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훌륭한 서울시민이 되겠노라는 포부를 안고 서울에 올라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약 19년동안 살아왔다.
옥탑 단칸방에서 시작해 현재 사는 집까지, 사는 곳이 업그레이드될 때마다 내 호칭은 학생에서 총각으로 그리고 지금은 아저씨로 변했다.
서울에 오기 전 서울사람들은 '정이 없다', '깍쟁이들이다.' 등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가 사는 곳의 어르신들과 동네 분들은 시골에서 상경한 나를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네 아이처럼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옥탑방 주인 할머니는 "시골에서 얼마나 못 먹고 자랐으면...애가 저렇게 마르고 깜둥이여... 쯔쯔쯔" 하시며 옥상에 있는 고추장, 된장을 마음껏
퍼먹으라고 하셨고, 가끔 외식을 즐기던 중국집의 사장님은 짜장면을 혼자 시켜먹을 때마다 "시골에서는 이런 거 많이 못 먹어봤지." 하며 맛이나 보라고 깐풍기나 팔보채 같은 고급 중국요리를 조금씩 같이 내주시고는 하셨으며, 서울에서 첫 나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신 복덕방 사장님은 결혼 후 신혼집을 구할 때 마치 자기 아들이 장가가는 것처럼 발 벗고 나서서 "여기가 아기 만들기는 좋을 거야. 여기서 예쁜 아기도 낳고 돈 많이 벌어서 넓고 좋은 데로 이사가" 하시며 저렴하지만 둘이 살기 딱 좋은 신혼집을 구해주셨다. 물론 지금 사는 집도 그 사장님이 구해주신 집이다.
혼자 피시방에 가서 스타크래프트를 할 때 내가 외로워 보였는지 함께 팀플을 해주던 애송이 중학생이 나보다 더 빨리 애아버지가 되었을 때와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었던 꿈을 가진 가난한 문학청년 시절 책을 마음껏 읽어도 뭐라고 하지 않던 작은 동네서점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핸드폰 대리점이 생겼을 때 시간이 빠르게 지나고, 나도 이 동네도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에서 추억이 많은데, 동네 아저씨들과 함께 연합해 도둑을 잡은 적도 (그런데 잡고 나서 보니 고등학생 좀도둑...), "자네 목소리가 좋으니 전국노래자랑에 나가보지 않겠는가?" 하는 슈퍼마켓 아저씨의 권유로 과감히 출전한 전국노래자랑에서 송해 아저씨를 보지도 못한 채 지역 예선 광탈한 적도, 그리고 자취방에서 혼자 외롭게 고추장을 퍼먹고 있는 모습을 안쓰럽게 여긴 할머니가 바람이나 쐬러 가자며 나를 끌고 부녀회 효도관광에 데려간 적도 있었다. 물론 그날이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여성에게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유일한 날이 아닌가 싶다.
어제는 퇴근하고 집에 가는데, 23년 전통을 자랑하는 치킨집 사장님과 철물점 사장님 두 분이 지나가는 내게 "어이 자네도 와서 한잔 하고 가" 하시며 치맥을 권하셨다. 공짜 술을 마다할 이유가 없어 아저씨들과 동석을 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 중 철물점 사장님께서 "자네도 주말에 우리랑 축구나 하지그래" 하시며 조기 축구회 가입을 권유하셨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깐깐한 가입조건을 갖춘 조기 축구회에 내가 입성하다니 나도 이제 지역 유지가 되는가 싶어 뿌듯한 마음이 생겼다. 조기 축구회 가입 조건은 1. 서 있을 때 배 때문에 무릎이 보이지 않는 아저씨 몸매 2. 월회비 3만 원 성실 납부 3. 발보다 입이 빠르며, 축구 실력보다 배치기에 강한 자 마지막으로 낮술에 강한 자이다. 나도 이제 인터밀란 유니폼에 FC면목 이라고 써진 유니폼을 입을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렌다. 입단식은 베일이 레알 마드리드 입성할 때처럼 성대하게 해달라고 해야지.
이제는 내가 먼저 인사를 하는 어르신들보다 내게 인사를 먼저 하는 새로운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처음 내가 서울 왔을 때 어리바리한 촌놈을
도와주셨던 고마웠던 분들을 생각하며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먼저 베풀 수 있는 지역 유지 아니 축구단원으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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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문제로 가끔 배틀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정이 있고 사람 냄새 나는 동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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