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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친구 이야기 4
게시물ID : humorstory_4413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hristmas
추천 : 49
조회수 : 2666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5/10/17 19:32:35

"언제 다시 보죠?"

라는 나의 물음에 여자는 "글쎄..."라고 대답했다.



"아! 그런데 내가 다음주 수요일이 휴무야"

"그래서요?"

"그렇다구ㅋㅋ"

"그럼 수요일에 만날래요?"

"너 출근하잖아"

"까짓거 반차 내면 되지 뭐"



사실 퇴근하고도 만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1년의 마지막 날이었고,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몇 시간 뒤면 잊혀질 다이어트 및 금연을 결심하는 
그 신성한 시간을 여자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는 뻥이고, 늘 밤에만 봤던 여자를 낮에도 한 번 보고싶었다.


"그럼 수요일날 뭐할래요? 영화볼까?"

"영화는 시간아까워, 얼굴보기도 부족한 시간인데"

"(발그레...)"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영화보는 것도 좋겠다. 너랑 보고싶은 영화가 있어"


여자는 늘 이런식이다.

주변 모든 요소가 기분에 영향을 끼치는데, 그 요소의 범위가 엄청나서 매번 나를 놀래키곤 했다. 

낮에 날씨가 좋으면 케이크 한 조각을 먹고 싶다거나,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조금 불면 뜨끈한 국물이 땡기고,
노을이지면 맥주한잔이 땡기는

무려 3시간 사이에 심경의 변화가 잦은 사람이었다. 





여자는 예술영화를 좋아했다. 
나는 로멘틱 코메디를 좋아한다. 


하지만 무조건 나는 소위말하는 '있어'보여야 했고 
자주 본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대응했다.  

상영하는 곳이 별로 없는 터라 겨우겨우 알음알음 시간을 계산해 찾았다. 
영화 하나를 예매하는 것도 치밀하고, 계산적이게! 
우리의 첫 낮 데이트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영화를 예매하고 여자에게 보고를 하는 순간.
이상한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눈덮인 강릉(추정) 길에서 
여자는 하얀 패딩잠바를 입고
눈밭을 성큼성큼 뛰어가더니 이내 푹 자빠졌다. 

배경음악은 러브스토리. 


"웃기지?"

그 엉뚱함이 귀여웠다. 
(하지만 나중에 그 고았던 하얀 패딩을 실제로 보는순간 어찌나 꼬질꼬질 하던지. 패딩을 실제로 안 본 눈을 새로 사고싶었다) 

여자가 영상을 보내준 시간은 점심시간 바로 직전. 
덕분에 점심 식판 흰 쌀밥 위에서 여자가 뛰어다녔다. 






수요일은 한참이나 남았다.

가뜩이나 지옥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거북이 만치 느리게 가는 시간을 보니 더 진이 빠졌다. 


여자에게 문자가 왔다.


"나 출근길에 너를 잠깐 보러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어때?"


망했다. 

어제 밤에 치킨을 먹지 말껄.
적어도 점심시간 이후에는 붓기가 빠질텐데 어쩌지. 


"좋죠!" 



여자의 집은 나의 회사와 가까웠다. 
그리고 여자의 직장은 나의 집과 가까웠다. 


여자는 보통 출근시간보다 한시간 서둘러 나왔다. 
이 추운날 역시 걸어온다고 했다. 


그리고 오는길에 돼지국밥을 한 그릇 한다고도 했다. 


참 내숭이란 없는사람. 



여자가 도착할 시간쯤이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점심시간 땡! 하자마자 여자에게 달려갔다. 




커피를 한 잔 시키고. 우리는 마주앉았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부끄러워하기는. 



내심 내 붓기를 걱정했는데, 도착하니 걱정은 눈녹듯 사라졌다. 
여자는 머리가 산발이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부러 니가 못생겼니, 내가 못생겼니를 따지자면 
내가 승리하리라. 


"근데 그렇게만 입고 온거야?"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잠바도 입고나오지 못했다. 

"네 갑자기 나오느라"

"내가 엄청 보고싶었나 보네? ㅋㅋ"


아니 눈이라도 마주치고 뻔뻔하게 말하면 모를까
사시처럼 여기저기 눈을 흘려가며 저런 대사를 치는건 도통 어디서 배운건지. 


 
잠시 어색한 커피를 마시고
여자는 출근을 했다. 


"잠깐이라도 봐서 좋았어" 







대망의 수요일이 됐다. 

아침부터 숨도쉬지 않고 일을 하고 
회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에게 달려갔다. 


여자는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까만색 썬그라스를 끼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겨울에 썬그라스를 낀다. 

하지만 나와 여자와 다른점은 

여자는 멋과 시력보호를 위해 끼고 
나는 바람에만 부딪히면 나오는 눈물을 가리기위해 낀다는 점. 

이유야 어찌됐건, 한 겨울에 썬그라스를 쓰는 사람을 만나다니 뭔가 잘 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 나중에 알고보니 잘 맞는건 썬글라스 하나 뿐이었지만) 

"밥은 먹었어요?"

"음 안먹었는데 배는 별로 안고파"

"그럼 영화보고 먹지 뭐"



영화가 시작됐다. 
여자와 남자가 처음만나 우주선을 타고 데이트를 한다.

그리고 살포시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나쁜 꽃가루를 마시고 여자는 병에 걸린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남자는 치료제인 꽃을 사다 바치지만.
결국 여자는 죽는다. 
그리고 여자의 관은 건물 밖으로 내동댕이 쳐진다. 




'이 영화를 왜 나랑 보고 싶어 했을까'

'나도 병에 걸리면 저렇게 얄짤 없다는 뜻인가'

'휴 이런 영화는 역시 나랑 안맞아' 





"영화 재밌네요. 마지막 장면이 좀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치. 나도 저럴줄은 몰랐어. 아! 배고프다 뭐먹지?"

"초밥 어때요?"

"좋아"



여자는 어딜가나 요리사와 마주보고 앉는 자리를 좋아한다. 


나는 자꾸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데. 
매번 앞의 남자 요리사를 보고있기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음 여기 엄청 맛있다"



나이스. 



여자는 며칠 전 적금이 만기되었다고 했다.

이자로 4만원 가량 받았다고 (자랑)했는데
3만원이 나온 초밥을 계산했다. 


충격적이었다. 더치페이가 아니었다. 
'이제 나에게 마음이 좀 열린건가?'
'내가 돈이 없어보였나?'
'자신의 부유함을 어필하고 싶은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어쨋튼 꽁짜밥은 맛있는 법. 



"이제 뭐할까요?"

"술 한잔 할까?"

"밥 얻어먹었으니까 제가 살게요"

우리는 또 길을 걸었다.


그리고 여자가 한 번 가봤다는 술집에 갔다. 

이름은 <우주>

참 여자의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알겠는데도 모르겠는 그런 무중력의 감성과 어울리는 곳이다. 




와인을 한 병 시켰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빨갛고 제일 싼걸로. 


술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와인이 모자라 맥주도 한 잔 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왜 여자가 저녁을 먼저 계산했는지 유추할 수가 있다) 


주량이 맥주 두 병인 여자는 눈이 풀려있었고
저 사람 곧 쓰러지겠구나... 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나랑 한 번 만나볼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늘 연애는 아는사람과 했던 나는 

술집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연락을 하고, 연애를 한다는 것 자체가 
컬쳐쇼크이며 문화충격이며 위험한 데인저러스였으며 충격의쇼크 였다.

아니 상상조차 해본적이 없었고, 나의 연애는 그렇게 쉬워서는 안됐다. 

게다가 나는 여자를 오늘 세 번째 만나는 날이었으며, 
나는 새롭게 만나는 사람과는 안정적인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좋아요" 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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