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한 병을 네 명이 나눠 마시고 약관의 나이에 네 명이 요단 강 너머로 단체 관광할뻔한 술을 마시지 못하던 스무 살 때부터
누군가 "아저씨"라고 부르면 조건반사적으로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게 되는 지금까지 우리 친구들은 술자리를 가지면 빠지지 않고
여자 이야기를 한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주제가 많이 바뀌기는 했다.
얼마전 친구놈의 생일을 맞아 오랜만에 스무살때부터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들이 모였다.
이제는 술 마시면 어김없이 나오는 맥주의 동반자 강냉이 같은 와이프와 딸 이야기 하지만 난 와이프는 있지만 얼마전 와이프가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른 탓에 이제는 성숙한 여인이라기보다 평생을 함께한 브라더처럼 느껴지고, 아들밖에 없으므로 그 대화에 끼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식들 집에서 맞고 다니고, 실력 없는 가사 도우미 주제에 권위 있는 가장 인척 하네!' 하면서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참고로 녀석들은 딸바보라고 하지만 내가 아는 녀석들은 그냥 바보 이거나 딸 만 아는 바보들이다.
각자 한 병 정도 술을 마셨을 때, 한 놈이 뜬금없이 우리 첫사랑이나 이야기할까 하면서 자신의 첫사랑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첫사랑은 고등학교 때 교회 누나였다.
나는 속으로 제발 그 누나가 "흰 원피스 입고 피아노 쳤다고만 하지 말아줘" 라고 생각했지만, 녀석은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항상 누나는 긴 생머리에 흰 원피스를 입고, 예배 때 피아노를 쳤지...." 로 시작했다. 아.. 생머리는 예측하지 못했다. 나의 실수다.
하긴 교회 누나가 스포츠머리 또는 아줌마 파마 머리에 흰 원피스를 입고 피아노 연주할 리는 없지....
녀석은 항상 예배 시작 전 누나가 오기를 기다리고, 예배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멀리서 숨어 지켜봤다고 했다.
그 뒤 제발 여름성경학교에서 추억을 조약돌 쌓듯이 쌓았다는 이야기 하지 않기를 생각했지만, 어김없이 녀석은 여름성경학교에서 하라는
성경공부는 하지 않고 누나에게 대학 가면 자신과 사귀어 달라고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누나는 예상대로 "그래 **이 대학 가서 멋진 남자가 되면 우리 다시 만나자." 라고 했다고 한다. 인생의 절반 가까운 시간 녀석을 지켜보면서
술에 취해 "오늘은 내가 쏜다!"라고 말할 때 가장 멋져 보이는 녀석의 입에서 나온 "멋진 남자"라는 단어에서 이 사랑은 백 퍼센트 실패했군!
하는 예상을 했다.
그 뒤 누나는 얼마 되지 않아 이사를 하게 되어 교회를 떠났고, 녀석은 피아노를 볼 때마다 누나를 떠오르게 되었다고 했다.
나와 다른 친구가 "이사간게 아니고 스토커 떨어뜨린 거네..이 상도동 파리지옥 같은 새끼야" , "신성한 예배당을 연애당으로 모독시키지마.
사탄 마구 같은 이교도 자식아." 이러며 친구의 첫사랑을 매도할 때, 다른 한 녀석만이 비어있는 소주잔을 채우며
"그럼 그 누나 그 이후로 못 봤겠네..." 하며 씁쓸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녀석의 첫사랑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내 차례인가. 기말고사를 앞둔 여름날 소나기처럼 격렬하게 다가온 사랑이야.." 녀석은 얼굴에 순수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묻히고 있었다.
평소 활자라고는 카톡 메시지도 제대로 읽지 않는 녀석에게 왠지 황순원 선생님의 순수 문학 소나기가 나올 분위기였다.
"소나기가 내리던 그 날 우산을 들고 수업받으러 가고 있는데, 처음 보는 여학생이 내 우산 안으로 들어왔어. 그녀는 촉촉하게 젖은 머리로
'저기 저쪽까지만 함께 가주실 수 있으세요?' 라고 말했지. 나는 갑자기 달려온 그녀 때문에 놀라긴 했지만, 그녀와 함께 걷는 짧은 거리지만
그녀가 더는 비를 맞지 않게 하려고 내 어깨를 적셨어.... 그리고 난 갈림길에서 그녀에게 '저는 비 맞아도 되요. 하지만 여자가 비 맞으면
처량해 보이거든요. 그리고 그쪽 옷도 얇으신 거 같은데...' 라며 그녀에게 우산을 양보..."
순간 다른 친구 한 녀석이 말했다. "어디서 구라 질이야! 니꺼라면 남한테 귓밥 주는 것도 아까워하는 새끼가 무슨 우산을 건네줘.
그 여자한테 우산을 뺏었으면 뺏었지." 옆에 있던 나도 껴들었다.
"이 자식 자기 첫사랑을 영화 클래식으로 표절했어. 나의 교복 입은 손예진을 너의 더러운 욕정으로 모독하지 마! "
녀석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진짜 줬다니까.. 그리고 나 클래식 안 봤어." 라며 자신의 첫사랑을 계속 이야기했다.
그 뒤 녀석은 그녀에게 나중에 우산을 돌려받을 연락처를 받고, 다시 우산을 돌려받은 날 라면을 얻어먹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녀석은 그녀를 짝사랑하게 되었고, 계속되는 녀석의 구애를 그녀는 거절하다 비 내리는 날 녀석은 그녀를 놓칠 수 없다며
마지막으로 고백하고 그녀의 손을 꼭 잡은 뒤 둘은 사랑의 확인을 비를 맞으며 뜨거운 키스로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나는 "이 연희동 연탄집게 같은 새끼.. 이번에는 노트북 표절했네.." 하면서 두 편의 영화 잘 봤다고 소감을 이야기해줬다.
계속 씁쓸한 표정을 짓던 한 녀석은 다시 한 번 소주잔을 채우며 "그래도 키스는 했구나..." 하면서 또다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의 차례가 왔다.
"야.. 그런데 짝사랑한 것도 첫사랑으로 인정해주냐?"
우리는 "고백했으면 인정해줄게." 라고 했다.
녀석은 소주 한 잔을 들이켜고 여전히 캡슐 알약을 씹은 듯한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난 패스"
약간 당황한 우리는 "그럼 짝사랑 3회 이상이면 첫사랑으로 인정!"
다시 한 번 소주 한 잔을 마시며 "계산해보니까 패스."
안타깝지만 녀석은 아직 결혼, 아니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못한 모태솔로였다.
"우리가 오늘 괜한 이야기 꺼냈네, 너 그냥 대접에다 줄까?"
"안되. 내일 출근 못 해...."
우리는 그날 아련한 첫사랑에 대한 추억과 모태솔로 친구의 첫사랑을 기원하며 그렇게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