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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비잔티움 제국사 (6) - 로마 VS 페르시아 I
게시물ID : history_72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3
조회수 : 58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1/16 17:32:37

http://cafe.daum.net/shogun의 마법의활 님이 쓰신 글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누군가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에게 멸망당한 후 사라진, 페르시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의 방대한 영토는 일단 알렉산드로스에게 멸망당한 후 그 부하 장군들에 의해

분할되었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그림자가 그것으로 그대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르티아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나타나는 고대 페르시아의

진정한 후계자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였습니다.

파르티아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는 상당히 흥미로운 관계였습니다. 우선 파르티아 인들의

종족 계열은 아케메네스조와 같은 이란 계 부족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된 근거지는 오늘날의 이란 지역이 아닌, 훨씬 더 북쪽에 있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 시절에는 분명 그 일부이긴 하였으나 주류급이 되는 유는 아니었습니다.

좀 억측일지는 모르되, 고구려와 발해의 관계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발해의 속말 말갈도 분명 고구려의 주류는 아니었던 비주류 부여계였던 것처럼.

하지만 역시 고구려 - 발해와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 파르티아의 체제는 고대 페르시아의

그것과는 상당히 상이했기 때문입니다. 파르티아는 여러 곳의 영지를 가진 자들이 저마다 "왕"을 자칭했고, 일명 파르티아 왕이란 자는 그 왕들중의 대표자에 불과했습니다 .

파르티아 왕은 스스로 페르시아의 후계자를 가끔은 자처한 모양이고, 로마 제국마저도

그렇게 생각은 해주었던 것같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파르티아 내부에.

파르티아가 약해졌을 무렵, 파르티아 내부의 여러 "왕"들 중 드디어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가

일어섰던 그 지역의 "왕"중 하나가 파르티아 지역을 재통일합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오랫동안 잊혀졌던 이름이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페르시아." 근 오백년을 넘어 돌아온 이름이던가?

이 돌아온 페르시아는 복귀전의 상대로, 예전에 자신을 넘어뜨린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을

다시 처없앤 로마를 골랐습니다. 로마 VS 페르시아.

지중해의 양대 보편 제국은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여러번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결과는 얻어지는 게 하나 없는 소모전이었습니다만. 이래서 이념이란 게 여러 나라를 망친다고

하는 건가 봅니다.)

근데 주로 패턴이란게, 전투는 로마가 다 이겨놓고 전쟁은 정작 페르시아가 이기는

기괴한 패턴이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페르시아 측의 외교술이나 정치술이

뛰어났다는 얘기도 되겠습니다.

첫 A 매치는 페르시아의 승리!

그 유능한 군인 황제 카라칼라를 상대로 얻어낸 승리였는데, 꽤나 화려한 데뷔였습니다.

그 다음 대결에선 페르시아가 졌습니다. 의외로 지휘관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 대결에선 또 페르시아가 이깁니다.

전투에서는 로마가 이겨놓고, 전쟁에선 페르시아가 이기는 희한한 패턴이었습니다.

티메시테우스 -> 고르디아누스 3세 ->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지휘관이었지요.

그 다음...또다시 페르시아의 승리.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고, 이 충격으로 로마는 세 조각으로 깨져버립니다.

페르시아로써는 기고만장해도 될 일이었으나, 페르시아는 그간의 승리에서는 달리

이 승리에서는 열매를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영웅 오데나투스에게 역습을 당해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은 성과를 죄다 토해내야했기

때문입니다. 정작 그 열매는 제노비아 아줌마가 다 먹어버렸지요. (누구를 위해 충성하는가. -_-)

여튼 페르시아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에게 연승을 거두었노라 자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랜만의 페르시아 패배.

지휘관은 카루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였습니다. 카루스는 벼락에 맞아죽어 페르시아에 좀 유리해지나 싶었으나, 이때의 로마는 지휘관의 유고에도 불구하고 승리로 얻은 성과를 하나도 토해내지 않고 지킬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카루스를 대체한 지휘관이 다름아닌, 행보관 출신 정치 기계 디오클레티아누스였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의 술수는 행보관 생활만 거의 20년넘게 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는 제대로 통하질 않았습니다.

하지만...아직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페르시아는 과거 키루스 대왕의 영토였던 아나톨리아와 이집트로 진출하기는 커녕,

원래부터 영토였던 메소포타미아도 유지못하는 망신을 얼른 끝내야했습니다.

반면 로마는 아직도 발레리아누스가 잡혔던 치욕을 설욕하지 못했고, 전적도 아직껏 2승 3패였습니다.

로마와 페르시아의 재대결은 결국 다시 이루어질 예정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늘 방어하는 입장이었던 페르시아가 공격에 나섰습니다.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로마가 이기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신바람이 나시는 시오노 나나미의

생략 신공 13권에서, 이 장면은 더할 나위없이 자세하게 잘 나와있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갈레리우스가 처음에는 좀 고전했지만, 두번째에는 고트족 기병대를 이용한

야습도 한몫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이 싸움에서 국왕의 처자식을 모두 사로잡히는 개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페르시아는 어쩌는 수 없이,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정식으로 뱉을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이 패배로 인해 페르시아는 훗날 로마가 큰 내전에 빠졌을 때조차도 아르메니아 - 아나톨리아로

진출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로마로써는 숙원이었던, 설욕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적도 3승 3패로 균형을 맞추게 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주목해볼만한 양상이 있습니다.

양대 국가의 전투가, "서로 똑같은 놈들끼리 싸우는 전투"로 변해갔다는, 그것이었죠.

중무장한 군단병을 중무장한 페르시아 중장 기병이 그대로 파쇄해서 대열을 부수어 학살을

자행하던가, 아니면 중무장한 군단병이 동료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텨 기동력과 파괴력을

잃은 페르시아 중장 기병의 몸뚱아리를 주인과 말 전부 사지를 해체하던지, 양자 택일이었던

양상은 이 시대에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로마 측도 중장 기병대와 기마 궁수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로마는 복합 병종의 운용이라고 해서 고트족이나 갈리아 병사들도 적극적으로 전투에

운용을 합니다. 그러니 페르시아가 진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

그 전투에서 유난히 두각을 발휘했던 젊은 애송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물론 스타이자 주연 배우는 단연코 갈레리우스였습니다만, 그 전쟁에서는 그저 따까리 노릇 좀 잘하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이 애송이가 나중에 거대한 주연급 배우가 되리라고는 이당시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나중, 아니, 얼마 안 되어서 그를 다시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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