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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이 누군지 아시나요?
게시물ID : sisa_4417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릴케
추천 : 16
조회수 : 1194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3/09/26 20: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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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朴鍾哲, 1964년 4월 1일 ~ 1987년 1월 14일, 부산광역시 출생)은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이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그는

 

제5공화국 말기에 공안당국에 붙잡혀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당시 이 사실을 은폐하려던 군사독재정권의 불의는 당연히 민중들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항의인 6월 항쟁의 계기가 되어,

 

시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964년 4월 1일 부산 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났으며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하여 언어학과 학생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 중

1986년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었다가,

1986년 7월 15일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출소했다.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박종철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던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였다.

 

취조실에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여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11시 45분 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항쟁의 불씨가 됐다.

 

1987년 중앙일보의 기자 신성호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단서를 잡고 1월 14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자 다음날 당시 치안 본부장 강민창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발표 했다.

 

“탁 치니 억”은 한동안 군사정권의 궤변과 비도덕성을 조롱하는 유행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어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 의사 오연상의 진술을 확보했다.

 

1월 14일 경찰의 요청으로 대공분실 509호를 제일 먼저 목격했던 중앙대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은

1월 16일 사건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고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경찰은 14일 밤에 은폐를 위하여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최환 부장 검사는 사체보존명령을 내렸다. 사건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맡았다.

1987년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했다.

 

부검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맡았다.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1월 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년 뒤 부검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여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되었다.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된 경찰은 서둘러

 

조한경 등 2명이 박종철군을 물고문하여 살해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고,

 

가족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는데,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민중 학살의 책임자중 하나로 지목되던 사람이었기에

 

이 말 역시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한편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이였던 이부영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노력으로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대공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대한 성공회 서울교구,주임사제:이한우 바우로 신부)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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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오마이뉴스에 그의 유족이 올린 글이 있더군요




'살인자들'에게 붙잡힌 아들, 엄마는 통곡했다

[공모-가족이야기] 엄마의 다이어리를 보다
기사 관련 사진12월 24일 23시 전화가 왔다. 아들이 연행되었다고. 하늘이 무너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인자들한테 잡히지 말아야 할 텐데.

엄마의 다이어리를 덮었다. 유치원에 간 막내를 데려오려면 지금 친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엄마, 이 다이어리 내가 가져갔다가 가져올게." 친정을 나섰다. 지하철에 자리잡은 나는 다이어리를 폈다. 

12월 25일 김밥을 가지고 면회 가려고 서대문 경찰서에 전화를 하니 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디에 있을까 학교에 가서 알아보니 성남에 있는 보안대라고 한다.
12월 26일 통곡

눈물이 흘러내린다. 주체할 수 없다. 지하철 안에 사람들이 우는 내 모습을 보며 '미친년'이라 하지 않을까? 미친년이 되지 않으려면 다이어리를 덮어야 하는데 그 역시 쉽지가 않다. 

수배령 떨어진 오빠... "그 자식 '건대사태' 주동자다" 

보안대에 연행된 우리 오빠. 오빠는 나에게 각별했다. 우리 형제는 4남매로 맨 위에 언니가 둘이고 오빠 하나 그리고 나였다. 오빠는 나보다 일곱 살이 많다. 오빠는 까까머리 중학생 때 초등학교 1학년인 나를 데리고 과학관이며 어린이대공원이며 열심히 다녔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갈 때면 나는 업어달라고 했다. 그뿐인가. 배고프다고 번데기를 사달라고 졸랐다. 거기까지만 해도 봐줄 만할 텐데. 버스에서 멀미하고 토하기도 했으니, 중학생 오빠는 버스에서 얼마나 창피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아도 오빠한테 참 미안하다. 

그런 오빠가 1983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오빠는 대학 3학년이 되면서 집에 잘 안 들어왔다. 안 들어오는 오빠를 대신해서 형사들이 집 앞에 진을 쳤다. 어느 날인가 열쇠가 없어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 있는데 형사들이 내게 다가왔다. 

"왜 집에 안 들어가니?"
"열쇠가 없어서요."
"슈퍼 아저씨가 너 집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시던데 열쇠 있으면서 우리 때문에 안 들어가는 거 아니야?" 

나는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아저씨들이 기가 막혔다. 더이상 아저씨들의 거짓말을 들을 수가 없어 친구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렇게 우리 집 앞에서 진을 치는 형사들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빨갱이 집안이라 수군거렸다. 

그리고 4학년이 된 오빠에게 수배령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경찰인 지인을 통해서 오빠가 왜 수배되었는지 알아보셨다. 돌아온 대답은 "건대 사태 주동자다. 그 자식 완전 빨갱이다. 더 이상 묻지 마라"는 거였다. 덧붙였던 말은 오랜 기간 형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거였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시에 건대 사태는 1200명 이상이 구속된 무척 큰 사건이었다. 단일 사건의 최대 구속자 수를 기록한 사건인데 오빠가 그 사건의 주동자였다니, 그리고 빨갱이라니. 아버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고향 북한을 떠나 남으로 내려온 월남자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자식이 빨갱이라는 경찰의 말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기가 꺾인 아버지는 오빠 사건에 대해서 더 알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09175
장문의 다이어리지만 읽어 볼수록 참 가슴이 아프더군요
전문은 링크로 보시길 바랍니다
그에 관한 영화도 있죠
남영동1985 포토 보기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전 국민의 숨소리까지 검열하는 군부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1985년 9월 4일, 민주화운동가 김종태는 가족들과 목욕탕을 다녀오던 길에 경찰에 연행된다. 예전부터 자주 경찰에 호출되었던 터라 큰 일은 없으리라 여겼던 그는 정체 모를 남자들의 손에 어딘가로 끌려간다. 눈이 가려진 채 도착한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 공안수사당국이 ‘빨갱이’를 축출해..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71486
그기고 그를 살해한 고문기술자 이근안
이근안과 아이히만이 떠오른 이유 

이근안 경감은 <남영동 1985>라는 영화를 통해서도 널리 소개된 바 있지만, 김근태 전 의원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일제 경찰 노덕술의 후예였고, 그 이근안의 후예들이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지금도 국민들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로 덮으려했던 경찰이 국민들의 분노에 마지 못해 손을 들고 당시 고문 관계자들이 연행되던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중략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던 이근안은 10년을, 그것도 자기 집에서 숨어 살다가 1999년에야 자수를 한다. 이 때 그는 "그 때는 그것이 애국이었다" 그리고 "나는 철저히 '상명하복'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청문회를 보면서 이근안 이외에 떠오른 또 한 명의 인물은 나치 독일의 장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Otto Eichmann, 1906~1962)이다. 그는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근무하며 유대인의 홀로코스트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다. 그는 주로 유대인을 모아 관리하고 집단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했으며, 유대인 박해의 결정권자라기보다 실무책임자였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전범으로 수배되자 지구 정반대편인 아르헨티나로 도피하여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15년 동안 기계공으로 살았다.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발각되어 체포돼 이스라엘로 송환된 후 재판을 받고 1962년 처형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이 유대인 박해에 참여한 것은 상부 명령과 지시를 따른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변명했지만 사형을 피하지는 못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청문회를 보면서 아이히만이 떠오른 첫 번째 이유는 그가 했던 이 변명 때문이다.
후략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98186&CMPT_CD=P0001
이근안 요즘 뭐하나 봤더니 잘살고 있네요?


말로는 회개, 책 속에서는…


백발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70대 남성이 1.5V 소형 건전지를 오른손으로 들어보였다.

"이 소형 건전지로 전기고문이 이뤄졌습니다."
그 남성은 유신과 군사독재 시절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날린 이근안(74) 전 경감이다. 자신의 자서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의 출판기념회에서 그는 고문의 사실적인 묘사로 화제가 됐던 영화 '남영동 1985'의 고문 장면에 대해 언급하며 "이는 사실과 다르며 과장됐다"고 말했다.

"(영화에 나온) 계기판과 손잡이가 딸린 기계는 처음 봤습니다. (고문 장면을 보며) 내가 저렇게 악질이었나 하는 마음에 울었어요. 그러나 젓가락으로 맞으나 몽둥이로 맞으나 맞은 건 맞은 거지요."

그는 고 김근태 전 상임고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큰 고문 없이 자백을 받아낼 방법을 궁리하다가 1.5V 건전지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985년 5월 당시 박처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은 경기도청에서 근무하는 이씨를 호출했다. 박 단장은 고문 없이 12일째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김 전 고문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씨는 김 전 고문을 칠성판(원래는 시신을 올려놓는 장례용품이지만 피해자를 묶어놓은 뒤 물고문 등을 하는 용도로 사용된 나무판)에 묶었다. 그는 "너 같은 놈은 전기로 지져야 돼"라고 한참을 협박한 뒤 김 전 고문의 발에 소금물을 뿌리고 건전지를 갖다댔다. 결국 김 전 고문은 민청학련 계보도 등을 모두 자백했다고 이씨는 기억했다. 겁을 준 뒤 전기충격을 줬기 때문에 큰 고문 없이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20년 뒤 이들은 죄수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다시 만났다. 2005년 2월 여주 교도소에서 이씨는 김 전 고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에 김 전 고문은 "그게 시대의 탓이지, 개인의 탓이었겠습니까"라고 답한 바 있다. 출판기념회에서 2011년 12월 김 전 고문의 사망 당시 문상을 가지 않은 데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문상을 가서) 분란이 나면 오히려 괴로움을 드릴 수 있겠다 싶어 안 가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김 전 고문이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지 않으면 (2005년 당시) 나를 안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1981년 전국민주노동자연맹(민노련)사건 관련자를 수사할 당시, 이씨는 옆방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들었다. 옆방에 가보니 "신사로 소문난 김 반장(경찰)이 화가 나 있었다"라면서 "나는 김 반장이 들고 있는 몽둥이를 빼앗아 형식적으로 한 대 때리고 이태복(전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의 상처에 약을 발라줬다"라고 밝혔다.
이근안, 여전했다

그는 지난 2월 퇴직 경찰들의 모임인 대한민국재향경우회 전 관계자의 소개로 강남의 한 대형 교회 목사를 만났다. 이 교회 측은 경기도 가평군의 한 기도원 근처에 그가 머물 숙소를 내줬다.

"교회 측에서 고맙게도 가평군의 한 기도원 근처에 숙소를 제공해줬어요. 특히 '빨갱이 간첩 몰아내 통일국가 이루자'라는 기도원 표어를 보고 정말 감탄했습니다."

이근안은 이곳에서 쓴 글을 엮어 책으로 내고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출판기념회가 열린 음식점은 1백20석 규모였으나, 행사장에는 그의 지인 3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사죄라는 말보다는 회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고문 행위 자체가 잘못이다"라고 밝히면서 "간첩이라도 쥐어박아선 안 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고문 피해자들에게 찾아가 사과를 한 적은 없다.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예를 갖추진 못해도 종교적인 삶을 통해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과거 행위에 대해 회개하고 있을까? 자서전의 내용은 의구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책머리에 '공산당 잡는 일은 영원한 애국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썼으며 '영화까지 상영하면서 매도하는 것을 바라보며 한 시대는 사상범으로 옥살이하고, 한 시대는 민주화 인사로 탈바꿈하며 민주화 보상금까지 받는 행운을 바라보면서 시대를 잘 만나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적기도 했다. 그는 말로는 회개를 언급했지만 책을 통해서는 고문 피해자였던 민주화 인사들을 공산당으로 매도했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자서전에 나타나 있지 않다는 취재진의 지적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 회개하는 것이지 한 건 한 건에 대해서 말하기는…"이라며 말끝을 흐리기도 했다.

이근안의 역사관은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도피생활 11년, 담장 안에 갇혀 7년, 도합 18년 만에 세상에 나와보니, 온통 나라가 붉게 물들어 간첩이 제도권에 들어와 국록을 먹고(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희망버스'를 '대한민국 흔들기 2011년 좌파 10대 난동 사태' 중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인터넷 방송 '나꼼수'에 대해서는 '악랄하고 진화된 흑색선전'이라고 평했다. 또 4대강 사업 반대에 대해서는 '반대를 위한 반대', 한미 FTA 반대 시위는 '반국가적인 태도'라고 주관을 밝히기도 했다.

이근안이 "'남영동 1985'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라고 피력한 기사가 언론에 보도된 이후 김 전 고문의 부인인 인재근 통합민주당 의원이 트위터를 통해 이근안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봅니다. 진실은 감출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진심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기 바랍니다.'

이근안은…

1970년 경찰에 입문해 1988년까지 대공 분야에서 일했다. 그는 고문을 통해 간첩을 잡은 공로로 4회의 특진과 옥조근정훈장 등 총 16차례 표창을 받았다. 대공 분야에서는 "이근안이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1988년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장을 끝으로 경찰을 그만둔 뒤 공개수배당했다. 민주화 인사를 고문한 혐의였다. 그는 10년 10개월을 서울 동대문구 자택에서 숨어 지내다 1988년 10월 자수했다. 7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2006년 출소. 이후 2008년 10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한 분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지만, 2011년 12월 그에게 고문당한 김근태 민주당 전 상임고문의 사망 이후 여론이 악화되면서 2012년 1월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http://media.daum.net/society/people/newsview?newsid=20130114105419726
헛 웃음만 나오네요
목사라 ㅋㅋㅋㅋㅋㅋ
자료가 꽤 깁니다 시간 나실떄 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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