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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이야기 _ 사기와 범죄
게시물ID : humorstory_4387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성성2
추천 : 23
조회수 : 2457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5/07/13 11: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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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1편입니다. http://todayhumor.com/?humorbest_1093020

지난주 단호박을 가져가라는 작은형의 전화를 받고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갔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형은 오후 늦게 호박을 따러 가자 했다.
물론 작은형이 걸그룹을 바라보다 잠든 사이 나는 오유에 고향에 내려와 예전 추억을 떠올리며 글을 쓰다 갑자기 "홍동백서"를 외치고 
일어난 작은 형이 호박을 따러 가지는 말에 글을 쓰다 말고 호박을 따러 갔다. 
(형은 꿈에서 퀴즈 대회를 나갔는데 한 문제도 맞추지 못해 망신을 당하고 있는 찰나 '밥은 왼쪽에 국은 동쪽'에 놓으라는 제사 의례가 무엇이냐는 
문제에 '홍동백서'라 외쳤다고 한다. 정답은 반서갱동인데 형이 자신만만하게 "내가 어머니랑 제사를 지내고 있어서 아주 잘 알고 있지" 하는 말에 
그냥 내 머릿속의 홍동백서 개념을 바꾸기로 했다.)
호박을 따러 갈 때 포댓자루 2개와 낫을 들고 나서려는 내게 작은 형은 "막내야 그냥 우리 트럭 몰고 가자" 이 말을 할 때부터 예감이 불길했다.
귀농한 지 7년째 되는 형은 귀농 초반 동네 어르신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심는 농작물마다 항상 대풍을 일으키는 **리의 마이다스의 손 같은 존재였다.
호박죽을 좋아하는 조카를 위해 작은 텃밭에 '조금' 심었다는 애호박은 작은 텃밭을 베트남의 머나먼 정글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게 조금 심은 거냐? 형 이거 해처리 몇 개 한 거야?"
"어.. 몇 개 안심었는데 얘들이 번식력이 강하네... 애호박은 나도 처음 심어봐서..."
작은형의 번식력 강한 애호박은 본진과 앞마당을 넘어 남의 집 본진까지 침범해 세력확장을 하고 있었다. 
"형 이제 다른 농사 좀 지어보지그래.."
항상 새로운 작물 심는데 관심이 많은 형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뭐? 뭐? 뭐 심어 볼까?"
"이런 거 말고 자식농사나 한번 지어봐. 종자도 돈 주고 사는 것도 아닌데. 아.. 심을 밭이 없구나. 씨는 실한 데 밭이 없네, 밭이 없어"
작은형의 낫 방향이 애호박이 아닌 나를 향했다. 그리고 달려오는 형의 모습에서 독설을 내뱉는 히드라를 향해 달려오는 발업 질럿의 모습을 보았다.

내가 살던 고향에서 범죄는 잦지, 아니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풀어놓고 키우던 개가 없어지는 경우 정도가 마을을 발칵 뒤집어 놓는 범죄였다. 어린 시절 동네의 가장 심각한 범죄는 개도둑이었다.
지금은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담이 있는 집도 거의 없었으며,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은 다들 문을 열고 잠들어도
밤손님이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범죄에 청정한 지역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범죄 없는 동네를 만든 공이 독재자 전두환 따위와 비교되지 않는 
자신의 영도력이라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가난한 시골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위험을 무릅쓰고 절도 행각을 할 밤손님은 없었다. 
그런 조용한 시골을 발칵 뒤집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읍내 미용실 아줌마가 계주로 있던 계 모임의 계주 도난사건이었다.
많은 아주머니가 투자한 계에 계주가 도주한 사건은 조용했던 마을은 발칵 뒤집혔다. 
아버지는 "너희 어머니는 서울에서 대학물을 먹은 여자라 계 같은 건 안 해" 라고 장담하셨지만, 며칠 뒤 어머니는 날린 곗돈을 벌어 오겠다며 짧은 
편지와 함께 서울의 외삼촌 댁으로 피신했다. 아버지는 결국 형제 중 가장 처절하고 구슬프게 우는 연기를 가장 잘하는 나를 데리고 서울로 떠나셨고, 그 당시 나는 외삼촌 댁에 놀러 간다고만 생각하고 서울역에 내린 뒤 개구리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홍제동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멀미를 심하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외삼촌 댁에서 아버지께서 엄마 몰래 '울어' 하시며 나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린 뒤 "엄마~~ 엄마~~" 하고 우는 나를 앞에 두고 
과거는 용서할 테니 집으로 오라며 설득하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의 다음 순번에 내가 탈 차례인데 하는 말씀에 며칠간 병이 도져 
누우신 건 아버지였다. 
그리고 동네에 합법적인 사기꾼인 약장수들이 오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아니 완전히 그들의 방문이 없는 듯하다. 
그들은 1~3일 정도 마을에 체류하며 약을 팔았는데, 약 판매와 각종 공연을 하면서 동네잔치를 벌여주고는 했다. 그들은 약을 팔기 전 이장인 
아버지께 와서 허락을 받고 판을 벌였는데, 아버지께서는 "순진한 노인네들한테 비싼 거 사기 쳐서 팔지 말고, 정직하게 판매하고 가시오."라고 
하시곤 했다. 약장수들이 오면 마을 회관 앞에 공연과 막간의 약 판매를 위한 큰 천막이 쳐지고, 주위로 음식도 팔고, 잡다한 일용품을 파는 상인들도
함께 오곤 했다. 
약장수가 오면 가장 기뻐하는 무리는 나와 같은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이 신기했던 우리는 "애들은 가~ 애들은 가~" 멘트를
"엄마 모시고 와~ 할머니 모시고 와~" 이렇게 받아들였고, 어머니와 할머니께 "나도 데려가 줘~~" 하면서 생떼를 부리고는 했다. 
그들이 판매하는 약은 주로 발모제 (박카스 병에 들어있는 정체불명의 액체, 이 액체로 머리를 감으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간 민머리에 머리털이 
수북수북하게 난다고 한다.) 만능 연고 (벌레 물린데, 근육통, 상처가 난 데 심지어 머리가 아플 때 이마에 바르면 두통이 없어진다는 전설적인 연고, 
강력한 라이벌로는 안티푸라민이 있었다), 정력제 (정력에 좋은 장어, 가물치, 뱀 등을 혼합해서 만든 출처 미상의 약인데, 이 약을 설명하는
아저씨는 발딱발딱 하며 관객들에게 주먹 감자를 선보였다. 물론 이 정력제는 아저씨들보다 주로 아주머니들이 많이 구매를 하곤 했다.)
그들이 마을에 올 때면 남녀노소 할 거 없이 마을 회관 앞에 모이는 잔치가 벌어지고는 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막걸리판을 벌일 때 아이들은 
옆에서 노래 한자락 불러 드리고 안주를 얻어먹기도 했고,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동남아에서 막 공연을 마치고 온 서커스단이 시차 적응을 
핑계로 실수 연발의 공연 등을 할 때도 마을 사람들은 함께 웃고 즐기고는 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면 나 같은 어린아이들 뿐만 아니라 
며칠간 광란의 파티를 마친 어른들도 허무함에 빠지고 그들이 빠른 시일 내 다시 오기를 바라고는 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날 마당에서 아버지는 박카스 병에 들어있는 액체로 머리를 감으셨고, 그런 아버지는 보시며 어머니도 정체불명의 박카스 병을 
들고 "**이 아버지! 머리만 후딱 감고 빨리 들어와 보쇼.." 하면서 아버지를 찾으셨다. 그리고 그런 금실좋은 부모님을 보며 우리 형제는 항상 여동생을 
기대했지만 여동생을 볼 수는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우리 세 형제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으셨다 보다. 

고향을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났다. 개도둑이 동네의 가장 큰 중범죄였던 고향은 전화로 중국인들이 보이스피싱이라는 사기전화가 판을 치고, 
한밤중에 트럭을 몰고 와 한 해 동안 피땀흘린 결과물인 농작물이나 가축을 절도하는 도둑놈들도 늘었다. 그리고 읍내의 단란주점과 다방은 
순진한 아저씨들을 유혹해 가사를 탕진시키고, 가정을 파탄시킨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바뀌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내 고향에 들어오지 
않길 바랐던 것들과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착하고 순진한 분들을 힘들게 하는 그런 좋지 않은 사건들을 전해 들을 때 마음이 씁쓸하다. 
출처 점점 간달프 같은 대 마법사가 되어가고 있는 아니 이미 간달프에 필적하는 동정력을 축적한 작은 형과
어머니의 소중한 돈을 가지고 야반도주한 계주 아줌마,
지금은 보기 힘든 마을에 웃음을 주던 약장수들

그리고 옛 추억을 떠올리며 하라는 일은 안 하고 글 쓰고 있는 월급루팡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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