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좋아하는 편이다. 누구한테 술 마시자고 먼저 권한 적은 별로 없지만 누가 술 마시자고 불렀을 때 사양한 적도 없었다.
그런 내 성격을 알고 있는 고등학교 친구들은 얼마 전 다짜고짜 술 마시러 나오라며 나를 불렀다. 물론 곧바로 나갔다. 과 행사나 어른들 앞 술자리처럼 눈치 볼 필요가 없는 자리였다. 나는 오랜만에 거리낌 없이 술을 마셨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취하는지 친구들이 하나둘씩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 때까지 나는 한결같은 속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친구들은 고개를 떨구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다들 좀 취했나 싶어서 나 혼자 자작하려는데 친구 중 하나가 내가 든 병을 나꿔챘다.
"넌 좀 그만 마셔라. 술이랑 원수졌냐?" "응? 더 마실 수 있는데." "안돼안돼. 달의 이름으로 내가 허락하지 않아."
멀쩡할 때도 충분히 등신같던 녀석이었지만 술에 취하니 하이퍼-등신으로 진화한 것 같았다.
"...야. 쟨 왜 저리 나 술 마시는 걸로 뭐라하냐."
술을 마시던 흐름이 끊긴 난 내 옆자리에서 핸드폰을 하던 다른 친구에게 투덜거렸다. 어리둥절하던 친구는 깜짝 놀라더니 내게 말했다.
"아. 너 술 마시고 있던 거였어? 난 또 계속 한 입에 털어넣길래 물 마시는 줄 알았지 미친새끼야. 너 그러다 훅 가. 요단강 너머로 훅간다고."
술기운에 잠깐 잊고 있었다. 이놈들이 정상이 아니란 걸.
정신을 차리니 사방이 적이었다. 친구들은 작정하고 나를 까내리기 시작했다. 저새끼는 요정으로 태어나도 이슬 대신 참이슬만 마실 거라고. 꺾어 마실 줄을 모르네 주도를 무슨 주기도문 줄임말인 줄 아나봐. 냅둬. 하이패스로 주님 곁으로 가고싶나보지. 어머어머 방금 쟤가 나 쳐다보는 거 봤어? 나보다 다섯 달은 늦게 태어난 애가 술에 취했다고 장유유서도 몰라보네.
"..그만해 미친놈들아.."
강화유리 파편마냥 멘탈이 조각조각난 내가 중얼거리자 친구들의 인신공격이 잠깐 멈췄다.
"야. 그런데 넌 진짜 술을 왜 그렇게 전투적으로 마셔?" "그래. 무슨 맨날 원샷이야."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술이 거기 있으니까?" "...니가 뭔 등산가냐? 뭐 그리 마시다간 북망산은 타겠네." "야 임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딱 봐도 취했다고 입산거부 당할텐데."
곧바로 후반전이 시작됐다. 그 날 마녀사냥의 주인공은 나였다.
P.s. 그렇지만 내가 술 마시는 거 가지고 이렇게라도 걱정해 주는 건 역시 고등학교 친구들밖에 없었다. 살짝 고마운 느낌에 내가 투덜대듯 '그래도 고맙다 새끼들아' 라고 말하자 친구들은 그 날 들어 처음으로 진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