소리와 붉어지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이제 다 컸잖아요. 가끔 외롭기는 하지만 못 견디도록 힘든 건 없어요. 사춘기에 있는 동생이 걱정이에요. 표현은 하지 않지만 많이 힘들 거예요. 저도 동생 나이 땐 많이 힘들었거든요." 고등학교 3학년인 미현이는 전교 1등을 하는 우등생이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자신처럼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사회복지사가 되는 게 꿈이다. 청소년가장이 되기 전에는 사진작가가 꿈이었지만 힘겨운 과정을 겪고 나서 바꾸었다. "지금까지 사회복지사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저도 누군가에게 되돌려주고 싶어요." 그 사랑을 실천하기 싶은 미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에는 꼭 들어가고 싶어 한다. 현재 학교장 추천으로 대학 수시모집에 응시하고 있지만, 미현이의 걱정은 합격 불합격이 아니다. 대학에 합격한다 해도 수백만원에 이르는 입학금이 청소년가장인 미현이에게는 없다. 국가에서 최저생계비로 지원되는 53만원이 조금 넘는 돈과 삼성이 지난 1월부터 청소년가장에게 후원해주는 20만원, 그리고 결연 후원자가 도와주는 약간의 돈으로 대학 입학금을 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정부와 한국복지재단은 미현이 같은 청소년가장에 대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8세까지만 지원한다. 그 후부터는 스스로 자립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일견 타당해 보이는 이 방침이 청소년가장들의 대학진학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현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입학금을 모으는 건 너무 힘들다"고 말한다. 미현이는 "입학금까지만 도움을 받는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든 다닐 수 있다"며 현재의 절박한 심정을 설명하기도 했다.
전교1등 정은이가 공고로 전학한 이유
정은이가 대학 진학할 방법은 없을까?

서울 송파구에 사는 박정은양은 법이 정한 청소년가장이 아니라는 점만 다를 뿐 모든 점이 미현이와 유사하다. 가난 때문에 인문계를 다니다가 공고로 학교를 옮겼고, 현재 전교 1등을 차지하는 우등생이지만 대학 등록금 때문에 고민이 많은 것까지 똑같다. 정은이네 가정은 4년 전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아버지는 3년 전부터 앓아온 신장질환으로 일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어머니가 한 달에 열흘 정도 파출부로 일을 해 벌어오는 50~60만원이 정은이네의 한 달 총 수입이다. 정은이네가 떠안고 있는 부채의 이자에도 미치지 못하는 적은 금액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은이는 등록금을 제대로 내지 못했고 급식비도 납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도 정은이는 밝고 자신 있는 모습으로 살고 있다. 항상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정은이에게도 대학 입학금마련은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기 버거운 짐이다. '가난한 전교 1등' 정은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는 없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정은이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는 걸까? / 박상규 기자

청소년 가장은 대학에 가지 말라고?
지난 6월 5일과 6일에 만난 미현이와 정은이는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아픔과 고민을 몇 시간 동안 보고 들을 수는 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도 노력할테니 좀더 기다려보자"라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들에겐 뻔한 이야기가 아닌 '최선의 답'이 필요하다. 한국복지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2003년 고3 청소년가장 683명 중 23명만이 대학에 들어갔다. 3.4% 밖에 되지 않는 낮은 수치다. 이들 23명 중에는 지방자치 단체의 지원과 결연 후원을 받은 학생들이 포함되어 있다. 재학 기간 내내는 아니더라도 입학금만 지원된다면 청소년가장의 대학 진학률은 높아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한국복지재단 조현웅 결연사업팀장은 "대학을 가고 싶어도 못가는 청소년가장을 보면 많이 안타깝다"며 "국가적 차원이든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이든 입학금까지는 지원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 팀장은 "현재로서는 시급하게 민간의 지원이 필요한 상태"라고 밝혔다.
지금 미현이와 정은이에게는 또 다른 '용욱'이가 필요하다. 8년 전의 나처럼 말이다.

/박상규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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