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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휴지나눔 이야기
게시물ID : humorstory_4395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성성2
추천 : 30
조회수 : 2279회
댓글수 : 33개
등록시간 : 2015/08/07 12:00:10
2호선과 5호선, 그리고 중앙선과 분당선이라는 환승의 메카 왕십리를 지나면 그때부터는 편안한 출근길이 보장되는 중앙선을 타고 출근한다.

난 월급루팡이긴 하지만, 항상 출근 시간 30분 전에 출근하는 사장님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정규직이기 때문에 평소와 같이 약간 이른 시간 
상봉역에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날도 덥고, 휴가철이라고는 하지만 어김없이 사람은 많았다. 회기역을 지날 때쯤 배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다음 역은 청량리, 1호선과 나불나불... 청량리 역입니다." 라는 다음 역의 안내 멘트가

"다음 역은 괄약근입니다. 그냥 지나치면 개망신입니다."라고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똥 전문가이자 수년간 단련으로 똥트롤이 가능하다는
자존심이 아닌 자부심이 있는 몸! 현재 상황을 계산해보니 적어도 3개 역을 지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가뜩이나 날이 더워서 불쾌지수가 높은데 어제 대통령이 국민을 대상으로 한 불쾌지수 상승시키는 담화를 뉴스로 보고 복수심에 치맥을 먹은 게 후회가 됐다. 아무튼 나라님은 내게 참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다. 

그리고 어느 역에서 내려 이 문제를 해결할까 고민했다. 청량리는 기차역도 있고 1호선 환승이라 사람이 많을 것 같고, 왕십리는 앞서 밝힌 것처럼 
환승의 메카라 여차하면 긴 대기시간을 가질 수 있어 더더욱 위험하고, 결국 나는 왕십리 다음 역인 응봉역에서 내리기로 했다. 

응봉역은 비교적 사람이 한산한 역이었다. 그리고 반대편 승강장 쪽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계단을 오를 때 등줄기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더워서 흘리는 땀이 아니야. 이건 위기 상황전에 내 몸이 보내는 신호야! 다급하다.. 시간이 없다.' 
다행히 한산한 역이라 그런지 화장실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좌변기가 아닌 추억의 쪼그려 쏴 변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좌변기, 비데, 음악이 나오는 화장실 이런 걸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해결하는 게 더 급했다. 

"쿠알라룸푸르... 푸트라자야..." 가보지도 못한 말레이시아 도시들을 소리 내고 있었다. 

어렸을 때 술 마시고 쪼그려 쏴 변기에서 주저앉아 좌절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내가 그때는 똥트롤을 못했었지. 후훗' 하며 옛 추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순간 화장실로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을 다급하게 닫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도 어지간히 급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벨트 푸는 소리와 함께 동시에 

"필리핑핑피핑과 보라카카카카이..." 흠.. 옆 손님은 필리핀파로군.. 

그리고 우리 둘은 서로 말은 없었지만,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의 주요 도시를 입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내고 있었다.

잠시 후 옆 손님의 동남아 투어가 끝난 뒤 뭔가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주 작은 한숨 소리..
그리고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벽을 두들기며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 혹시 볼 일 다 보시면 밖에 휴지 좀 주실 수 있을까요?"

"밖에 휴지 없던데요." 

"아..." 옆 손님의 한숨이 더 커졌다. 그런 필수사항도 체크하지 않고 들어온 그는 급한 사람 아니면 하수였다. 그리고 조만간 그는 대형 참사를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 똥쟁이라 판단했다.

"저기 정말 죄송한데, 휴지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할 짓을 왜 하십니까! 알아서 해결하십시오!' 라고 단호하게 교훈을 주고 싶었지만, 약간 어리게 들리는 목소리는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부성애를 자극했다. 

"제가 지금 물티슈와 일반 티슈가 있는 데 어떤 거로 드릴까요?" 
프로 똥쟁이인 나는 항상 가방에 물티슈와 일반 티슈를 들고 다닌다. 그리고 난 빨간 약 줄까? 파란 약 줄까? 하는 모피어스가 된 기분이었다. 

"저.. 편한 걸로 주세요."

"그럼 제가 둘 다 드릴 테니까. 일단 물티슈로 먼저 닦고 마무리는 일반 티슈로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2015년 8월 7일 서로 얼굴을 모르던 두 남자의 마음의 장벽도 무너졌다.
난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벽 아래로 휴지 2종 세트를 건넸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받았다.

"그런데 목소리가 앳돼 보이는 데, 학생이신가요?"

"네 학생입니다."

"그래요. 평소에 장 관리 잘하시고, 휴지 잘 챙겨서 다니세요."

"감사합니다. 아저씨.."

그리고 무사히 일을 마친 학생은 내게 다시 한 번 감사하다며 '수고하세요.'라는 멘트를 남기고 나섰다.
'뭘 수고해 새끼야..' 하지만 간만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 준 의미 있는 나눔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잠깐.. 그런데 내 휴지.. 

"이봐 학생!! 야 임마!!!"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출처 응봉역 애송이...

넌 잡히면 내 손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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