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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최강의 지장[네이버펌]
게시물ID : humorbest_439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xsoft
추천 : 24
조회수 : 3010회
댓글수 : 23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4/06/11 00:25:01
원본글 작성시간 : 2004/06/10 21:54:08
삼국지 최강의 지장은 누구인가 ? 

지장이라 함은 지력으로 군을 이끌어 적을 격파하는 장군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장요와 조인은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맞아 싸웠지만 전체적인 전투의 기획은 조조의 머리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계략이 아닌 그들의 뛰어난 무력에 의지하여 이룬 승리였기 때문에 지장의 랭킹에서 제외된다. 

또한 우수한 지장이라면 적은 병력으로도 적의 대군을 맞아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적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맞아 싸운 전공을 중시하여 평가할 것이고 스스로의 무용과 담력에 의존했던 인물보다는 주변 지형과 세의 흐름을 살펴 적을 격파한 병법가를 우선으로 선발할 것이다. 그리고 철저히 正史 를 근거하여 평가한다 

(1) 조 조 - 

三國志正史에서 자신의 뛰어난 두뇌플레이로 군을 움직여 적을 격파한 전공이 가장 많은 인물로 조조를 따라잡을 위인은 없을 것이다. 특히 스스로 판단력이 뛰어난 군주였다는 점과 적은 병력으로 여포를 물리치고 원소를 격파한 일은 그의 탁월한 병법실력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정적 유비의 세력을 항상 격파하여 그를 매 번 달아나게 하였고 마등을 주살하고 그의 장남 마초의 진공을 이간책으로 물리쳤으며 허도에서 손바닥보듯 합비전을 지휘하여 장요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외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도 뛰어난 전투감각과 임기응변식 병법으로 자국의 세력을 삼국중 가장 강대한 나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비록 그의 모사들과 합작한 공동작품이지만 그 중심에 조조맹덕이 있었고 최종결정과 작전의 실행은 모두 조조가 지휘한 것이다. 

(2) 육 손 - 

유비의 칠십만대군을 맞아 화공으로 무찌르고 나라를 구한 구국공신 노련한 유비의 진공을 지구전으로 맞아 계략을 써서 그를 격파하고 다시 조비의 도발을 예상하고 군대를 돌려 위나라와 맞서 영토를 지켜냈다 유비는 그의 정적 조조가 너무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빛을 못본 것이지 군단을 다루는 실력과 병법운용능력은 손권이나 원소보다 더 뛰어났다 그런 그의 대군단을 육손이라는 젊은 병법가가 화공으로 격파해 그의 대군을 괴멸시키고 유비를 달아나게 한 것은 삼국의 세력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은 사건이다. 특히 육손이 군권을 갖고 있던 시절 조비와 유선이 감히 동오를 침범하지 못하였고 크고 작은 여러전투에서 연전연승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지력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케한다 참고로 육손이 어복포에서 제갈량이 설치한 팔진도에 갇혀 구사일생한 내용은 정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3) 제갈량 - 

군단의 장으로써 군영을 설치하는 실력이 탁월했다는 제갈량은 정사의 기록으로 볼 때 군의 수장으로 전공을 세운 시점이 유비가 죽고 난 다음 맹획세력을 진압하면서부터이다. 따라서 그때부터 제갈량이 지휘관으로써의 실력을 보이는 것이다. 직접 군의 총사가 되어 남만으로 출정하여 맹획을 추포하였고 그들의 항복을 받아 조공정책을 폈으며 국력을 모아 대적 조비를 겨냥해 북벌을 감행했다는 것은 상당히 진취적이고 스스로의 병법에 자신이 있음을 뜻한다 비록 병귀신속한 조조와 같은 임기응변의 전술적 능력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에게 3위의 랭킹을 주는 것은 그가 삼국중 가장 영토가 작고 국력이 약했던 촉나라를 이끌어 외교와 전쟁의 상황에서 초지일관 공세로 일관해 주도했던 사실이다. 비록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하였으나 그의 생전에 강대국 위나라 또한 함부로 촉을 침범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그가 군사를 부리고 군단을 배치하는 능력이 탁월했음을 입증한다 게다가 기록에 보면 위의 맹장 왕쌍을 죽이고 장합을 활로 쏘아 죽였다한다 직접 쏘아 죽였다면 제갈량의 무술실력도 어느 정도 인정이 되는 바 필부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사마의 - 

제2의 조조라 불릴만큼 조조의 능력을 빼어 닮았다 임기응변에 능하고 정치적 안목이 탁월했던 사마의 중달은 특히 그의 전투기록에서 실패와 패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하였고 맹달과 공손연의 반란을 차례로 진압하였으며 동오와 맞서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국가를 잘 보존하였다 비록 강대국의 대장이었으나 동시에 두 나라를 방어했다는 점과 내부의 반란을 신속한 군사적 대응으로 제압하고 무찌른 것은 그의 병법실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특히 당시 촉의 실력자 제갈량과 싸워 그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고 그에게 진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연의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정사의 기록에서는 제갈량의 화공에 걸려 위기를 맞거나 그의 목상에 놀라 달아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실패한 전적이 없는 사마의가 번번히 북벌에 실패한 제갈량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제갈량보다 더 유리한 국력과 병력을 갖고 있던 맞수였고 제갈량을 막았지만 그를 제압하고 촉을 압박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5) 주 유 - 

동오의 창업공신이자 적벽대전 승리의 주역인 주유는 항복론을 일축하고 주전론을 앞세워 당대의 영웅 조조의 기세를 꺾는데 성공한다 손책을 도와 여러 크고 작은 군현을 계략으로 평정하여 복속시키고 훗날 손권이 조조와 맞상대를 할 수 있도록 세력을 구축한 병법가이다. 그가 순전히 지력에 의지하여 조조처럼 작은 군세로 출발한 손책을 도와 동오의 대부분을 평정한 것은 그의 병법실력이 뛰어남을 말해준다 그러나 육손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적벽에서 조조를 크게 격파한 것도 아니거니와 특히 형주를 공격함에 있어서 적의 지휘관 조인을 누르지 못하고 부상을 당해 실패하는 불운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벽전 이후 오나라가 실질적으로 얻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6) 유 비 - 

유비는 거병의 지형을 잘못 선택해 조조라는 대적을 맞서 싸웠기에 그의 일생에 실패가 많았고 빛을 보지 못하였을 뿐 만약 손권같은 무능한 자가 처음부터 적수였다면 그가 강동을 다스렸을지도 모른다 동탁토벌전에 공손찬을 따라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조조를 속여 그에게 군사를 빌려 떠나 원술을 격파하고 서주를 습격하여 취하였다 특히 그의 병법실력이 돋보이는 것은 유표에게 의지해 신야성주로 있을때 위나라의 대장 하후돈의 공격을 매복전술로 격파한 사건이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화공으로 무찌른 것으로 구라를 치지만 사실 이것은 순수 유비의 지력으로 이룬 매복전술의 승리였다 이 후 손권과 연합하여 난을 모면하고 형주일대를 평정한다 익주를 공략하여 성도로 들어간 뒤 국력을 재정비하여 조조를 공격하였다 이 때 역시 유비 스스로 군단을 편성하고 지휘하여 한중을 점령한 것이지 제갈량의 조언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제갈량은 성도에 남아 후방에서 유비군의 군수품과 식량을 지원하는 보급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처음으로 유비 스스로 군단을 지휘하여 대적 조조로부터 한중이라는 중요한 길목을 빼앗아 크게 승리한 사건이라 하겠다 하후돈과 조조를 자신이 직접 군을 지휘하여 무찌른 역사적 기록은 유비가 단지 신하의 말을 잘 따르는 유약한 군주가 아니란 걸 입증한다 

(7) 여 몽 - 

관우의 형주를 급습하여 삼국의 세력구도를 바꾼 사람이다. 동오는 형주를 얻음으로써 명실상부 삼국 중 두번째로 강한 나라가 된다 관우는 항상 중원을 공격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여몽이 신경쓰여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관우의 심중을 파악한 여몽은 일부러 병상에 누워 관직에서 물러나 육손이라는 무명의 젊은 장수를 대신 내세워 관우를 속이는데 성공한다 이 후 회유책으로 미방과 부사인을 끌어들여 형주군의 봉화대를 무력화시켰고 이때문에 관우는 강현이 모두 점령되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여몽이 계략으로 형주를 취한 사건은 뛰어난 모사인 제갈량조차 예측할 수 없었고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일어난 대단한 전공인 것이다. 어떤 소설에서는 이를 두고 육손의 계략이라고 하는데 형주습격작전은 순수하게 여몽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이다. 

(8) 장 비 - 

장비가 승리한 전적의 기록을 보면 장요처럼 무력에 의지했던 경우는 거의 없고 오히려 그 스스로의 지력을 짜내어 승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판파에서 노련한 조조군을 상대하여 몇십기의 기병으로 먼지를 일으켜 복병이 숨어 있는 것처럼 가장한 뒤 조조를 속여 멈추게한다 유비의 명을 받아 익주를 공격할 때는 성안에서 거세게 농성하는 엄안을 거짓정보로 유인하여 그를 사로잡아 아군으로 만들고 위의 명장 장합이 군을 이끌고 서촉을 침범하였을 때 군단을 인솔하여 맞서 싸워 그를 격파시키고 다시 화공으로 그의 진지를 불살랐다 이 때에도 장합의 기습을 간파하고 미리 작전을 세워 거꾸로 장합을 유인해 그의 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그의 본영을 우회하여 불을 지른다 장합은 전장의 상황에 따라 병법을 운용하고 군세를 변형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가정에서는 마속을 격파하였고 제갈량마저 두려워했던 명장이었다. 그런 그를 계략으로 무찌른 장비의 지력을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특히 정사에서는 장비가 술로 인해 실수를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후세의 추측평론에서 다시 장비를 재평가하길 장비는 문장에 일가견이 있고 큰눈에 준수한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지력과 용맹을 겸비한 명장이었다.는 것이다. 

(9) 등 애 - 

실질적으로 촉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검곽을 우회하여 성도를 곧바로 공격하는 황도습격작전을 세워 강유를 따돌리고 유선의 항복을 받아낸다 한 국가를 군대를 동원하여 계략으로 멸망시켰다는 점에서 가장 큰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9위에 머무는 이유는 그 후의 행보에서 이렇다할 큰 전과가 없었고 처음부터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약소국을 공격해 이룬 전공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 강대적을 맞아 역전시킨 위 랭킹의 지장들에 비하여 낮은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 평론후기 

만약 9위 다음의 랭킹을 계속 매긴다면 아마도 관우나 손견이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가급적 크게 실패한 전적이 없고 불리한 상황에서 기적을 창출한 역전의 용사를 우선으로 선발하다보니 여러가지 뒷맛이 남는다 

우선 적벽대전의 경우 조조가 특정소설에서 매도하는 것처럼 크게 패해 달아나거나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목숨을 빚진 사실이 어느 사서의 기록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적벽전 이후 조조는 다시금 군을 재정비하여 서량일대를 공략한다 그처럼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조조의 대군이 적벽에서 크게 무너진 것이 아니란 것을 입증하는 근거이다. 

정사의 기록에 보면 조조가 단지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을 다시 돌려 허도로 귀환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황개가 조조의 수군에 불을 질러 공격했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똑같은 화공술을 구사하여 적국의 군주를 격파한 경우라도 약간의 피해만 준 주유의 경우와 유비의 칠십만 대군 태반을 죽인 육손의 경우는 그 평가가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육손은 성을 공격하고 방어하는데 있어서 실패한 전례가 없지만 주유는 적벽전의 승리에 이어 사기가 높은 대군을 이끌고서도 조인이 지키는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부상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니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여 평가절감된 것은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제갈량은 뛰어난 전략을 구사한 모사이기도 했지만 유비 사 후 군사령관으로써 활약하기도 하는데 모사의 능력과 지휘관으로써의 능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기에 비록 병법능력이 조조나 사마의에 비하여 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능력있는 군사로 평가받는 이유다 

관우 역시 수공으로 적의 대장 우금의 군단을 몰살시키고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을 참수한 뒤 산적을 이용하여 번성의 후방을 교란시킨 전과는 그의 지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부분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후 서황의 구원군에게 패하여 달아났고 끝내 번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여몽에게 패하였으니 그의 병법실력이 뛰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전반적인 능력으로 평가할 때 그는 뛰어난 무장이었으며 당시 제후들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던 용장이었다는 것이다. 

종회와 강유 또한 지장에 가까운 지휘관의 성격이 짙으나 특별히 크게 부흥하여 성공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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