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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음악학도가 바라본 류재준 난파음악상 수상거부 논란
게시물ID : sisa_4379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ppassionata
추천 : 12
조회수 : 878회
댓글수 : 40개
등록시간 : 2013/09/12 03:45:21

T군의 기묘한블로그에 포스팅된 글입니다.

류재준 난파음악상 수상거부, 친일행위에 둔감한 음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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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계에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제46대 난파음악상 수상자로 선정된 류재준씨가 수상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난파기념사업회는 이에 따라 소프라노 임선혜씨를 수상자로 변경하였습니다. 음악을 전공했기에 난파음악상이 음악인에게 어떠한 권위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저는 류재준씨의 수상 거부에 존경 섞인 박수를 보내며, 한편으로는 이번 논란을 무척이나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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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 일제강점기 당시의 작곡가였던 작곡가 난파 홍영후는 '퐁당퐁당', '고향의 봄', '고향생각'과 같은 수 많은 동요와 더불어 '성불사의 밤', 그리고 일제 치하 민족의 아픔을 표현한 '봉선화'와 같은 가곡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입니다. 1941년에 사망한 '한국의 슈베르트' 홍난파는 광복 후 그에게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고,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된 이후 1968년 그를 기리는 난파음악상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상은 1회 정경화를 시작으로 백건우, 정명훈, 장영주, 조수미, 장한나, 손열음 등 현재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음악가들이 수상하였습니다.  또한 현재 단국대학교의 음악대학 건물은 '난파음악관'이라고 명명되어 있으며, 유족에게서 기증받은 그의 유품 약 420여 점을 전시하는 '난파 홍영후 전시실'을 올해 3월 단국대 장호성 총장과 홍난파의 조카인 홍건유 전 포스코 부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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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고, 서울대 작곡과와 폴란드의 크라코프 음악원을 졸업한 작곡가 류재준은 서울국제음악제와 카잘스페스티벌인코리아의 예술감독, 앙상블 오푸스의 예술감독, 폴란드 고주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작곡가로 활동 중이며, 2007년부터 낙소스와 계약을 맺어 그의 작품이 출반되고 있습니다. 현대음악의 거장인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가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할 만큼 음악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죠.


작곡가 류재준씨가 밝힌 가장 큰 수상거부 이유는 '홍난파의 친일 행적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친일파 음악인의 이름으로 상을 받고 싶지 않고, 이전 수상자 중 일부 이해할 수 없는 분들이 있어서 상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류재준씨. 그는 이에 덧붙여 "음악 선배로서 홍난파의 업적은 인정하지만 친일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행적 자체를 부인하는 듯한 음악상의 요강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수상 거부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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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 홍영후의 또 다른 이름 모리가와 준. 난파 홍영후가 민족음악개량운동에 앞장서며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사람이었다면, 모리가와 준은 친일음악운동에 앞장 선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친일행위가 시작된 것은 1937년 6월부터 있었던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입니다. 당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사회 각계 181명의 지식인들이 검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18명이 전향성명서를 쓰고 변절한 뒤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합니다. 이 속에 바로 현제명과 홍난파가 있었습니다. 1938년 8월 16일 <기독신문>에 실린 변절한 이들의 전향성명서를 하단에 접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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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 후 모리가와 준으로 창씨 개명을 한 홍난파는 음악을 통해 일제와 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 최대의 친일음악단체인 조선음악협회에 가입합니다. 더군다나 23명의 평의원 중 단 7명 뿐이었던 조선인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황국정신을 되새기며', '부인애국의 노래', '애마진군가', '태평양행진곡' 등 일제를 찬양하는 곡과 '희망의 아침', '지나사변과 음악' 등의 글을 썼습니다. 홍난파의 변절에 대해 딸 홍정임 여사의 해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 나던 날, 저의 아빠는 종로경찰서에 갇히셔서 옥고를 치르고 계셨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아빠가 안 계신 저는 姙 (임) 자돌림에다 丁축년에 태어났다고 丁 (정) 자를 붙여서 丁姙(정임)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드나드시면서 아버지께 흰 옷을 넣어드리는 어머니는 번번이 피투성이 되어 나오는 아버지의 옷을 받아들면서 이렇게 애청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은 몸이 약하신데 제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면 안 되느냐고." 일본 경찰은 조롱된 어조로 "당신도 콩밥이 먹고 싶어?" 하며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감옥살이에 시달리신 저의 아버지는 '늑막염' 이라는 무서운 병을 재발 시키면서 72일 만에 석방이 되셨습니다. 석방을 시킨다는 조건부로 "일본에 협조한다는 글과 곡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압력의 쇠사슬에 묶이신 나의 아버지는 최후의 3년을 (석방이후) 병마에 시달리면서 강제에 못 이겨 한 두 차례 일본에 협조하는 글을 쓰셔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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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반문하고 싶은 것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도 모를 수 많은 독립군들과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사랑하는 가족이 없어서 그리 목숨을 바쳤고, 몸이 성해서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며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참고로 홍난파가 변절한 계기인 수양동호회 사건 당시 최윤세·이기윤은 일본의 혹독한 고문에 의해 옥사했고, 김성업은 불구가 되었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난파 홍영후는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한 친일행위자이며, 특히나 음악인이었던 그는 '예술'을 친일의 도구로 사용한 민족의 반역자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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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논란에 대해 난파음악상을 주관하는 경기도음악협회의 오현규 회장은 "선정 소식에 경력 자료를 확인해 주고 프로필 사진을 새로 보내줬던 류씨가 뒤늦게 거부의 뜻을 밝혀 당황스럽다"며 되려 "음악은 정치를 떠나 음악 그 자체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18회 난파음악상 수상자이자 현재 수원시향의 상임지휘를 맡고 있는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역시 "음악인을 장려해 주는 상이 아직 많지 않은 실정에서 난파음악상을 정치 쟁점화하는 것은 예술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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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예술과 예술가는 분리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시대와 예술은 분명 연동관계에 있습니다. 홍난파의 수 많은 작품들이 우리나라 음악계에 길이 남을지라도, 홍난파가 친일행위를 헀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홍난파를 기리는 난파음악상. 홍난파의 반민족행위를 '정치를 떠나 음악 그 자체', '정지 쟁점화' 등 정치적 행위로만 국한시키는 역사적 인식을 지닌 이들이 우리나라 음악계를 지탱하고 있다뇨.


그동안 난파음악상을 수상한 음악인들에게 비난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많은 음악인들이 이 상을 수상했을 당시 홍난파의 친일 전력에 대해 알려진 바도 없었죠. 하지만 그러한 친일 전력을 인지한 뒤 수상을 거부한 류재준씨에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 덕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음악학도로서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또한, 교학사 교과서 논란과 같은 역사 왜곡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이러한 시점에서 난파 홍영후의 변절 행위를 '정치적 행위'라는 수식어로 국한시키는 일부 음악계 인사들에게 유감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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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 가장 커다란 아픔을 겪던 시대를 살아가던 한 예술가. 민족의 아픔을 노래했지만, 오히려 그랬던 그가 변절했습니다. 자신의 동료들의 목숨이 꺼져가는 촛불과 같았던 순간. 어떠한 이유를 붙이더라도 그 행위가 덮어질 수 없습니다. 이유를 붙이며 덮으려 했기에 대한민국에 친일의 뿌리가 뽑히지 않았고, 잡초처럼 살아남아 되려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뒤덮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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