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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 4860원 임금마저 떼여도..말 서툴러 항변못하고 울기만
게시물ID : sisa_4396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百年戰爭
추천 : 6
조회수 : 36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9/17 15:19:17
출처 :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917150008195

김아리나씨의 '벼랑끝 생계'


물이 끓어오르자 하얀 면발이 떠올랐다. 5평(16.5㎡)짜리 쪽방에 뜨끈한 공기가 찼다. 지난 8월24일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경기 안산 선부동 땟골의 한 쪽방에서 김아리나(57)씨는 잔치국수를 삶고 있었다. 사발 가득 담긴 국수에는 돼지고기를 삶아 식힌 육수를 붓고 볶은 고기와 오이·당근·가지를 고명으로 올렸다. 고려인식 잔치국수는, 연해주의 찬 바람을 거치고 중앙아시아의 사막을 떠돈 고려인들을 위로해온 음식이다. 이날 김씨는 오랜만에 고려인 친구들과 '영혼의 음식'(소울푸드)을 나눴다.

러시아 등서 '유랑 농사' 짓다가
2010년 봄 50만원 모아 한국행
말 안통해 아파트청소일 겨우 얻어
하루 12시간·주6일 일해 월150만원
고생끝에 소송 이겼지만 사장 파산
내년10월 비자만료가 벌써 걱정
"우즈베크선 고려인 돈벌 곳 없어요"

김씨는 중학교 졸업 뒤 돈을 벌기 위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떠돌았다. 결혼 전에는 공장에 다녔고 결혼 뒤에는 남편을 따라 러시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으로 옮겨 다니며 양파 농사를 지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떠돌며 농사를 짓는 유랑의 팔자였다. 뱃속에 아기를 품고도 일을 쉴 수 없었다. 셋째·넷째 아이를 뱃속에서 잃었다. 농사를 그만둔 뒤 남편(61)은 신장이 나빠져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부부가 아르바이트를 해도 우리 돈으로 한달에 40만원을 벌기 어려웠다.

2010년 봄 김씨는 비행기삯 50만원을 겨우 마련해, 먼저 한국에 온 아들을 따라 한국의 경기도 안산에 왔다. 쪽방 보증금 100만원이 없어 고시원에 잘 곳을 마련했다. 처음에 직업소개소를 통해 주방 일자리를 얻었다. 고려인 잔치국수를 삶아내는 솜씨가 도움이 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릴 적 엄마에게 배운 '고려말'과 한국말은 딴판이었다. 식당에서 빠르게 자리잡아가는 재중동포들이 부러웠다.

강제이주로 유라시아 대륙에 흩어진 뒤 고려인들은 고려말 교습을 금지당했다. 그 하나의 차이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한국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이 안 통하는 고려인들은 호소할 곳이 없다. 한민족의 얼굴로 러시아어를 말하는 고려인 동포들을 한국인들은 이방인으로 받아들인다.

한국말이 서툰 김씨가 겨우 구한 일은 갓 지은 아파트의 준공 청소였다. 건장한 남자도 며칠 만에 도망가는 일이다. 공사 뒤 쌓인 먼지를 반은 마시고 반은 쓸어낸다. 김씨는 그렇게 일하고, 여느 고려인들처럼 최저임금을 받는다. '땟골'의 고려인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다르지 않다. "8시간 일했으니 얼마겠소? 4860원 곱해 4만원 돈이지요." 잔업 근무까지 12시간씩, 일주일에 6일을 벌어야 한달에 150만원을 손에 쥘 수 있다.

요즘 김씨는 땟골 쪽방에서 아들·조카딸과 함께 산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차는 쪽방에 세 사람이 함께 누울 일은 없다. 김씨는 새벽 5시께 일터로 나서고, 오후 6시께 돌아온다. 휴대전화 조립공장에 다니는 아들과 조카는 각각 밤낮 2교대로 일한다. 땟골 고려인 대부분의 사정이 다르지 않다. 친족·동료와 낮·밤을 나눠쓰며 비좁은 쪽방을 공유한다. 3년 만기에 1년10개월 연장 가능한 방문취업(H2) 비자를 받아 하루 12시간 일하고, 최저임금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도 고려인들의 공통점이다.

한국에 와서 나쁘진 않았다. 1년간 아파트 청소하러 수도권 곳곳을 다녔고, 생전 처음 바다 구경도 해봤다. 하지만 번 돈을 떼일 줄은 몰랐다. 자꾸만 월급이 적게 들어올 때 눈치챘어야 했다. 직업소개소 사장은 "회사 형편이 어려우니 기다리라"고 했다. 50만원이 들어올 때도, 한 푼도 안 들어오는 달도 있었다. 2011년 7월 사장은 회사를 부도내고 가족 명의로 새 회사를 차렸다. 체불임금을 떼어먹는 흔한 수법이었다. 김씨의 임금이 553만원이나 밀렸지만 돌려받을 길은 없었다. 그때 김씨는 한국에 온 뒤 처음으로 울었다. "기다려 달라 해서 기다려 줬더니 왜 그랬는지 모르겠소. 기가 막혔지."

고려인 동료 7명과 함께 말도 통하지 않는 법원·노동청을 줄지어 찾아다녔다. 석달을 기다려 노동청을 찾아가면 "다음에 다시 오라"고 했고 다시 찾아가면 또 "다음에 오라"고 했다. 항변할 말재주가 그들에게 없었다. 소송 끝에 법원은 사장에게 체불임금 전액 지급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사장은 개인파산 신청을 한 터였다. 일하고 돈 못 받는 일이 한국말에 서툰 고려인들에겐 특히 자주 생긴다는 것을, 김씨는 나중에야 알았다.

방문취업(H2) 비자로 입국한 김씨의 비자 만료일은 2014년 10월30일이다. 물으면 재깍 날짜를 답할 정도로 '귀국일'은 김씨에게 중요하다. 가족에게 돌아가는 날인 동시에 다시 하루하루 먹고살 일을 근심해야 하는 때다. 김씨는 한국을 떠날 일이 걱정스럽다. "어찌 한국에 돌아오고 싶지 않겠는가? 우즈베키스탄에선 우리 고려인, 돈 벌 곳이 없어요." 평생을 떠돌고도 김씨는 유랑의 운명이 언제나 다할지 짐작할 수 없다.

61%가 월임금 100만원 겨우 넘어…91%는 의사소통 어려움
땟골 고려인 34명 실태조사


<한겨레>는 경기도 안산 선부동 땟골에 살고 있는 20살 이상 고려인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벌였다. 만성적인 장시간 노동에 지친 이들에게 집중력을 요하는 설문을 부탁하고 이를 되돌려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문조사에는 여성 19명, 남성 15명 등 34명이 응했다. 나이별로는 40대가 9명으로 제일 많았고 30대(8명), 20대(7명), 50대(6명), 60대(4명) 등이었다. 최종학력 역시 다양했다. 38%는 종합대학을 졸업했고 중학교 졸업자가 26%로 뒤를 이었다. 전문대학과 고등학교 졸업자는 각각 23%, 11%였다.

예상대로 노동시간은 길고 급여는 낮았다. 응답자의 과반수(52%)는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61%는 월평균 임금이 100만~130만원이었다. 38%는 130만~160만원이었고 160만~200만원(14%), 200만원 이상(8%)의 월급을 받는다는 이들도 있었다. 상대적 고소득자는 건설현장 일용직 등 위험에 따른 수당이 높은 직종이었다.

52%가 하루 10시간이상 근무
38%는 "임금체불 당해봤다"


적은 급여를 사업주에게 뜯기는 일도 잦은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38%가 '한국에 온 뒤 임금체불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제한적인 비자 유효기간과 부족한 언어 능력을 악용한 사업주들의 고의적인 임금체불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의 대다수는 언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여겼다. 응답자의 91%(31명)는 '한국에 와서 겪었던 어려움'으로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꼽았다. 응답자 중 22명은 '한국어로 몇 개의 단어를 말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답했고 3명은 '한국어를 전혀 모른다'고 응답했다. 언어의 장벽은 이들에게 소외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응답자의 79%는 '한국에 살아도 역시 재외동포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국적은 응답자의 80%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장 많았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도 경제형편이 가장 나쁜 곳에 속한다. 이 때문에 17만여 고려인이 살고있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의 입국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73%에 해당하는 25명이 방문취업(H2) 비자로 입국한 것도 눈에 띈다. 고려인 동포의 재외동포(F4) 비자 발급 기준은 완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돈 없는 동포들에겐 재외동포 비자의 문턱이 높다. 20.6%만이 재외동포 비자로 입국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고려인들에게 한국은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다. '한국에서 계속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고려인 응답자의 70%가 '그렇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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