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숙은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넓은 거실에는 TV, 냉장고, 컴퓨터, 비디오, 오디오 등이 쓰던 그대로 있었고 안방에는 고급 장롱과 침대가 놓여 있었다. 비좁고답답한 학교 근처의 자취방을 생각하니 갑자기 별세계에 온 느낌이었다.
이 아파트는 대학 동창인 희정의 아파트였다. 희정은 대학시절 은숙의 단짝이었다. 졸업 후 은숙은 대학원에 진학하고 희정은 잡지사 기자로 활동하게 되면서 만남이 뜸하게 되었고 은숙이 박사과정을 시작한 후로는 연락이 끊기다시피 했다.
며칠 전 은숙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자취방 책상위에 낯선 열쇠꾸러미가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에 희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급한 일로 갑자기 멀리 떠나게 되었으니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자기 아파트에서 살라는 얘기였다. 이것저것 물을 틈도 없이 또 연락하겠다며 희정은 전화를 끊었다. 얼떨떨하기는 했으나 원래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의 희정이었기에 그려려니 했다.
은숙이 트렁크를 열고 가지고 온 옷들을 장롱에 걸었다. 장롱은 한동안 쓰지 않아서인지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정롱은 모두 세 칸이었는데 두 칸은 텅 비어 있었고 나머지 한 칸은 잠겨 있었다. 아마 중요한 물건을 넣어 두었나 보다고 은숙은 생각했다.
다음날이었다. 지도교수의 연구실에서 수업을 받고 나오는데 한 친구가 그녀에게 말했다. "은숙아, 옷에 핏자국 같은 게 묻어 있어." 화장실에 가서 거울에 비추어 보니 원피스의 목 뒤 언저리 부분에 핏자국이 있었다. 어디선가 머리를 받혔나 생각해 보았지만 그런 기억이 없었다. 등교길 차안에서 묻었을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냥 넘겨 버렸다. 그 다음날 동기생들과 저녁을 먹는데 친구가 말했다. "은숙아, 이거 핏자국 아니니?" 거울을 꺼내 살펴보니 블라우스의 목 뒤 언저리에 핏자국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그날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다음날도 옷에서 핏자국을 발견한 은숙은 신경이 곤두서며 찜찜한 기분이 영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논문쓰랴, 강의들으랴 워낙 바쁜 스케줄에 쫓기다 보니 그날도 그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날 밤, 늦게 귀가한 은숙은 아파트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면서 TV를 보았다. TV에서는 마감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엽기적 살인 사건 ....J아파트에서 모기업 과장으로 근무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미혼의 남자가 목이 반쯤 잘린 채 사망....." 카메라가 비추는 피살자의 사진을 보고 은숙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은숙도 잘 아는 대학 시절부터 희정의 애인이었던 남자였다. "죽은 남자의 일기장에 의하면 그는 애인의 아파트에서 변심을 추궁하며 결혼을 요구하는 애인을 살해하여 서울 근교의 야산에 묻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죽은 남자가 적어 놓은 장소에서 피살자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사체의 머리 부분은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은숙아, 안녕! 네 옷 잘 입었어." 희정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러나 전화는 끊어지고 말았다. 내 옷을 잘 입었다니? 희정이가 여기 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순간, 은숙은 망치를 찾아 들고 안방으로 내달았다. 잠겨진 세번째 장롱의 열쇠를 미친 듯이 부수고 문을 열었다. 장롱 안을 본 은숙은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거기에는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희정의 잘려진 머리가 허연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