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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판 매트릭스
게시물ID : sisa_4441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수꼴브레이커
추천 : 10
조회수 : 603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3/10/07 00:57:07
● 사이토 총독 거사도모…‘삼판동 새벽 총격전’

날이 갈수록 우리 민족을 학대하는 그 모습들이 거칠고 심해져가는 일경을 향해, 김상옥의사와 동지들은 이제는 평화적 독립운동이 아닌, 그에 상응하는 무력으로 그들과 겨뤄 자유를 찾아야 함을 재차 확인한다. 

김상옥의사는 김한(金翰), 전우진(全宇鎭), 윤익중(尹益重), 서대순(徐大淳), 정설교(鄭卨敎), 신화수(申華秀), 이혜수(李惠受) 등의 동지들과 거사를 의논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첫째는 ‘사이토 총독’을 비롯하여 일제하의 고관을 저격하고, 일경에 反민족 행위를 하는 자를 숙청하기로 결정한다. 

둘째는, 총독부 및 관공서 폭파를 이루고, 셋째는, 행동대원을 모아 조직적 훈련을 통해 전국으로 항일 운동을 전재하자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1월 17일에 동경에서 열리는 국회에 참석하고자 서울역을 떠나는 ‘사이토 총독’을 저격 하려는 계획을 세운 김상옥 의사는 일본 순사로 변장하고 서울역에 나가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거사를 실천으로 옮기려는 날 새벽, 은신처가 일본 경찰에 탐지되면서 단신으로 일경과 맞선 총격전을 벌린다. 

그날은 종로경찰서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5일째 새벽이었다. 삼판동 고봉근의 집을 종로경찰서의 형사 15명이 겹겹이 포위하고 담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왔다. 

그때 잠을 자던 김상옥 의사는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다무라 형사를 비롯해 연달아 여러 명을 쓰러뜨리며, 신조차도 신지 못한 채 눈 쌓인 남산으로 달아나야 했다. 

눈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아 그는 절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장충단 개울(現 성동구 행당동)다리를 넘어 안장사(安靜寺, 재개발로 인해 양평으로 이전) 도착하고, 일경은 남산을 포위하고 이를 잡듯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날의 동아일보 호외는 ‘설중(雪中)의 남산포위(南山包圍)’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즉시 각 경찰서 정복 순사 1천여 명을 풀어 그가 도망한 남산을 나는 새도 빠지지 못하게 에워싸고 눈 쌓인 남산 전부를 수색하고, 일본 수 백명 경관은 왕십리(往十里) 일대와 지금의 서울운동장 일원인 광회정(光熙町)을 수색하며 기마 순사가 총검을 번쩍이며 삼판통(三坂通) 일대를(現 후암동 부근) 경계하니 실로 서울시내 일대는 전시 상태와 같았으며 김상옥의 누이동생과 매제 고봉근과 그 친족까지 전부 경기도 경찰부로 인치했다.”

일본 경찰이 눈 위의 그의 발자국을 주목하여 따라 추적했는데, 놀라운 것은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가 5미터 혹은 10미터의 간격으로 벌어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후일 ‘김상옥이 축지법(縮地法)을 썼다’는 말이 장안에 퍼진 원인이 되었다.

안장사에 들어선 김상옥의사는 아침밥을 짓고 있는 동승(童僧, 아기동자)에게서 설익은 밥을 얻어먹고, 주지 김봉암(金峰岩) 스님에게 승복을 얻어 입고 여승의 모자를 쓰고 집신을 거꾸로 신고 급히 산길을 내려와, 왕십리에 한문을 가르쳐주던 이노인 댁에 들러 버선과 신을 갈아 신었다. 

그는 시주하는 스님의 모습으로, 마침 나무를 싣고 가는 마차를 의지하여 일경의 삼엄한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효제동 73번지에 사는 반가운 동지 이혜수의 집에 들어선다. 

여성 신분의 이혜수는 애국부인 단원들과 함께 독립자금을 모아 김상옥을 통해 상해로 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동상이 걸린 김상옥을 위해 약을 사오기도 하고, 일경에게 쫒길 때 장충단 공원 돌다리 밑에 묻어둔 권총 두 자루를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다 주었다.

한편, 장충단 공원 부근에서 발자국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일경은 동대문 부근을 뒤지며 김상옥의 원근 친족들을 가리지 않고 끌어다 심한 고문을 하며 수색망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1923년 1월 21일 정오쯤 동대문 경찰서 형사 무리가 동지 전우진을 체포하여,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인 ‘미와(三輪), 요시노(吉野)’가 직접 고문하도록 하였다. 우체부인 그가 상해에서 김상옥 앞으로 온 비밀편지를 배달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밤 8시부터 시작된 고문은 매를 비롯한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행해졌으며, 이를 견디다 못해 전우진은 김상옥의 은신처를 고백한다. 후일 김상옥의사 서거 후, 미와 형사는 김의사의 두려움을 모르는 남자다운 기백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존경을 표하며 무릎을 꿇고 울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런 일을 모르는 김상옥의사는 그날 밤 정설교(鄭卨敎) 등 몇 사람의 동지들을 모아 이혜수와 함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의논했다. 동지들은 그에게 상해로 피신하기를 바랬으나, 그는 이왕 입국한 이상 목숨을 걸고 중대 계획을 실천으로 옮길 뜻을 주장하였다.

1월 22일 아직 날이 밝기 전 새벽 3시였다. 효제동 73번지 이혜수의 집에 김상옥이 숨어 있음을 확인 한 일본 경찰은, 서울 4대(동대문, 종로, 서대문, 본정) 경찰서에 비상소집령을 내려 이혜수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채소밭 속에 섬과 같이 5~6채만이 있는 서 있는 새로 건축된 집이었다. 김상옥 1명을 잡기 위해 철통같은 경계 진을 배치했는데, 제1진은 권총을 가진 형사대가, 제2진에는 장총을 든 집총대가, 제 3진에는 기마 순사대, 제4진에는 헌병대와 자동차대의 순서로 배치해서 겹겹이 둘러쌌다. 

이때 동원된 경찰의 총 수효는 1천여 명이었고, 그 중 근접 포위에는 5백명이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치 전쟁 1선에서 적의 대부대를 포위하고 일대 접전을 전개하려는 순간처럼 긴장된 태세를 신속하게 기민하게 갖추었다.

새벽 5시가 되어 일어난 이혜수의 동생 이창규의 눈에는 새까맣게 둘러싼 일경이 눈에 보이자 놀라며 누나를 깨운다. 이혜수는 김상옥의사를 깨우며, “김동지! 경찰들이 몰려왔어! 어서 피하시오!” 

이혜수의 부친 이태성 노인이 밖에 나가자, 형사들은 노인의 빰을 갈기고 발길질을 하며 그를 포승으로 묶었다. 삼판통의 비호같은 김상옥을 기억하며 덜덜 떨면서 방문을 발로 차고 들어간 ‘구리다(栗田)’ 형사는 김상옥의 탄환에 그대로 쓰러졌다. 

뒤따르던 일본 앞잡이 형사 김창호 등 형사대는 마당으로 소리지르며 나동그라진다. 이때 일경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니, 효제동 일대는 그야말로 전쟁을 방불케 했다. 김상옥의사의 사격술은 백발백중이었다. 그는 벽을 뚫고 담을 뛰어넘어 비호같이 여러 집을 넘나들며 여러 명을 쓰러뜨리는데, 문자 그대로 일기당천(-騎當千)의 단병접전(單兵接戰)이었다. 

비호같은 그의 몸놀림과 총격 술에 일경은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김상옥과 3시간 이상의 총격전을 벌였고, 16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옆집으로 담을 넘을 때 동상으로 발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이 김의사 사후 5일이 지나 현장검증에서 발견되었다. 옆집에 들어간 김의사는 주인에게 이불을 한 채 달라고 했다. 이는 몸을 피해가며 싸울 방패로 삼고자 했었다. 그러자 주인은 이불대신 “도둑이요!”라며 고함을 치자, 그 집으로 피신한 것을 모른 일경들이 그리로 몰려왔다. 

“긴소오교꾸 잇삐끼니 곤나니 마욧데 도오스루까?(김상옥 하나에 이렇게 쩔쩔매서야 어떻게 하나?” 하며 분개하는 부지휘관 ‘후지모도’의 무차별 난사 지휘아래 일경의 총은 불을 뿜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김상옥은 심한 총격전으로 이제는 탄환이 단 한발밖에 남지 않음을 알았다. 그의 몸에는 여기저기 탄환이 박혀 있었고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몸에 박힌 총알만 10발이었다.

그는 34년의 생애를 짧은 생애를 원한도 풀지 못하고 마쳐야 하는 슬픈 생각에 잠겼다. 나라를 잃은 설움의 시절, 가난했던 소년시절, 효도도 제대로 못해드리고 자신 때문에 고문만 당하신 어머니, 독립의 큰 뜻을 품은 남편을 두어 항상 불행했던 아내,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일본 경찰의 폭행과 두려움 속에서 병들며 자라는 아들과 딸 등등. 

“아버지, 가지마세요!” 라고 울며 붙잡는 어린 남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 것은 ‘일본의 만행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싸워 독립을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편안하게 사업이나 일으키며 남들보다 잘 살수도 있었지만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고 가족도 없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젊음과 목숨을 나라에 바친 그는, 자신을 책망하지 않았다.

김상옥의사는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거룩한 몸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끝까지 우리 민족의 위대한 혼을 보여주고 싶었다. 김상옥의사는 눈을 감았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에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아! 그는 나라의 독립과 조국의 운명을 신에게 맡기며 자신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상해를 떠나오면서 동지들에게 유언한 것처럼 장렬히 자결한 것이다. 

숨이 끊진 후에도 그의 두 손은 쌍권총을 잡고 있었으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에 일경은 무서워 접근하지 못했다. 이문동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된 그의 장례식에는, 몽둥이와 총으로 무장한 삼엄한 경찰 때문에 조객이 없어 쓸쓸했지만 저녁 무렵 일경의 눈을 피해 찾아온 수명의 학생들이 호곡(號哭)하며 그의 영혼을 위로했었다. 


는 김상옥의사 혼자서 일본군 16명죽임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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