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3세의 기혼남입니다. 애는 없구요. 힘들게 고시 봐서 5급 공무원 된지 한 4년 정도 되었습니다.
근데 그만 둘려구요.. 많은 사람들이 정말 부러워하는 직업인 건 알고 있지만..
보람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남의 눈, 남의 기대만 보고 살았어요 공부 잘 한다고 부모님이 좋아해서 계속 열심히 했고 내가 진짜 뭘 하고 싶은지는 끝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문과를 선택했더니 나중에 잘 되려면 법대나 상대 뿐이라고 해서 그 쪽 계통으로 전공을 정했고.. 남들은 좋은 학교 좋은 과 나왔다고 부러워하지만 저는 정작 제가 하는 공부에서 즐거움을 느낀 적이 드물었어요
대학 다니면서도 항상 문학이나 철학 등 인문학 교양수업만을 너무 좋아했고 전공 학점은 교양에 비해 낮았지요.
남들처럼 여기저기 취업을 위한 구직활동하는게 싫고 겁도 나고 또 부모 곁에서 떨어져서 혼자 살고 싶은 마음에 덜컥 고시를 보겠다고 했죠
그래서 혼자서 좀 놀다가 떨어지고 나니 부모님께도 죄스럽고 고시촌 분위기에도 영향 받고 이러다 정말 망하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시에 합격을 했어요.
처음 해보는 조직생활 사회생활에 잔뜩 겁도 먹고 일 중독에 걸린 무서운 상사 만나서 매일 평균 11시에 퇴근하고 주말 근무도 해가면서 초임 사무관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일에도 적응이 되고 주변을 돌아보게 되니 왜 내가 이 길을 선택했나.. 하는 회의감이 들어요.
물론 정책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이 직업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저는 정치와 경제, 사회에 관심과 애정이 없고
소설을 쓰고 책을 읽고 삶과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그런 삶을 간절히 바랍니다.
제 주변에는 많은 공무원들이 다들 일에 보람을 느끼고 열정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아무리 5급 공무원이라도 중앙에서 일하면 대부분 1~4급들과 함께 일하기 때문에 사실상 제일 막내로서 힘든 일을 도맡아 합니다. 그런데 일에 대한 열정과 보람이 없으니 이제는 이 사람들과 어울려 하루하루 보내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글을 쓰고 싶어도 이제 조직생활에 치여 감수성이 사라져서 전처럼 글도 자유롭게 나오지 않아요
그만두고 싶은데 이제 그만 남의 눈을 의식하고 나의 삶을 찾고 싶은데
그만 둔다고 하면 당연히 주변에서 모두 미쳤냐고 할 거고 아내도 돈을 어떻게 벌거냐고 할거고 부모님과 장인장모님도 무지 충격을 받겠죠
지금 이 힘든 방황시기만 지나가면 다시 적응을 하게 될거고 그러면 괜찮아 질거라고 하지만
저는 조직 안에서 승진해서 1급, 2급이 되고 싶지도 않고 그만큼 중요한 일을 맡은 책임자가 되어 정치적으로 여러 사람들 만나면서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의 눈과 기대에 더욱 얽매인 그런 미래가 너무 싫어요.
생각해봤는데 그만 두면 당장 할 수 있는 건 학원강사가 가장 현실적일 것 같아요. 물론 모두가 미쳣다고 욕하고 학원강사 생활도 힘들겠지만
적어도 자기가 수업계획을 만들고 자기가 만든 공부세상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잖아요.
물론 그 쪽 세계는 성과가 전부인 냉혹한 무한경쟁 자본주의 세계지만..
큰 돈은 벌 욕심도 없고 일에서 어느 정도 기쁨을 느끼고 남은 시간에 산책하고 글을 읽고 고민하고 궁극적으로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전에 이런 고민을 먼저 한 사람이 있었다" 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남기는게 제 소원입니다.
꿈을 쫓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도록 자기의 진정한 적성이 무엇인지 자기의 진정한 꿈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인생을 헛산거 같아서 너무 후회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