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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박정희에 대한 이야기..
게시물ID : sisa_44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시연돌이~
추천 : 7/5
조회수 : 354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04/04/19 02:37:43


- 불우이웃 돕기, 수해 지원금 등의 분배에 관한 건 

[ 서울시에 **동에 수해가 났다고 해도, 수해가 난 집이 한반에 한명씩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반에는 수해난 사람이 많고, 어떤 반에는 수해난 사람이 없다. 근데 

수해지원금을 학생들한테 나누어 주라고 돈이 내려오는데, 이걸 한반에 한명씩 나

누어 주란다. 어떤 집은 물에 잠겨도 지원금을 못받고, 어떤 집은 마당에 물 웅덩이

가 생긴 것으로 몇십만원을 준다. 불우이웃 돕기 성금도 마찬가지다. 한반에 한명을 

주게 되어있다. 나라에 돈이 없다면서 이런 식으로 돈을 쓴다. 이건 정말 아니다. ] 

그리고 보통 마지막에 하게 되는 말.. 

[ 어쨌든 교육정책을 한다는 그 자리에 모두 꼴통들만 앉아 있다.. 박정희 때는 이

렇지 않았다.. ] 




이건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 박정희때는 이렇지 않았다. ] [ 전두환 때가 가

장 살기 좋았다.. ] 정말 그럴수도 있고, 아니면 [ 조선시대때는.. ] 이라는 말처럼 

단순한 과거에의 동경일수도 있다. 그런데 我로서는 점차로 [박정희 때는 이렇지 않

았다]라는 말에 공감을 더해가게 된다. 

분명히 말하건대, 我는 박정희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박정희의 문제점과 나쁜 점을 

수두룩하게 읊어댈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박정희가 안좋다고는 해도 그 이후의 

대통령들의 행태와 비교해보면 박정희가 제일 나아보인다. 박정희 이후의 대통령들

이 다 능력있고 좋은 사람들이었다면 박정희를 독재자로 나쁜 놈이라고 하고 싶은

데, 그 이후의 경험은 차라리 박정희가 낫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야기 둘.. 

98년도 1월에 쓴 글 중에서.. 

[ 우리 민족은 한다면 한다는게 있기 때문에 지금 어려워도 한 2년 후면 괜찮아 질

거야. 우리에겐 그정도 저력은 있어.. ]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생각.. [ 엥.. 이게 뭔 소리지.. 우리가 한다고 하면 이루어내 

는 저력이 있는 민족이라고? ] 

글쎄.. 我의 지식으로는 10세기 거란 요나라를 서희, 강감찬이 물리친 이후로 우

리 민족이 한다면 해내는 경우를 잘 알지를 못하는데, 특히 외국과 관련해서는 우

리 뜻대로 이룬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건 어디에서 나온 [근

거 없는 자신감]일까. 


여진에 항복했고, 몽고족에 38년간 항쟁하다 결국 고개를 숙였고, 공민왕이 원에 

서 벗어나려 했지만 무위로 돌아갔고, 임진왜란도 결국은 명나라의 도움이었고, 호

란때도 큰소리만 치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는데..

영, 정조의 개혁도 실패였고, 한말 근대화는 결국 실패하여 일본의 속국으로 되었

고, 8.15 해방은 미국에 의한 것이고, 정부 수립도 우리 힘으로 하지 못했으며, 6.25

전쟁도 우리 손으로 마무리 진게 아니었는데.. 무엇하나 우리 정치, 경제사에서 우

리 뜻과 우리 힘으로 이루어낸 것은 개인적으로는 모를까, 민족 단위에서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자신감, 우리는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딱 한가지 이룬게 있기는 하다. 60년대 부터의 경제발전..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그리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초유의 경제발

전.. 


79년 10.26 사태후 일본 아사히 신문 기자가 김대중에게 물었다. 

[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이라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

[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신념을 심어준 것입니다. ]

어쩌면 우리에게 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진실한 유산은 이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

다. 1000년간 흘러 내려온 우리 민족의 자기 비하.. 고조선, 고구려의 영광만을 움켜

쥐고 살아온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는것.. 우리는 '엽전'이 

아니라 우리도 무언가를 이룰 수 있고,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

었다는것.. 그리고 처음 구호는 요란하더라도 항상 흐지부지 끝나고 결실이 없었던 

우리 사회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무언가의 '결실'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 그리고 앞

으로도 노력하면 결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이 정신적인 변화.. 요 몇십년 사이에 일어난 우리 의식상의 이 변화.. 그것이 박정

희의 진정한 공적이 아닐까란 느낌이 들었다. 경제 발전이 박정희의 공적이 아니라, 

이 의식의 변화가 진실한 박정희의 유산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 셋.. 

지금도 我는 박정희의 가장 큰 업적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하면 된다]라는 

정신을 심어준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외국에게 항상 지배를 받는 빌빌대는 민족]

이라는 자괴심을 가지고 있는 당시의 우리 민족에게 [우리도 한가닥 한다]는 자부

심과 자긍심, 자신감을 가지게 해주었다는 점이 박정희의 가장 커다란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박정희의 가장 나쁜 유산도 바로 이 [하면 된다]라는 정신이 아닐까 한다. 

정책을 하는 사람들은 박정희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박정희처럼, 박

정희와 같은 업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듯 하다. 

박정희는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주장을 밀어붙였다. 지금 당장 사람

들이 반대를 해도 궁극적으로는 그 정책들이 국민을 좋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지금

은 사람들이 욕을 해도 후세의 역사에서는 옳았던 방향이었다고 평가되리라고 생각

했다. 그런 생각으로 자기의 정책을 온갖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다. 

그 결과로 지금의 성과가 이루어졌고, 대학생들의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

는 사람 1위가 박정희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뭔가 사회에 기여를 하고 싶어하는 선량하고 훌륭한 

정책담당자들은 박정희를 모델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그리고는 그쪽으로 밀어붙인다. 교육개혁도, 의료보험 개혁도 그

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은 사람들이 반대를 하고 불편하다 해도, 나중에는 좋게 

평가를 받으리라, 국민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리라고 믿고서는 밀어붙인다. 완전히 

박정희의 [하면 된다]는 정신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사람들에게 [하면 된다]는 정신을 심어주기는 했지만 본인 스스

로가 하면 된다는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일을 하지는 않았다. 박정희가 우

리 역사에게 주는 가장 큰 업적은 [하면 된다]라는 정신이지만, 我가 개인적으로 박

정희에게 가장 감복하는 것은 박정희의 일을 하는 방식이다. 박정희를 박정희이게 

하는 것은 일을 하는 스타일이다. 


이야기 넷..

*** 대통령, *** 대통령들의 지시사항은 보통 이렇다. 

[ 상호 협의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게 잘 해결하도록 하세요.. ] 

총리의 자서전, 장관의 글, 국회의장 등의 회고록 등을 보면, 대부분은 이런 식이

다. 

[ ---가 ---에 대한 보고를 했다. 만전을 기해서 잘하라고 지시를 했다..] 

[ 수해가 났다. 수해 장소를 시찰을 했다. 주민의 편의를 돌봐주고, 애로사항이 없도

록하라라고 지시를 했다. ] 

그리고 나중에 정책에 문제가 생기면, 자기는 잘 하라고,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를 

했는데도 아래 사람들이 그 지시에 따르지 못해서 잘못되었다는 식이다. 

박정희의 일하는 스타일의 가장 큰 특징은, 박정희는 절대로 부하관료들에게 [잘 

알아서 하세요..] 라는 식으로 맡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철저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그 정책을 실행하고 집행하는데 있어서의 모든 점을 챙겼다. 


1970년대에는 겨울나기가 크나큰 문제였다. 연탄, 석유가 겨울 동안 부족하지 않게 

공급되어야 하는게 큰 정책문제였다. 

보통의 대통령, 총리, 장관 아래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관료들은 자료를 준비한다. 이번 겨울 예상 수요량은 얼마고 석탄, 석유 공급량은 

얼마고.. 그리고는 대통령, 총리, 장관에게 보고를 한다. 그리고 대통령, 총리, 장관

들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 이번 겨울동안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잘 준비

하시오.. ]

박정희의 무시무시한 점은 그 세부 사항을 모두 챙긴다는 것이다. 광산에서 석탄 

공급은 얼마다. 그러면 그걸 서울로 이동하는데 필요한 철도는 원활한가. 서울에 와

서 보관할 수 있는 창고는 어떤가. 창고에서 각 동네로 이동시키는 트럭은 몇대인

가. 연탄집은 몇 개이고, 동네마다 잘 분포되어 있는가. 석탄이 모자라서 석유난로

를 공급해야 한다면, 석유 공급량은 충분한가. 석유가 더 들어와야 하는데, 인천의 

부두 시설은 괜찮은가. 유조선이 잘 운항되는가. 원유가 통관을 할 때 문제점은 없

는가. 파이프 라인은 아무 문제 없는가.. 

일반적인 대통령, 총리, 장관은 수해 현장에 가서 [ 잘 하세요.. ]라는 식으로 일을 

한다. 조금 훌륭한 사람이라면 지금 옷이 몇벌이 필요하고, 먹을 것이 얼마나 필요

한가를 챙기고 그것들을 주민들에게 공급하라고 지시를 한다. 박정희는 거기서 더 

나간다. 그 부근 군부대 등에 여유로 남아 있는 옷이 얼마나 되는지, 식량 사정이 

어떤가를 체크하고, 얼마나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옮길 수 있

는 인력과 트럭 사정이 어떤지까지 확인을 한다. 


박정희가 일하는 스타일은 그랬다. 그래서 노태우, 김영삼의 지시는 도무지 아래 

사람들에게 먹혀들지를 않았지만 박정희의 지시는 그대로 굴러갈 수가 있었다. 노

태우, 김영삼 체제에서는 [ 잘 하세요..] 라는 지시에 따라 옷과 식량을 준비했어도 

트럭이 없어서, 또는 트럭은 있지만 기름이 없어서 보급을 못하는 식의 사태가 자

주 일어났다.

집을 짓는데 설계도, 고급 시멘트, 목재, 목수, 미장이 등 완벽히 준비가 되었어도 

막상 대패가 없어서 집을 못짓는 사태..자재 준비는 다 되어 있어도 목수, 미장이에

게 점심을 주지 못해서 집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사태.. 점심을 호화찬란하게 준비를 

했어도 숟가락을 준비 못해서 집을 지을 수 없는 사태.. 그런 식으로 정책 담당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고, 그래서 정책이 제대로 굴러가지를 않는다. 

박정희의 정책은, 최소한 그런 일은 없었다. 정책의 세부 사항을 전부 직접 챙겼

다. 그리고 그게 진실한 지도자의 상일 것이다. [ 잘 하세요 ]라는 덕담은 길거리 

아무나 장관 자리에 앉혀 놓아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관료들이 보지 못하는 면을 

지적해서 정말로 정책이 문제없이 굴러가도록 만드는게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일 

것이고, 박정희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가 내세운 정책은 그대로 시행이 되었고, 원래의 정책 목표가 이루

어질 수 있었다. 최소한 박정희 시대의 정책에서는 [ 어.. 의약분업을 실시하면 항생

제 사용이 줄어들줄 알았는데 거의 줄어들지 않네요.. ] [ 의약분업을 실시하면 의

약비가 줄어들줄 알았는데 오히려 느네요..] [ 나이든 교원을 그만두게 하니까 선생

이 모자라는데요.. 이럴줄은 몰랐어요..] 라는 전개는 없었다. 


박정희가 정책 반대자들에게 그렇게 즉각적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할 수 있었던 것

도 독재 정권이라서 그랬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박정희는 그런 정책을 사용하면 

누구에게 해로움이 갈지를 이미 파악하고 있고, 반발이 일어날 것도 파악하고 있었

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정책을 시행해야 된다고 이미 결심을 하고 있었기에, 그

들이 반대하면 억압해서라도 이 정책은 해야겠다고 미리 결정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즉각적으로 진압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작년의 의사 파업처럼 [설마 의사들

이 파업까지 할까..] 하고 있다가 실제로 파업을 하니까 그때부터 대처 방안을 준비

하는 식으로 일을 했다면 그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야기 다섯.. 

노태우, 김영삼은 [잘 하세요..]라는 스타일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꼼꼼히 챙긴다

고 한다. 박정희 만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세부 사항을 스스로 챙긴다고 한

다. 그러면 김대중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의 차이는? 我가 박정희

에 대해서 가장 존경스러워 하는 부분이 여기서 나타난다. 박정희는 모든 것을 현

장에 직접 가서 확인을 했다. 


* -- 에게서 들은 에피소드.. 

황무지를 밭으로 개간을 했다. 박정희가 방문을 했다. 현장 책임자가 개간 상황을 

설명하고 --나무 씨를 심었다고 이야기했다. 박정희는 직접 호미를 들고 땅을 팠다. 

씨를 심었다고 하는데, 정말 씨가 심어져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고랑을 

다 파도 씨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책임자는 사실대로 말했다. [ 이랑까지는 만들었

지만 아직 씨는 심지 못했다.. ] 책임자는 옷을 벗었다. 


박정희의 무시무시한 점은, 관료들의 보고 사항에 대해서 전부 다 직접 현장에 가

서 확인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무연탄이 몇톤이 있다 라고 관료가 보고를 하면 얼

마 후 박정희는 직접 그 창고로 가서 창고 책임자에게 무연탄이 몇 톤이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창고 문을 열게 해서 자기 눈으로 얼마나 있는가를 확인을 

했다. 공사가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다는 보고를 받으면 정말로 그런지 공사 현장

에 내려가서 확인을 한다. -- 공장의 식당의 질이 개선되었다 보고를 들으면 직접 

그 공장, 그 식당에서 밥을 먹어본다. 

이런 박정희의 행태에 의해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박정희는 관료들에 의

해서 휘둘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관료들의 보고가 진실이라고 절대 믿지 않았다. 옆

에서 하는 사람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았다.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 하고 불

리한 말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현장에 직접 가서 

실제는 어떤가를 직접 확인을 했다. 그렇게 항상 확인을 하다보니, 박정희 시대의 

관료들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자기에게 불리한 보고라도 일단은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해야했다. 


* 거지왕 김찬삼의 이야기..

거지들을 모아서 개척단을 만들었다.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자치 마을을 만들었다. 

그런데 보건사회부 국장이 이 마을을 자활단 (당시 깡패들을 모아 자립 마을을 만

든 것. 깡패 교화사업의 일환) 으로 등록을 시켰다. 자활단은 그 국장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박정희가 그 자활단을 방문을 했다. 국장은 이 마을이 거지들의 자치마을

이 아니라 자활단이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박정희는 거지들에게 연설을 했다. 

[여러분이 깡패에서 벗어나 이런 마을을 만든 것은..] 그런데 주민들의 태도가 이상

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간부들을 추궁했다. 결국 그 

마을이 자활단이 아니라 거지들의 자치마을인 것이 들통이 났다. 


2000년 의약분업 사태에서, 박정희였다면 관료들이 [의사들의 반발이 조금 있겠지

만 결국은 따라올 것입니다.] 라는 말에 아.. 그런가보다 하지않았을 것이다. 의사들

의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의사들에게 물어보고 다녔을 것이다. [의약분업으로 

인해서 국민들에게 불편한 점은 없을 것입니다.]라는 보고에 아.. 그런가보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불편한 점이 없는지 직접 병원과 약국을 돌아다녀보았을 것이

다. 그래보아서 문제점이 있다면 [의사들의 보전책을 마련하라] [이점을 보완하라]

라고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의사들의 불만과 의약분업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의약분업을 시행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면, 그랬다면 의사들이 파

업했을 때 몽둥이로 패고 집어넣고 하면서 의약분업을 강제했을거다. 


이야기 여섯.. 

김영삼이 IMF를 회고하면서.. 

[ IMF 사태가 나기전, 10월과 11월 위기 상황에서 나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을 만

났다. 사회지도급 인사들, 기업 최고경영자들을 매일 밤 만나서 의견을 들었다. 그

러나 아무도 IMF가 온다고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


박정희의 또 하나 멋있는 점은, 어디를 방문하던지 그곳 책임자, 사장, 공장장들의 

보고만 듣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직접 노동자와 대화했고, 공장 직원들과도 이야기

했고, 농부들과도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청와대 비서, 장관들이 어느 공장의 임금은 얼마라고 보고한다. 그러면 몇 달 후 

박정희는 그 공장을 방문해서 사장, 공장장에게 이 공장은 임금이 얼마인가라고 질

문을 한다. 이렇게 질문을 하리란걸 비서는 알고 있고, 그래서 미리 공장장에게 얼

마로 대답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소용없었다. 박정희는 공장

을 시찰하면서 월급이 얼마냐고 직원들에게 직접 물었다. 

박정희는 경호실, 비서실이 정해주는 루트에 따라서 시찰하고 사람을 만나고 그러

지는 않았다. [ 이근처에 --공장이 있었지. 거기에 가보자.. ] 라고 직접 지시하는 

일이 많았고, 경호차량들이 박정희가 도중에 어디로 샜는지 몰라서 헤메기 일쑤였

다. 어느 관청이든, 어느 공장이든 박정희가 불쑥 들어와서 시찰을 하고, 또 일반 

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가고.. 건축 노동자들이 밥을 먹는 함박집에 가서 밥을 

먹고 인부들과 애로 사항이 있는지 이야기하고.. 박정희는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대통령과 그런 자리에서 직접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박정희 팬이 될 수밖에 없었

다. 중앙부처 과장이 내려와도 공장장, 사장하고만 이야기하고 고급 음식점에서 밥

먹고 자기들은 얼굴도 안보고 도로 올라가는데, 대통령이 자기들하고 같이 밥먹고. 

막걸리를 마시고, 자기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반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김영삼.. [ IMF 사태가 나기전, 10월과 11월 위기 상황에서 나는 정말로 많은 사람

들을 만났다. 사회지도급 인사들, 기업 최고경영자들을 매일 밤 만나서 의견을 들었

다. 그러나 아무도 IMF가 온다고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

김영삼의 문제점은 분명하다. 사회지도급과만 이야기를 했으니 실제로 일이 어떻

게 돌아가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당시 금융기관의 실무자들, 재경원 실무자들은 사

태를 알고 있었다. 환율이 급박하게 올라가는 사태에서 김영삼은 사회지도급, 기업 

최고경영자와만 이야기했다. 환율 사태에서는 환율을 직접 다루는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는 것이지, 종교지도자, 사회단체 지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상황을 파악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열심히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정희라면 청와대에 앉아서 사회

지도급 인사들을 오라고 해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다. 직접 은행 딜러실

을 방문하고, 외환 딜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이 문제인가를 묻는 것이 박정희 

스타일이다. 


이야기 일곱..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전에서 문세창이가 박정희에게 총을 쏘다. 육영수 여사

가 사망했다. 생방송으로 그 장면이 전국에 중계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육영수 여사

를 병원으로 실어가고 장내 정리가 되었을 때 박정희는 평소 그대로의 표정으로 말

했다. 

[연설을 계속하겠습니다.. ] 

그리고서는 박정희는 연설을 계속 했다. 


* 전두환의 이야기.. 

[ 대통령이 되고 기념식을 나갔다. 그런데 무서웠다. 식단에만 조명이 비치고 객석

은 어두웠다. 누가 뭘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어디서 총알이 튀어 나올지 알 수 없

었고, 누가 총을 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박정희는 이런 기념식마다 모두 참석했으

니 대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기념식은 꼭 나가야만 하는 데만 나

갔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암살 가능성이 컸던 대통령은 아마도 박정희와 전두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은 경호상의 문제로 기념식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고, 경호

원들의 완벽한 보호 없이는 공개된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노태우 이후의 대통령은 

암살 위험성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 같지만 하여튼 공개된 장소에는 거의 나가지

는 않은 것 같다. 설사 공개된 장소에 나간다 하더라도 대통령이 방문하기 전 거의 

한달전부터 경호실이 와서 조사하고 검사하고 그렇게 준비를 한 다음에 대통령이 

온다. 

그러나 박정희 때 경호실에서는 경호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다. 독재자로 찍혀있는 

박정희, 민주투사들이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박정희였는데도 박정희는 모든 기념식

에 참석하여 직접 축사를 읽었고, 댐, 도로, 공장 개통식마다 쫓아다녔고, 고속도로 

진척상황을 보기 위해서 시도때도 없이 전국을 돌아다녔다. 미리 경호실이 조사하

고 검토한 곳만 돌아다녔나? 아니다. 박정희는 그런 식으로 관료 체제에 휘둘리지 

않았다. 공식적인 행사는 미리부터 행로가 정해졌지만, 많은 경우 박정희의 순간적

인 선택에 따라 돌아다녔다. 비서 한명, 운전수 한명 데리고 돌아다닌 경우도 많다. 


전두환이 [ 무서워서 그런 자리에 서지 않았다 ] 라는 말은 얼마나 웃긴 말일까. 

박정희는 그런 자리에서 마누라를 잃었으면서도 계속 그런 자리에 섰다. 경호실이 

극렬하게 반대했음에도 계속 그 자리에 섰다. 

농민대표가 청와대에서 예정에 없는 발언을 했다고 해서 경호실원에게 내쫓겼다는 

말은 얼마나 웃긴 말일까. 박정희는 경호실을 따돌리고 농민의 이야기를 들으러 갔

다. 


1974년 8월 15일 기념식장에서 총소리에 놀라 장관들이 숨고 도망간 장면은 걸작

이었다. 육영수 여사는 총소리에 불구하고 그대로 의연히 앉아 있다가 총맞아 죽었

다. 박정희도 끝까지 연단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소란이 끝난 후에 [연설을 

계속하겠습니다 ] 라면서 연설을 계속 했다. 이 모든 장면이 생방송으로 전국에 방

송되었었다. 이 장면에 박정희는 역시 대통령이라고 감복한 사람이 많았던거 같다. 

我는 박정희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이후의 대통령과 비교해보면, 무서워

서 공개된 자리에 서지 못하는 대통령들, 경호원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청와대 밖을 

나가지 않는 대통령들, 비서들이 만나라고 하는 사람들만 만나고 대화 내용까지도 

미리 정해진 대로 읊어대는 대통령들 보다는 암만해도 박정희가 제일 나아보인다. 

자신을 독재자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아무 두려움 없이 돌아다녔

던 그 담력만 쳐도 박정희는 다른 대통령보다 훨씬 대통령감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야기 여덟.. 마치는 글.. 

我는 원래 박정희의 그런 행동 - 인부들하고 막걸리 마시고, 모내기 하고 추수하

러 가고, 나무 심는 행동을 쇼라고 생각했었다. 인심 획득책이라고 보았고, 또 관련

되는 공무원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면 그리 좋아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몇 년전 경부고속전철 부실 공사건을 대하게 되다. 김영삼은 경부고속전

철 시공자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이후 경부고속전철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다. 공

사 현장에 한번도 온적도 없다. 상념.. 만약 박정희라면 어땠을까. 박정희는 경부고

속도로, 댐, 각종 건설 현장을 계속해서 방문하고 확인했다. 박정희 시대였다면 경

부고속전철과 같은 부실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계속 대통령이 찾아와서 두드리고 

돌아다니는데 그런 식으로 부실공사를 할 수 있었을까. 직접 현장을 찾는 박정희 

업무 스타일을 처음으로 긍정적으로 보게된 사건이었다. 

물론 경부고속도로도 부실이었다. 하지만 박정희가 목표로 했던 것은 기간내 완성

이었다. 그 다음에 고장나면 계속 보완한다는 생각으로 일단은 빠른 시간내에 개통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我는 박정희를 비판을 했다. [좀 1년 더 여유를 두었다면 

완전한 고속도로가 되었을텐데, 너무 빨리 개통만 할려고 하다가 부실이 되었다.] 


그 다음 대통령들이 그런 식으로 바르게 일을 했다면 박정희가 잘못되었다고 욕을 

계속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대통령들은 기간안에 공사를 완성하지

도 못하고 부실은 부실대로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박정희가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박정희는 그래도 기간안에 공사는 완성하게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부실이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공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결국은 완성도 못하고 부실만 키운 김영삼 시절보다는 박정희가 훨씬 나았다. 

박정희가 현장을 직접 찾아 다니는 것은 나름대로 커다란 의미가 있었던 일이었던 

것 같다. 모내기 하고, 추수하고, 농부들하고 막걸리 마시고.. 이건 쇼다.. 그러나 보

통 사람들하고는 전혀 접촉하지 않는 그 이후의 대통령들보다는 차라리 쇼라고 하

더라도 농민들하고 어울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던 박정희가 더 낫지 않는가. 


박정희는 독재자였다. 명령하고 지시하고 말을 안들으면 잡아 가두었다. 정치 면에

서는 분명 그런 식으로 일을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책-경제,사회 정책에서는 그

런 식으로 일하지 않았다. 정책 결정, 집행에 있어서의 문제될 수 있는 점을 모두 

살펴보고 그리고서는 정책을 실행했다. 그리고 실제 현장을 계속 방문하면서 실제 

정책이 어떻게 굴러가는가를 계속 점검했다. 

사람들은 박정희를 개발독재자라고 한다. 박정희가 독재자로서 [ 공장을 세워라. 

안세우면 잡아가둔다. ] [ 초가지붕을 바꿔라. 안바꾸면 족친다. ] 모 이런 식으로 

일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사회를 개혁해 보려는 많은 선의를 가

지고 있는 정책담당자들은, 비록 당시에는 미움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업적을 인정

받는 박정희를 사모하는 많은 정책담당자들은 [ 의약분업을 하겠다. 말 안들으면 고

발한다 ] [ 교사수 늘리겠다. 반발하면 징계한다 ] 라는 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런 식으로 일을 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그런 식으로 행동

했지만, 실질적으로 국민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계획할 때 그런 식으로 하

지는 않았다. 정말로 박정희에게 배워야 할 것은 [하면 된다]라는 정신이 아니라 박

정희의 일을 하는 방식이다. 박정희를 흉내내기 위해서는 밀어붙이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밀어붙이기 전에 모든 면을 검토하고, 현장을 직접 확인하면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는 일하는 방식이다. 인부, 자재, 허가서가 다 구

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 집지을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인부가 먹을 밥

이 있는지, 숟가락 젓가락이 있는지, 자재를 운반할 트럭이 있는지, 운반 트럭의 기

름, 오일이 얼마나 남았는지, 운반트럭의 타이어 수명은 언제인지까지를 검토하는 

세심함이다. 그리고 직접 숟가락, 젓가락을 세어보고, 타이어를 살펴보는 현장감이

다. 그러한 세심함과 현장감이 없이 박정희를 닮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원숭이 흉

내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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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 대한 안 좋은 의견이 많았죠

박정희같은 독재정치가는 시대가 흐를수록 욕을 먹고 평가 절하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 합니다


민주주의를 퇴보시키고...쿠테타 등등 말이죠...



하지만 굶어보지 못한 사람은 보리고개가 없어졌다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이라는 점을..

얼마나 대단한 걸음 이었는지 모르겠지요..



한 인물에 대해 너무 편협하게 욕으로 흐르는게 안타까와서 올려봅니다

그냥 박정희에게 이런 면도 있었군 하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반박을 할꺼면 딴지를 걸꺼면 미화했다는 말을 하실꺼면

다른 글을 써주시면 되지않습니까..여기 거짓말이 적힌글도 아니구요



시사게시판이 있는줄 몰라서 자게에 올렸습니다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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