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여자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관계가 모호한 여자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애인이라고 하긴 약하고, 사회 통념상 친구라 하긴 좀 지나친 그런 여자가 한 명 있다.
난 술친구가 없을 때 그녀를 부르고, 그녀는 함께 밥 먹을 사람이 없을 때 날 만난다. 뭐, 그렇게 만나서 밥 먹고, 시간이 나면 영화도 보고, 늦게 술 한잔하는... 대충 그림을 그리자면 그렇다.
어제도 그랬다. 만나서 저녁 먹고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모호한 관계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혼기가 찼니, 세월이니 네월이니....
소주병이 비워 갈수록 눈이 서서히 풀린 그녀가 또 술을 시키려 하자 난 그녀의 손을 잡고 말렸더랬다. 근데, 이 녀석 손이 참 따뜻하더라. 백열등의 주황빛 조명 탓인지 조금은 멍한 눈빛도 예전하고는 달라 보였다. 그렇게 풀린 눈으로 몇 초간 날 바라보던 그녀와 형용할 수 없는 뭔가 야릇한 느낌이 오갔다. 뭐, 다 성인이니 어떤 느낌인지는 말 안 해도 알 터, 그녀는 급히 지갑에서 돈을 꺼내 계산을 하곤,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난 그녀에게 이끌렸다. 아니, 어쩌면 말리기 싫었을지도 모르지.
앞서 뛰던 그녀의 머리칼이 내 코를 때릴 때쯤, 우린 포장마차 뒷골목에 도착했다. 조용한 새벽의 낯선 골목에서 거친 숨만 내뱉으며 다시 오간 몇 초간의 눈빛.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고, 아마 나도 흔들렸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낮은 슬레이트 지붕이 있는 담벼락에 날 밀쳤다.
참, 슬레이트 지붕 알지? 파도 모양처럼 구불구불한 얇은 판. 예전에 우리 집도 슬레이트 지붕 단칸방에 살았는데, 거기 한 지붕에 7가구가 모여 살았거든. 집에서 TV 보다가 "개똥아~ 놀~자~" 하면, 건넛집 개똥이가 "밥 묵고 있따!!!" 라며 대답하곤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