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스압)우리 여사님
게시물ID : humorstory_4390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꼬꼬아빠
추천 : 56
조회수 : 2148회
댓글수 : 139개
등록시간 : 2015/07/23 23:58:13
옵션
  • 창작글
설날을 앞두고 떡국떡을 썰다
속곳에 피가 비친 어머니는 
아버지와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눈이 펑펑내리던 
그날 새벽 어머니는 나를 낳으셨다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만두같은 딸둘을 낳았을땐 오지도 않으시던
시아버지가 급하게 오시느라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오신 모습을 보시고는 그간의 설움이 
터져나와 한참을 창밖으로 
사박히 쌓이는 눈을 보며 우셨다 했다.

그렇게 어떤분에겐 그토록 기다림이었던 
다른이에겐 서러움이었던 
고기 여덟근 무게의 애물단지가 세상밖으로
나온건 설날이 하루지난 새벽이었다.
외할머니는 배넷저고리를 사와 입히시려다
너무 크게 나와버린 손주를 사슴이 그려진 
담요로 돌돌 말으시고 발에는 자신이 신으신
범표 백고무신과 같은 아기 고무신을 신기셨다.

그토록 기다리던 부랄이었다.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동네를 돌며 우리집도 
이제 아들이 있다며 웃음반 울음반의 표정으로 
인사를 다니셨다고 한다. 그때 큰 누이의 나이는
다섯살 작은 누이의 나이는 두살
큰누이는 잠을 자고 있는 내 머리통을 
노란 귤이 터지도록 때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한참 재롱을 부리는 자신에게 내리던 관심이 
외삼촌이며 삼촌이며 할것없이 떠나버린것이 
여기 누워서 울고 똥싸고
잠만 자는 이 커다란 머리통을 가진 
생명체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것이다.

4.8키로의 거구로 나와버린 아들놈은
젖이 돌지않는 어미를 그토록 괴롭혔다고 한다.
젖이 나오지 않으면 젖꼭지를 왕왕 깨물며
땡깡을 부리고는 자지러지듯 우는 모습이 
아들만 아니면 한대 쥐어박아 버리고 싶은때가
한두번이 아니라 했다. 외할머니는 그런 엄마가
안타까워,젖을 뗀 다른 집 새댁에게 
소고기 댓근을 사들고 가셔서는 우리 손주 
젖좀 물리소 우리딸이 불쌍해서 내가 잠이 안오오
라며 사정을 하셨다고 한다. 

내가 서른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에 와서야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생각나서가 아니라 
이제서야 겨우 새끼를 가진 부모의  마음의 깊음과
널음을 아슴프레 하게나마 가늠이 되서이다.
흔히 귓등으로 흘려듣던, 아니, 듣고도 아니들은척
했던 '너도 자식낳아 보면 부모맘 안다'는 
푸념아닌 푸념을 이제는 내가 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써내려갈 이야기는 언제나 옥색 한복 치마를 
입고 계셨던 우리 외할머니 서정복여사에 대해서다.

우량아로 태어났던 나는 두차례 병치레를 하면서
야위어 갔다. 그때마다 외할머니는 
이제는 사라져버린 '남묘호렌게쿄'를 연신 외시며
손을 빌고 또 비셨다. 개구리며 오소리며 너구리며
바삭하게 일어나는 내 피부에 좋다는건 
어찌 구하셨는지 허릿단에 묶고 오셔서 
어머니에 반대에도 불구하고 먹이고 바르고 
붙이셨다고 한다. 그렇게 두번쯤의 고비를 넘기자
나는 느티나무 아래에 할머니 손을 잡고 나가
간장에 비빈 국수를 쪼옥 소리가 나게 빨아먹을
만큼 튼튼해 졌다. 늘 우리 할머니는 뱃병이 나면
안된다고 밥을 몇번 씹으셔서 나에게 먹이셨는데
지금 며느리들이 본다면 기겁할 일일테지만
그때는 꽤 흔한 일이었다. 

병치레를 하며 다리에 힘이 없었던 내가 매일 
신발이 벗겨져 들어오자 할머니는 내 신발에
노오란 기저귀 고무줄을 발등을 가로질러 묶으시고는 
이제 신발을 안 벗고 올만큼 야무지게 컸다며
눈물을 찔끔 찔끔 하셨다고 한다. 
매일 밤이 되면 포대기에 나를 업으시고 
자장가를 부르시며 마당을 도시고 약간 안짱다리가
되자 자기가 너무 업고 다녀서 그러신다며
그다음은 팔이 떨어져 나갈듯이 아프더라도
안고 재우셨다. 이때 내 나이 두살 큰누이 일곱살 
작은 누이 네살. 

우리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큰외삼촌이 살고 계셨는데 
그집에는 큰누이랑 동갑인 외사촌형이 있었다.
친손주보다 외손주를 챙기는 친할머니가 
밉기도 했을진데 큰외숙모와 큰외삼촌은 나를
데리고 삼일 사일씩 재우면서 돌보셨고 
덕분에 외할머니의 공식명칭은 '니네할머니'
로 바뀌어 있었다. 

막내 외삼촌은 
내가 백도 복숭아를 뻑뻑 소리내며 먹는것을 
보더니 일주일 내내 
일이끝나면 복숭아를 들고와 자는 나를 깨워서라도
뻑뻑 소리가 나게 먹는걸 보며 박수를 치고
데굴데굴 구르다 갔다고 한다.

조금씩 나는 자랐고. 거꾸로 할머닌 늙어갔다.
내가 병설유치원에서 하루를 파하고 돌아오던날
그러니까 우리 큰누이가 국민학교 사학년일때
할머니는 그날도 어김없이 돌아가는 길에 
내손을 잡고 걸으시며 
오늘은 뭘해서 먹일까 라는 궁리를 
하셨나 보다. 
마침  메뚜기가 한참 튀던때라
메뚜기를 볶아먹이시려 논으로 들어가신 할머니는
허리를 펴시며 기우뚱 하더니 볏단쪽으로 
쓰러지셨다. 동네 어른들이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할머니에게 내려진 병명은 흔히 '풍'으로 
부르던 뇌졸증 이었다.

나중에 병원에 찾아가서 본 할머니를 나는 
분명하게 기억한다. 손주의 얼굴을 
쓰다듬으시려 두손을 뻗으시려는데 
오른손이 말을 안듣자
환자복을 이로 물고는 기어코 만지시고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시던 그모습은
가끔 할머니가 그리워 내가 꿈으로 꾸는
모습,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몇분을 멍하게 한숨을 쉬다가
담배를 한대 태우고는 몇일내로 할머니가 
잠들어 계신곳으로 가곤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내 외할머니는
일년에 백번은 넘게 학교앞에 서계셨다.
우산을 들고 양산을 들고 그리고 그 반대손엔
언제나 고구마댓순만큼 짙은 보라색의 
지팡이를 집고 다리를 끌며 서계셨다.
일학년에서 이학년이 되고 삼학년이 지나 
커다란 동네 백구가 무섭지 않아지고 나서
사학년쯤 되었을때 나는 또래랑 어울리기 위해
할머니가 서계시는 정문을 피해 후문으로 
까치발을 하고 나가곤 했다.  

몇일이 지나면 할머니는 후문에 와계셨고 
그럴때는 할머니의 토라짐을 풀기위해 
리코더도 불고 멜로디언도 불고 
그것도 안되면 할머니가 가장좋아하시는
티비유치원 하나둘셋에 나오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는율동을 하며 
재롱을 부리면 굳어버린 입꼬리는 그대로 두신채 
반대편의 입꼬리만으로 환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그리고는 그동안 주려고 해놓으신 음식을
하나를 꺼내시고는 하나를 다먹으면
다른 하나를 내어놓으시고 그걸 다먹으면
또 다른 하나를 꺼내오셨다. 

할머니는 불편한 몸의 반쪽만으로
나에게 맛난음식을 해 먹이셨고. 나는 
덩치가 어미보다 커버린 까마귀 마냥 
넙죽넙죽 잘도 받아 먹었다. 언젠가 한번
엄마에게 볼기를 불이나게 맞은일이 있는데
할머니가 몸살이 나신 때였때로 기억한다.
엄마가 할머니가 앓아 누우셔서 집청소며 빨래며
하러 할머니 댁으로 가셨는데 냉장고에
전이며 쏘세지며 귀한 햄이며 계란말이에 
식혜까지 잔뜩 있더란다 그래서 엄마가 
할머니께 이런거 드시면 안된다고 하시며 
버리라고 하시자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셔서 
그거 내 손주 먹일거니까 버리기만 해보라며
어머니를 내 쫒으셨다고 한다.

가끔 자식은 부모맘을 모르고 
그 자식의 자식은 본인의 부모를 
힘들게 할때가 있다. 그래서 인지
저녁에 안티프라민을 발라주시긴 했지만
나를 평소보단 조금 세게 때리신듯 했다.
'너때문에 우리엄마 아프잖아'라며 
글썽이던 모습을 보는데 내가 뭘 알겠는가 
알턱이 없지.

그해 겨울부터 할머니는 학교앞에 오시지 않았다
아니 마음은 언제나 와계셨겠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던것 같다. 
병원이 가까운 시내로 둘째 외삼촌과 같이
이사를 가신다음부터는 내가 할머니를 찾아갔다
어쩔때는 일주일에 한번 
또 어쩔때는 일주일에 두번 이렇게 할머니께
가면 할머니는 다음엔 언제 오냐고 묻곤 하셨다.
날짜를 정하고 그날 할머니께 가면 
할머니방에는 짜장면이며 탕수육이며 
군만두까지 잔뜩 차려져 있었고. 
그걸 호록호록 정신없이 먹고 풍선처럼 배가
둥그래 지면 다리에 눞히시고는 토닥토닥
두드려 잠을 재우셨다. 

저녁에 외삼촌이 들어오시면 
아무것도 안먹었으니 어서 얘 밥먹이라며
또 나를 먹이시고는 그제서야 웃으시며
외삼촌 차에 나를 태워 집으로 보내셨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교복을 입고 제일 먼저
자랑했던것도 우리 할머니였고 
시험을 꽤나 잘보면 성적표를 제일 먼저 보여드린
것도 할머니였다. 
별로 잘본것도 아닌데 할머니는 
등을 툭툭 쓰다듬으시며 
'우리 손지가 제일여' 라고 엄지를 올리시곤
쌈지에서 용돈을 챙겨주시곤 했다.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할머니와는 명절에만
만나게 되었고. 이사온 다음해 
내 생일을 삼일 남기시고 할머니는 
잠이 드셨다. 영면하신 할머니에게 수의를 입히는
모습을 보는데 굽어진 손이며 팔이 너무 힘들어
보여 가서 꼭꼭 주무르며 염쟁이 아저씨한테
우리할머니 팔좀 펴주시면 안되냐고 
생떼도 쓰고 빌면서 울기도 했다. 
장지로 가는길에 외손주가 상주노릇한다며 
어머니와 외삼촌들은 글썽글썽 하셨고 
입관을 할때는 까무라쳤다. 

기절을 했다가 
눈을뜬 버스안에서 보이는 
버스창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버스창 앞에 앉은 큰외삼촌 무릎에는
할머니가 옥색한복을 입고 사진속에 있었다.


큰외삼촌 댁에서 할머니 제사를 지낼때면 
열일을 제치고 꼭 가서 음복도 하고 절도한다.
왠지 그래야만 내 맘이 편하고 할일을 한듯한것이
이상하기도 하다. 집사람도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할머니 덕후라며 놀리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들어 이상한 마음이 자꾸만 든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신듯 하기도 하다.
큰누이와 엄마집에 놀러가면 할머니 얘기를
종종하며 웃기도 하고 글썽거리기도 하는데

내가 가끔 이런말을 하기도 한다 
저기 서정복여사님 계시네,안돌아가셨네.
고개를 돌려보면 나나 누이 몰래 손주 손녀에게
무언가를 먹이고 계신 우리 엄마가 
보인다. 그때 우리 외할머니 모습처럼,
똑같은 표정과 웃음으로.. 
서정복여사님이 계신다.





출처 시간날때마다 조금씩 끄적여 놓는 내 메모장
사람에 따라 길고 지루하실수 있을수도 있습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