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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 2. 독일사민당의 한계에서 배운다.
게시물ID : sisa_3466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2
조회수 : 16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1/11 22:28:04

http://www.newjinbo.org/n_news/news/view.html?page_code=&area_code=&no=1238&code=20120208173156_1585&s_code=20120209104606_3653&ds_code=



저번편에 이어서 "독일 사민당의 한계에서 배운다" 그 두번째입니다~ 시사게에 서식하는 좌파님들 참고하셔용.ㅎ


세계의 여러 진보정당들에 대해 진보신당 장석준 정책위의장과 대담을 나누는 기획 그 두 번째 순서입니다. 장석준 의장이 과거 민주노동당 <이론과 실천>에서 이 주제에 대해 쓴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정당의 고뇌: 독일 사회민주당② 수정주의 논쟁에서 1914년 8월 4일까지>를 참고자료로 덧붙입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세계 최초의 노동계급 대중정당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민주당이 1914년 자국 정부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평가는 정반대로 바뀝니다. “배신자”. 창당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40여 년의 세월 동안 사회민주당이 과연 어떠한 역사적 굴곡을 그려왔는지, 그리고 왜 이 당이 그런 길을 걸어가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널리 소개된 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계급도 자신의 대중정당을 건설하고 나선 지금, 우리는 독일사회민주당의 한계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당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정당의 고뇌: 독일 사회민주당②
- 수정주의 논쟁에서 1914년 8월 4일까지 

‘어떤’ 개혁투쟁인가가 문제다

흔히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가 베른슈타인에 반대하면서 개혁투쟁의 의의 자체를 반대한 것은 결코 아니다. 베른슈타인을 비판한 책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이 글의 제목을 처음 본 순간 놀랄지도 모른다. 사회 개혁이냐 아니면 혁명이냐?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사회 개혁에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중략) 물론 그렇지 않다. 사회 개혁을 위한, 또 기존의 기반 위에서 노동하는 대중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그리고 민주적 제도를 위한 일상적인 실천 투쟁은 사회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지도하며,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임금체계를 폐지한다는 최종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김경미․송병헌 옮김, 책세상, 10쪽, 강조는 인용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오히려 개혁 투쟁이야말로 일상 시기에 사회민주당이 혁명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이 문제되는 것은 그가 개혁 투쟁의 의의를 강조한 데 있지 않다. 그가 개혁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문제다. 그는 혁명적 전망을 의식적으로 포기함으로써만 당이 개혁 투쟁에 보다 충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방식으로 긍정되는 개혁 투쟁은 그 목표가 지극히 낮게 책정될 수밖에 없다. 당장 개혁의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제도 정치권 내에서 다수를 확보해야 하고 그러자면 자유주의 정당들과의 협조가 필요하다. 자유주의 정당들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폴마르가 강조한 5가지 과제 같은 최소 강령만이 ‘현실적인’ 목표가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수정주의자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것은 이미 무기력한 신앙으로 전락해가고 있던 당의 전략적 과제, 즉 민주공화국 건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상으로부터 이제 완전히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그럼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안은 무엇인가? 전략적 구상을 다듬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베벨, 카우츠키 등 구좌파의 노선에 다시 안주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다. 슈투트가르트 당대회에서의 발언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과 개혁의 변증법적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을 당의 전략 구상의 핵심으로 보았다. 당의 일상 개혁 투쟁은 혁명적 전망 아래서 그것을 북돋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개혁 투쟁이 필요한 것인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단지 한 문장의 짤막한 언급만을 자신의 책에 남겨 놓았다. 

노동조합 투쟁과 정치 투쟁이 갖는 커다란 사회주의적 의미는,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인식과 의식을 사회화한다는 것이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1908년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화한다”는 다소 추상적인 문구 뒤에 이런 해설을 덧붙였다. “사회화한다, 즉 프롤레타리아를 계급으로 조직한다”.)

- 위의 책, 55쪽, 강조는 인용자.  

말하자면, 개혁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의 현실적 성과들이 아니다.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의 성장을 꾀하는 것이 당이 벌여나가야 할 일상 개혁 투쟁의 진정한 임무다. 이렇게 역사적 체험을 쌓아감으로써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결정적인 위기 시기에 혁명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쟁취할 능력을 확보해나갈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개혁투쟁론은 맑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 그 단초가 나와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승리하나, 그것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다. 그들의 투쟁들의 진정한 성과는 직접적인 전과(戰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더욱더 확대되는 단결이다.


- <저작선집> 1권, 409쪽, 강조는 인용자.

이제 문제는 이러한 개혁투쟁론을 사회민주당의 일상 활동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으로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인가이다. 하지만,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이러한 실천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는 없다. 저자의 뛰어난 이론적 혜안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당시의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는 자신의 구상을 운동으로 펼쳐 보일 마당이 없었다는 점이다. 베른슈타인과 수정주의자들에게는 제도권 정치에 진출해 영향력을 발휘하던 남독일 사민당 조직이 버티고 있었지만, 폴란드 출신의 이 여성 망명 당원에게는 그런 기반이 없었다. ‘좌파’로 알려져 있던 베벨 등의 당권파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논의를 당내 우파의 부상을 억제해줄 왼쪽의 평형추 정도로만 인정해줄 따름이었다. 이것이 새 세기(20세기)를 맞이하던 무렵, 유럽 최대 노동자정당의 상황이었다. 

1905년 러시아로부터의 충격 - 정치총파업 논쟁

시대를 뒤흔드는 바람은 뜻밖에도 동쪽으로부터 불어왔다. 1905년 1월 러시아 페체르스부르크에서는 신부를 앞세워 짜르에게 청원하러 가던 한 무리의 노동자들에게 군대가 발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곧이어 짜르의 전제 정치에 항거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벌어졌다. 파업투쟁은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지만, 놀랍게도 1년 넘게 계속됐고, 때로는 무장투쟁으로까지 발전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노동운동 혹은 사회주의운동을 접해보지 못했던 가장 낙후한 노동자층까지 투쟁에 결합했고, 심지어는 농민과 중산층까지도 합세했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 노동계급의 봉기는 자신들이 걸어온 산길의 절정에서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주저앉아 있던 독일 노동운동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중세 농노의 사촌뻘로 여겨졌던 ‘미숙한’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1871년 파리 코뮌 이후 최초로 유럽에 혁명이라는 장관을 펼쳐 보인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한 편에서는 이를 최소한의 민주주의마저 허용되지 않는 동유럽 사회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애써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에는 러시아 혁명의 투쟁 형태로부터 사회민주당의 활로를 찾아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정치총파업 전술이었다. 오랫동안 사회주의자들에게 총파업은 경제투쟁의 한 전술로서만 의미를 지녔었다. 그들에게 정치투쟁이란 의회 진출 아니면 무장봉기였다. 정당운동을 불신하고 노동조합을 노동계급의 가장 중요한 조직적 수단으로 보는 프랑스, 이탈리아의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들만이 총파업을 정치투쟁의 무기로 생각했다.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정치총파업 전술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1891년 벨기에 총파업부터였다. 당시 유럽 많은 나라에서는 아직 보통선거권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해 권력으로 나아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보통선거권을 쟁취하는 수단으로 점차 정치총파업 전술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벨기에에 이어 스웨덴, 덴마크 등지에서 정치총파업이 시도됐고, 1904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총파업투쟁이 일부 도시에서 무장항쟁으로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독일 노동운동의 분위기는 이런 흐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탄압법의 역사적 경험을 잊지 못하던 독일 노동운동에서는 정부의 탄압을 불러일으킬 선제공격은 시도하지 않는다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1905년 1년 내내 유럽의 신문지상을 달군 러시아 혁명의 소식은 이런 분위기를 밑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누구보다도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 주위의 당내 좌파들이 정치총파업 전술의 채택을 들고 나왔다. 좌파는 총파업 시도를 통해 당의 전략적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 했다.

당시 독일도 보통선거권이 완전히 인정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성인 남성에 한정된 보통선거권은 그나마 제국의회 선거에서만 인정되었다. 프로이센 주의회 선거를 비롯한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소위 3계급 선거라는 계급별 선거가 치러졌다. 더구나 선거가 있을 때마다 정부는 제국의원 선출에도 계급별 선거제도를 적용하려는 선거법 개악 시도를 되풀이했다. 좌파는 우선 선거법 개혁을 쟁점으로 해서 정치총파업을 시도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한 독일 노동운동 내의 반응은 다양했다. 우선, 노동조합 간부들은 총파업 전술에 대해 극렬히 반대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는 광부파업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는 독일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파업 물결로 이어졌다. 그러나, 노동조합 간부들은 이런 상황을 조직 발전의 호기로 보기보다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 정치적, 재정적 압박을 던져준 것으로 받아들였다. 5월의 쾰른 노동조합대회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총파업 전술을 의제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했다.

당의 분위기는 이와는 좀 달랐다. 흥미롭게도 베른슈타인과 일부 수정주의 지도자들은 총파업 전술에 호의적이었다. 이들은 정치총파업이 자신들이 구상하는 제한된 개혁 목표를 성취하는 데 유효한 전술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직 원내 의석수로 자유주의 정당들을 압도해서 그들에게 사회민주당과의 제휴를 강요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총파업이 유력한 압박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어디까지나 당과 노동조합 지도부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는 총파업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좌파가 생각한 정치총파업의 상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는 동안 고국인 폴란드(당시 러시아령)로 달려가 투쟁의 양상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왔다. 당시 관찰의 결과물인 <대중파업론>(국역본: 풀무질)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의 사례를 들어, 일단 정치총파업이 벌어지면 더 이상 최고 지도부에 의해 조절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투쟁 국면이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를 ‘대중파업’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중파업의 물결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은 유례없이 확장되고 가장 낙후한 노동자층이 어느새 투쟁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어느 나라에서나 대중파업이 곧바로 혁명적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야 노동자계급은 비로소 혁명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대중들에게 새로운 무대를 제공하는 것이 이제 당의 역할이어야 한다.

정치파업 전술을 둘러싼 수정주의자들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강조점의 차이는 일상 개혁 투쟁을 둘러싼 오래된 입장 차이와 연관된다. 전자가 여전히 현실적 성과를 강조한다면, 후자는 굳건히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성장을 중심에 놓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이 그려낼 수 없었던 혁명적 일상 투쟁의 상을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비로소 찾아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 구상의 현실 검증이 역사 속에 보장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1905년 9월의 예나 당대회는 쾰른 노동조합대회의 다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총파업 투쟁을 당 전술의 하나로 채택했다. 하지만, 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긴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조합 측의 불만을 무시할 수 없었던 베벨 등의 당 지도부는 다음해 2월에 노동조합 지도부와 비밀회의를 열어 어떠한 실질적인 총파업 선동도 하지 않겠다고 확약했다. 그리고, 그 해 9월의 만하임 당대회에서는 노동조합의 전술적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노동조합 지도부를 예나 당대회의 결의로부터 면제해주었다. 

이 무렵에는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함께 독일 노동자들의 오랜만의 투쟁의 물결도 다시 퇴조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은 1907년 총선에서 이전의 81석의 절반에 불과한 43석만을 얻는 대패를 경험했다. 1905~1906년의 급진화가 선거상의 후퇴를 가져왔다는 주장 속에 당은 더욱 확실히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당의 변화 

그 해에 있었던 메이데이 기념 행사가 기억에 남아 있다. (중략) 상당수의 독일 사회민주당원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침묵을 지키면서 시내를 빠져 나와, 교외에 있는 기념식장에서 축배를 들기 위해 그곳으로 행진하였다. 그들은 깃발이나 현수막도 들고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 같은 독일의 메이데이는 전세계 노동계급의 승리를 나타내는 시위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레닌과 크루프스카야]는 교외의 주연장으로 향하는 행렬에서 빠져 나와, 늘 그러했듯이 뮌헨의 거리를 거닐었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저며드는 실망의 느낌을 씻어버리기 위해서였다.

- N. 크루프스카야, <레닌의 회상>, 김자동 옮김, 일월서각, 75쪽. 

1905년 이후 세계 자본주의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 호황을 누리던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제는 호황의 끝에서 새로운 쇠퇴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도 많은 것이 바뀌어갔다.
  
사회민주당의 최고기관은 5인으로 구성된 간부회의였는데, 당시 이 간부회의의 핵심은 베벨이었다. 베벨은 좌파의 오래된 상징이었지만, 항상 그의 제1 목표는 무슨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당 조직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이 때문에 폴마르, 베른슈타인 등 수정주의자들에게 비판의 화살을 맞추었지만, 이제는 로자 룩셈부르크 등 좌파를 최고의 골칫거리로 여겼다. 베벨의 뒤에는 증기선보조금 파동 당시부터 의연히 당내 우파의 입장을 견지해온 아우어가 있었다. 그는 간부회의 사무실을 자신의 집에 두고 거의 모든 조직 업무를 총괄했다. 1906년에 그가 은퇴한 뒤부터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가 그 자리를 맡았다. 

에베르트의 등장은 주목을 요하는 것이다. 그는 사회민주당 창당 이후 당 상근 활동을 통해 성장한 첫 세대였다. 그를 비롯해서 이후 1911년 예나 당대회에서 간부회의 임원으로 선출되는 필립 샤이데만(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수상)과 오토 브라운을 포함하는 이 세대는 모두 순수한 노동계급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지배한 심성은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래도 베벨이나 폴마르는 자신들을 혁명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베르트 등에게 ‘혁명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들에게 당 간부가 되거나 노동조합 간부가 된다는 것은 노동자 출신으로서 독일 사회에서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출세의 기회를 잡는다는 의미가 더 컸다. 

물론 이들과 같은 세대 안에도 혁명가들의 전통을 이어받으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다른 누구보다도, 에베르트와 동갑인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 대표였다. 하지만, 이들은 일부 당 언론 편집장직을 제외하면 중요한 당직을 맡지 못했다. 1차 대전 직전 간부회의는 12인으로 늘어났지만, 이중 좌파는 한 명도 없었다. 좌파가 당 전체의 행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은 당대회 뿐이었지만, 1900년대 말에 들어서면 당대회 결의라는 것은 일상 당지도부의 결정에 비해 별다른 실질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됐다. 

당의 주요 활동 영역을 보면, 우선 제국의회 의원단과 지방의회 의원단은 당내 우파의 독무대였다. 지방의회는 당지도부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았고, 그래서 벌써부터 지방의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자유로이 연합하곤 했다. 1890년대의 경제 호황 속에 투쟁보다는 협상을 통해 급속히 성장한 노동조합 역시 우파의 기반이었다. 칼 레기엔으로 대표되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우파 성향 당 간부들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당내 좌파의 주요 무대로는 일부 당언론과 청년운동이 있었다. 특히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아들인 칼 리프크네히트(변호사)는 청년운동을 통해 당내 좌파의 새로운 희망으로 부상했다. 한 가지 특기할만한 것은 1907년 베를린에서 문을 연 당 연수원의 역할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맑스주의 지식인이 강의를 주도하면서 연수원은 좌파 활동가들의 양성소 역할을 했다.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위기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논증한 선구적 저작이며, 󰡔자본󰡕 이후 맑스주의자의 손으로 쓰여진 최초의 경제학 대저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이 태어난 것도 바로 이 연수원 강의를 통해서였다.  

1914년 8월 4일을 향해 

8월 4일 제국의회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이 군사 공채에 찬성 투표를 던졌다는 기사가 담긴 <전진>이 스위스에 도착하자, 레닌은 이것은 독일의 참모본부가 적을 속이고 위협하기 위해 찍어낸 가짜 신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비판적인 정신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믿음이 아직도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 L. 트로츠키, <나의 생애 上>, 박광순 옮김, 범우사, 370-1쪽. 

물밑에서 잠자고 있던 노선논쟁이 다시 불거진 것은 1910년 수상이 바뀌는 와중에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제도를 개혁하자는 움직임이 다시 일면서였다. 2월과 3월 중에 시위와 파업이 잇달았고 당내에서도 오랜만에 전투적인 분위기가 나타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선두로 좌파 활동가들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투쟁을 고조시키려 했다.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풀뿌리 노동자들이 좌파의 이야기를 들으려 모여들었다. 좌파는 “민주공화국” 구호를 전면에 내걸고 대중파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당지도부는 2년 뒤의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대중행동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카우츠키가 지도부의 입장을 옹호하는 이론을 들고 나왔다. 그는 대중파업은 저발전된 동유럽 사회에나 적절한 투쟁형태이며, 서유럽에서는 ‘소모전’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참호를 파고 죽치고 앉아 결정적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반세기 뒤에 나타날 그람시 사상에 대한 우경적 해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래의 유럽 공산당 우파 이론가들이 반복하는 것처럼 카우츠키가 예견하지 못했던 것은 소모전 속에서 전력을 소진시키는 것은 적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들이 제 풀에 지치길 기다리는 그 동안 기아와 의욕상실로 죽어 나가는 것은 아군일 수도 있다. 

1907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5년간 절치부심하며 준비한 1912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최대한 다수 의석을 확보한 뒤 자유주의 정당들과 연합해 원내에 진보파 다수를 형성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사회민주당 역사상 처음으로 부르주아 세력과의 연정을 꾀한 것이었다. 결과는 대승이었다. 사회민주당은 425만표(27.7%)를 얻어 원내 제1 당이 되었다. 드디어 권력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자유주의 정당들과 연합한 결선 투표에서 사회민주당 지지 유권자들은 부르주아 정당들에 투표한 반면 부르주아 정당 지지 유권자들은 사회민주당에 표를 던지지 않았다. 그래서 31개 의석을 더 얻을 것이라던 예상이 깨지고 11석만을 추가로 확보, 110석이 되었다. 자유주의 정당들과의 연합은 깨졌다. 제1 당이 되고서도 사회민주당은 다시 주변 세력으로 밀려나야 했다. 다만, 변화가 있었다면, 100명이 넘게 된 국회의원들이 당을 완전히 좌지우지하는 위치로 부상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8월, 베벨이 죽는다. 베벨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던 레데부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회민주당의 20퍼센트는 급진파고, 30퍼센트는 기회주의자들이다. 그 나머지가 베벨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그 베벨이 사라진 것이다. 당의 현실 정치와 이상주의를 봉합하던 마지막 버팀목이 사라진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에는 제국주의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1911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모로코 위기가 벌어졌고, 1913년에는 제2차 발칸전쟁이 발발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에 긴장이 고양됐다. 1912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전쟁 위기가 닥치면 각국 노동자들의 동시 총파업 투쟁을 포함한 반전운동에 돌입하자고 결의했다. 정치총파업 전술을 거부해온 독일 사회민주당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처음 반전 대중행동 결의가 제출된 이후 끊임없이 이를 거부해왔으나, 바젤 대회에서는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의 명운을 거는 투쟁은 결코 이렇게 열의 없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의 기류가 바젤 결의의 내용과는 너무도 달랐다는 것은 1913년에 사회민주당 의원단이 국방비 증액안에 손을 들어준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방 예산 증가분을 직접세로 걷는다는 것이 사회민주당 의원들에게는 좋은 알리바이가 되어주었다. 당 강령에 명시되어 있는 “직접세 증가”를 실현시킬 기회라면서 의원들은 전쟁을 꿈꾸는 집권 세력의 길을 닦아주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등 소수 좌파만이 외로운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이제 제국주의의 중추인 군부 세력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만이 노동자계급을 한 걸음이라도 전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1914년 초부터 좌파는 군대 내의 가혹행위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캠페인에 나섰다. 이 때문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6월 29일 법정에 섰다. 피고에 대한 정부의 투옥 위협에도 불구하고, 군대 내 폭력을 증언하는 수천 명의 피고측 증인이 쇄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대전을 한 달여 앞두고 벌어진 군부와의 이 정면 대결에서 당내 좌파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상 투쟁의 전형을 비로소 찾아낸 듯 싶었다. 비록 제도권 내의 활동에서 출발한다 할지라도 체제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대중 행동의 새로운 장을 연다는 원칙이 드디어 피와 살을 얻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늦었다. 아니, 이들에 비해 역사가 너무 빨랐다. 

재판 하루 전인 6월 28일에 벌어진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이 유럽 전체에 전쟁 위기를 낳았다. 예상과는 달리, 혹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대로 전 유럽 노동계급 차원의 반전운동의 열쇠를 쥐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총파업을 소집하지 않았다. 8월 4일 사회민주당 의원단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전쟁 예산을 승인했다. 지치고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를 원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마치 신들린 듯이 전쟁 바람에 휩쓸려 전선으로 달려갔다. 사회민주당은 ‘전쟁’이 아니라 ‘혁명적 대중운동’을 통해 이런 일상으로부터의 폭발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은 결코 이를 시도하지 않았고, 결국 ‘전쟁’이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이로써 유럽 최초․최대 노동자 정당의 40여년간의 전진은 ‘혁명의 포기’라는 죄보다도 훨씬 무겁고 씻을 수 없는 죄악, 즉 수백만의 민중의 자식들을 진흙탕 속의 구더기 밥으로 만들어놓는 것으로 역사의 한 매듭을 짓고 말았다. 

* 이 글을 쓰는 데 다음의 연구성과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강철구,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념투쟁과 개혁주의(1890~1914)>, 서울대학교 서양철학과 박사학위논문.
박호성,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까치. 
송충기,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사회주의자: 7월위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이병철, <독일 사민당의 Burgfrieden 정책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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