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나의 스포츠카 이야기
게시물ID : humorstory_4387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성성2
추천 : 27
조회수 : 2780회
댓글수 : 34개
등록시간 : 2015/07/14 13:12:05
옵션
  • 창작글
내 인생의 첫차는 지금은 보기 힘든 전설의 명 스포츠카로 평가받는 1992년형 1,500cc 터보 스쿠프였다.
하지만 출시된 해인 1992년에 나와 첫 만남을 한 게 아닌 정확히 15년 후인 2007년, 모진 세월의 풍파와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질주한 뒤 
몇 명의 주인을 거쳐 내게로 오게 되었다.

지금도 처음 그를 만난 날이 기억이 난다.
쥐꼬리 아니 쥐벼룩만큼의 월급을 받던 사회초년생 시절 인생의 첫 사치로 자동차를 사기로 한 뒤 자동차 판매장을 갔다.
하지만 당시 쥐벼룩 아니 쥐벼룩 눈알만 한 내 수입에서는 새 차는 사치를 넘어서 나의 재정상태를 디폴트 사태까지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매장의 영업사원은 내게 처음에는 일시불, 고민하는 나의 표정을 살피더니 36개월, 그리고 절망하는 나의 표정을 보며 72개월 할부까지 가능하다고
새 차의 구매를 권유했지만, 무려 6년이라는 시간과 20대에 걸쳐 30대까지 현대자동차에 채무자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TV와 핸드폰을 만져본 게 전부였던 기계치인 나는 내 주변에서 기계와 가장 밀접한 생활을 하는 농기계 학과를 졸업한 친구를 데리고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한다는 장안동 중고차시장을 찾게 되었다. 자신은 경운기와 트랙터의 강판만 봐도 기계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녀석은 럭셔리한 각종 승용차와 현란한 자동차 상식을 나열해주는 중고차 딜러 앞에 짐바브웨에서 방금 한국에 도착한 부시맨처럼 말이 없었다. 
아니 콜라병을 처음 본 부시맨처럼 외제 차 백밀러를 만져보고 손으로 닦아보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녀석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떽..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젊은 분이시니까 아반떼 HD 어떠세요? 이거 올해 나온 신형모델이고 5천 키로도 안 달린 거의 새 차나 다름없는데요."
"얼만데요?"
금액을 들은 뒤 차라리 그 돈이면 새 차를 사고 말지 하며 "제가 운전 초보라 부담 없이 운전할 수 있는 차는 없을까요."라고 변명을 했다.
그 뒤 몇 대의 차를 보며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내게 딜러는 물었다.
"지금 혹시 금액을 어느 정도 예상하세요?"
"아.. 제가 지금 가진 돈이 250만 원이라..."
딜러는 "내가 제대로 똥은 밟았지만, 평정심을 유지해야 되."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자동차를 구매할 때 
추가 들어가는 세금과 각종 수수료, 그리고 자동차 보험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결국 자동차 시장을 돌고 돌아 한쪽 구석에 있는 나의 청춘을 
함께 할 스포츠카 앞에 섰다.
"젊으신 분이니까 스포츠카도 괜찮으시죠? 이게 연식은 좀 됐어도 몇 년은 탈만 할 거예요."
트랜스포머에서 변신하는 범블비를 처음 만난 샘 윗윅키 (아.. 새끼 발음하기 참 힘드네..)처럼 녀석을 보고 나는 흥분했고, 곧 분노의 질주의
수프라를 몰던 폴 워커의 모습을 나에게서 연상시키고 있었다. 

간단한 서류 작성 후 스쿠프는 내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자취방으로 차를 가져온 날, 주인집 할머니는 '차 산다고 나간 놈이 
고물상에서 굴러다니는 쇳덩이를 끌고 왔네. 그려 '라고 짧게 말씀하시며 시장에서 돼지 머리 누른 고기와 막걸리로 사 오신 뒤 간단하게 
고사를 치러 주셨다. 
"절 혀, 이놈아..."
"차에 왜 절을 해요?"
"그려. 앞으로 니 목숨 책임질 놈인데 '잘 부탁헙니다.' 허고 절혀야 저놈도 너를 주인으로 알고 잘 따르는 거여."
그리고 그날 할머니는 내 첫차의 공식적인 동승자 (짐바브웨에서 온 부시맨 제외)가 되어 주셔서 함께 양평으로 드라이브를 떠났었다. 
그리고 빨리 가라고 위협 운전을 하던 뒤 차 운전자에게 전설적인 명언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랫슈?"를 날리셨다.

가끔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대도 되는지 묻기 위해 회사 관리부에 이야기 할 때 옆에서 들으시던 부장님이 물으셨다. 
"그런데 성성씨 무슨 차 산 거야?"
"아.. 그냥 싼 스포츠카 한 대 샀어요." 사실 부끄러워서 스쿠프라고 말은 못했다. 그래도 스쿠프도 스포츠카는 맞으니까...
그 뒤 회사에 내가 스포츠카 오너라는 소문은 정말 빠르게 퍼졌다. 어떤 사람은 주말에 페라리를 몰고 가는 나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알고 보니 없어 보이는 저 자식이 대한민국 고추 재벌의 상속자라는 소문부터 그동안 '태국사람이 한국말 잘하네'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던 
여직원들도 마치 나를 태국 왕실의 정통 후계자처럼 대해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직원들의 상상은 내가 차를 몰고 회사에 온 날 무참히 깨졌고, '저 자식은 그냥 태국 농부야. 그것도 소작농.'으로 나의 신분은 결정됐다.
하지만 그날 한 여직원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흠...차가.. 상당히 앤틱하네요.."
그래도 귀중한 골동품이라 불러 준 그 여직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훗날 소개팅을 나갔을 때도 소개팅 녀는 내 차를 본 뒤 "그쪽 차를 타느니 차라리 신데렐라 호박 마차를 타겠어요." 라는 표정을 지었고,
친구들도 내 차를 탈 때 항상 하던 말은 "이거 가다가 멈추는 거 아니지?" "설마 이 차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냐?"였다. 
하지만 나를 제외하고 내 차를 좋게 봐준 이는 같은 회사의 한 여자 후배였다. 
그녀는 비록 조수석 안전벨트가 고장 나서 착용하는 흉내만 내야 했고, 도로에 나가면 나의 연애를 질투했는지 나를 그녀에게 뺏기기 싫은 
스쿠프의 소음이라는 방해공작으로 차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그녀는 아무 불만 없이 나와 함께 늙은 스포츠카를 타고 많은 곳을 
함께 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놓친다면 인생에서 가장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한 곳도 늙은 스포츠카 안이었다.
그렇게 총각부터 결혼까지 내 삶에서 변화가 있던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한 뒤 기력이 다 한 나의 첫차는 정비소에서 
"고치는 비용으로 차라리 차 한 대 사세요." 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동안 스쿠프와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고맙다"고 말하고 정중하게 스쿠프에게 인사했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늙었던 나의 차는 차생의 마지막 황혼을 그렇게 나의 젊음을 함께했다. 
출처 노익장을 과시하던 나의 늙은 차와
채찍과 촛농이 함께 한다면 더욱 어울릴 것 같은 지금 나의 차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