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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핥기 로마사(13)-로마의 삶
게시물ID : history_43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3
조회수 : 3735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2/05/13 22:47:50
로마를 가상으로 복원한 전경. 1. 로마의 도시 공화정이 무르익은 이래 로마문명은 도시생활에 집중되어 있었다. 로마인들은 속주에도 제국의 도시를 새로 건설하거나 기존 도시를 로마화시켰다. 유럽의 수많은 도시가 로마시대에 개척된 것들이다. 로마가 정복했던 전지역에는 로마를 판박이처럼 베낀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다만 속주의 시골은 로마화되지 않은 채 토착민은 토착민 식대로, 도시는 로마식대로 생활했다. 전형적인 로마의 도시설계는 바둑판 모양으로 틀을 짜고, 여러 개의 광장, 극장, 신전, 행정관서, 목욕탕, 원형경기장들이 건축된 것이다. 도시는 요새화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로마의 도시는 발달된 기반시설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물은 수로와 수도관을 통해 도시로 전달된 다음 중앙 저수지에 저장되고, 이것이 상수도로 연결되어 시민들에게 공급되었다. ad 3세기 말에 로마에는 11개의 무료 공중목욕탕과 800개 이상의 사설 목욕탕이 있었다. 2. 원형 경기장 로마 문명의 천박성은 원형경기장에서 자행된 검투경기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원형경기장은 로마문명의 이해를 위해서는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인데, 검투시합은 그리스문명에는 전혀 없던 로마의 독자적인 대중오락이기 때문이다. 이는 유력자들이 자금을 대어 자기의 부와 사회적 권위를 과시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수단이었다. 원형경기장에서의 대중오락은 2륜차 경기와 검투시합이 주를 이루었다. 이것은 피가 난무하는 대단히 잔인한 구경거리였는데, 단지 경기내용에 그치지만 않고 경기장 바깥에서 선수나 후원자들 사이의 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잦았다. 이토록 끔찍한 문화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이 현대적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지 모르지만, 개인적 생각으로는 로마시대보다 아주 조금 진보한 면이 있되 원형경기장에서 교차했던 인간들의 영욕은 현대 프로스포츠와 포르노산업에 여전히 잠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원형경기장의 열광적인 팬덤과 응원문화는 프로스포츠로 순화되고, 말초적 흥미요소는 영화산업과 포르노 산업으로 대체되어 다시 부활했다. 이집트나 아시리아에서 대중들이 어떤 여가를 즐겼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는 이상, 로마의 검투시합은 20세기 영화와 프로스포츠가 탄생하기 전까지 경쟁상대가 없는 최고인기 오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사 스너프+격투기를 즐기는 로마시민들. 실제 죽고 죽이는 현장을 구경하는 로마인들과 실제 정사장면을 구경하는 현대인 사이에 본질적인 진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만하다. 3. 로마의 빈부격차 로마의 물질만능주의는 제국이 건설될 수 있는 동력이기도 했다. 수도 로마시의 빈부 격차는 대단히 심했다. 부자들이 으리으리한 대저택에 수백명의 노예를 거느리며 살았던 반면 빈민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단칸방 아파트에서 공용 배변시설을 이용하며 살았다. 로마의 평민들이 살았던 아파트 '인슐라'. 보통 4층이었고 8층까지도 있었다. 빈민가에 이런 아파트가 간격제한 없이 빼곡이 지어졌고, 하중문제 때문에 고층은 목조로 짓기 일쑤였는데, 이것이 대화재의 주요원인이 되었다. 대화재는 네로 때의 9일간 대화재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심심찮게 있던 일이다. 그에 반해 로마의 대저택은 대충 이런 느낌이다. 짤방은 로마풍 주택을 본따 LA에 지어진 박물관이다. 로마부자들의 저택은 이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4. 노예제도 로마사회의 잔인성을 말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것은 로마의 노예제도이다. 물론 노예제도가 로마에만 존재했던 것도 아니고, 로마의 노예제도가 다른 고대사회보다 가혹했다고 하기도 어렵다. 다른 고대사회가 그렇듯이, 로마 역시 노예제도에 대해 의심을 갖지 않았다. 로마시대의 어느 철학자나 종교를 보더라도 노예제도에 대해 회의를 품는 모습은 발견할 수 없다. 다만 로마의 노예들에 대해서 말할 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대농장의 노예들이 자영농 몰락을 부추겼고 이것이 로마사회의 변화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2세기 후반이 넘어가면서 로마의 정복이 한계에 도달하자 노예의 신규유입도 중단되었고, 이는 생산력 감소로 직결되었다. 엉엉 돌아와요 위필드. 노예들의 반란은 공화정 말기 bc73~71년 간에 있었던 사건이다. 공화정 말기의 정치사를 다루느라 이 사건을 제대로 쓰지 못했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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