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할아버지들은 70~80년대 때 젊었을 때 새마을운동의 주역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래서 빈곤에서 벗어나 지금과 같은 경제부흥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젊음을 국가를 위해 피와 땀, 눈물로 바친 애국자들 아니냐. 나라사랑을 위해 젊음을 바친 할머니들이다. 태극기를 달았다는 것은 애국심을 더욱 돈독히 하겠다는 다짐이다. 이런 할머니들한테 국가가 폭력을 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태극기를 달면서 울었다."
29일 오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속에,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산 127번 철탑 현장에 있는 움막에서 만난 주민들이 한 말이다. 주민들은 한국전력공사가 10월초에 송전탑 공사를 재개할 것이라 보고 최근에 새로 움막을 만들었는데 깃대에 태극기를 매달아 놓았다.
▲ 밀양 주민들은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곳곳에 움막을 설치해 농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소재 127번 철탑 현장에 움막을 새로 만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며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송전탑을 막는 것이 애국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태극기를 매달아 놓았다.
태극기를 매달자는 제안은 주민 곽정섭(67)씨가 했다. 곽씨는 "67년을 살아오면서 남을 위해,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송전탑을 막는 것은 남과 국가·사회를 위한 실천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이남우(71)씨는 "곽씨한테 평소에 그런 말을 들을 때 울컥했다"며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데, 박사학위 10개 20개 갖고 있는 사람보다 더 애국자이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주민들은 이곳에 성인 20여 명이 들어갈 정도의 대형 무덤을 파놓았다. 특히 윤여림(75)씨는 지난 한 달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움막을 짓고 무덤을 파기도 했다. 윤씨는 한국전력이 공사 재개를 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진 뒤 과로와 스트레스로 쓰러져 엿새동안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윤씨는 이날 움막 한 귀퉁이에서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그는 지난 추석도 이곳에서 지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윤씨는 지난 여름 송전탑 공사에 찬성하는 한 주민으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했다. 주민들은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 밀양 주민들은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곳곳에 움막을 설치해 농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소재 127번 철탑 현장에 움막을 새로 만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며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사진은 한 달 동안 움막을 지키며 무덤을 파기도 했던 주민 윤여림씨가 쓰러져 병원에 엿새 동안 입원했다가 퇴원해 29일 오후 움막을 찾아 누워 있는 모습.
▲ 밀양 주민들은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곳곳에 움막을 설치해 농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소재 127번 철탑 현장에 움막을 새로 만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며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송전탑을 막는 것이 애국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태극기를 매달아 놓았다.
"같은 마을에 사는 주민인데, 처음에는 송전탑 공사에 같이 반대했다. 그런데 한국전력 측으로부터 밥과 술을 얻어먹었는지, 어느 순간에 찬성 쪽으로 돌아섰다. 지난 여름 하루는 새벽에 낮을 들고 윤여림씨를 찾아와 위협했다. 당시부터 윤씨는 불안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고 몸져눕기도 했다."
이남우씨는 "전문가들이 와서 조사를 해보니, 밀양 송전탑 경과지 주민 70% 정도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고 한다"며 "송전탑 공사를 재개한다면 주민들의 건강은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송전탑 공사 현장 주변 곳곳에 움막 농성
송전탑 현장으로 오르는 길목 곳곳에 움막이 설치돼 있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생활하다시피하며 농성하고 있다.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10월 초에 공사를 재개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민들은 극도로 민감한 상태다.
밀양 부북면 위양리 입구 움막에도 이날 대여섯명의 주민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곳 움막은 지난해에 설치되었다.
▲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평밭마을 입구에 주민들이 송전탑 반대를 위해 움막을 설치해 놓았다. 29일 오후 그 안에서 주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밀양 주민들은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곳곳에 움막을 설치해 농성하고 있는데, 최근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소재 127번 철탑 현장에 움막을 새로 만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며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사진은 29일 오후 이곳 움막 안에서 주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이판희(79)씨는 "이 마을에 시집와서 평생을 살았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다, 죽어도 여기서 죽을 것"이라며 "밀양은 수해와 태풍도 없는 고장인데, 철탑이 들어온다고 해서 신경 쓰느라 욕 본 거는 말도 못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난 5월에 공사를 막느라 손목 인대가 늘어나 다쳤다, 지금도 아프지만 그냥 있을 수 없어 나왔다"고 덧붙였다.
권윤한(84) 할머니는 "지금 이 나이에 무슨 바람이 있겠나. 이대로 살다 죽에 해달라는 것뿐"이라며 "철탑이 왜 하필 이 골짜기에 들어온다는 말이냐. 송전선로를 땅 밑으로 묻어도 된다고 하던데, 왜 안 한다는 것이냐"고 말했다.
장계덕(82) 할머니는 "몸이 아파 그동안 나오지 못했는데, 오늘 조금 나아져서 나왔다"면서 움막을 지키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교대로 움막 앞에 나와 산으로 오르는 차량을 검문검색하기도 했다.
밀양 송전탑 갈등이 깊어지면서, 외지인들의 격려 방문도 줄을 잇고 있다. 이날도 한 교회에서 단체로 다녀가면서 격려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주민들은 송전탑 공사 현장으로 오르는 길목에 움막을 설치해 놓고 공사 장비의 출입을 막고 있다.
목포에서 왔다고 한 김진혁·이명준 교사는 "밀양 송전탑 문제가 일부에서는 이기주의로 여겨졌는데, 실제 와서 보니 그런 게 아니고 생존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민들의 생존권이 위협받지 않아야 할 것"이라며 "정부와 한국전력은 비양심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지켜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송전탑은 밀양 5개면(단장·상동·산외·부북·청도면)을 지나가는데, 청도면만 주민과 합의로 설치된 상태다. 4개면 주민들은 송전탑 공사 재개를 하면 죽음을 각오하고 막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한국전력은 10월 2일 송전탑 공사를 재개한다. 한국전력은 경찰에 현장 보호 요청을 해놓았으며, 공사 재개하면 기동대 대원 3000여 명이 투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 한국전력공사가 오는 10월 2일 밀양 송전탑 공사를 재개할 예정인 가운데 9월 29일 오후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공사 현장 입구에 마을 주민들이 공사장비의 출입을 막으려고 밧줄을 준비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