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당의 고수, 밀당 아티스트 친구 L군 이야기입니다.
* 제 이야기 아닙니다. 설마..L군의 이야기를 듣고 가공해서 쓴 글입니다.
L군과 내가 비슷한 시기 제대했을 때 우리는 심심했다. 그래서 찾은 취미는 바로 PC통신, 지금처럼 인터넷망도 아닌 전화기에 모뎀을 연결해서
쓰던 그 시절 우리는 부모님이 잠든 새벽이 되면 미친 듯이 영퀴(영화퀴즈)를 즐겼다. 입대 전 영화동아리에서 영화 꽤 봤다는 L군은 항상 맞추기
힘든 제삼세계 국가의 제목도 부르기 힘든 예술영화 (영구 아트무비 할 때 그런 아트무비는 절대 아니다.)를 문제를 출제해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익숙한 영퀴방의 아마추어 선수들을 괴롭혔다.
한동안 영퀴방의 끝판왕으로 군림하던 L군에게 강력한 라이벌같은 존재가 등장했다. L군에게 그의 존재는 고질라의 라이벌인 메카 고질라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둘은 영퀴방을 일반인들이 평소 듣도보도 못한 영화 제목들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둘은 아름다운 예술 승부를 가리던 중 메카 고질라 아니 라이벌은 L군에게 자신의 PC통신 영화 모임에 한 번 나올 생각이 없냐고
제안했다. 나는 L군에게 이런 모임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나갔다가 원양어선 탄 사람도 있고 장기를 적출당했다는 이야기를 PC통신에서 본 적이
있다며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기 전까지 절대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L군은 채팅으로 라이벌의 핸드폰 번호를 집요하게 캐내려 했는데 뜻밖에도 순순히 라이벌은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공개했다.
번호를 받고 잠시 L군은 문자 보낼까? 전화 할까? 고민하다 결국 남자끼리 닭살돋게 무슨 문자질이야 하며 과감히 번호를 눌렀다.
여자였다. 그리고 목소리조차 L군의 이상형인 줄리엣 비노쉬 같았다. L군은 그녀와 통화를 마친 뒤 흥분해서 내게 전화했다.
"여자다! 여자 사람이다! female! 더블 엑스 염색체다!!"
"여자라고? 음성변조 아니야? 만일 여자라면 원양어선 맞네.. 나가지 마!"
나는 PC통신으로 그 당시 흔하디흔한 번개 한번 해본 적이 없는데 나보다 채팅 실력도 떨어지고 비둘기 타법의 L군이 나보다 먼저 여자와
번개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모에 대한 아니 그녀를 만나보고 싶은 L군의 의지는 결코 꺾을 수 없었다. 결국 L군은 호신용으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합의한 뒤 우리는 그 정모에 나갔다. 그녀는 그 모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수뇌부 같았다. 우리를 사람들에게
소개해줬고 L군과 그녀는 자연스럽게 마치 오래된 친구가 만난 것 처럼 술을 주고받으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둘에게 버림받고
어떤 아저씨에게 미장센에 대한 강의를 2시간 동안 듣다 집에 돌아왔다.
그 뒤 L군과 그녀는 영화 접속의 한석규, 전도연처럼 피카디리 극장에서 만나 함께 영화를 보고 종로 3가 보석상 앞에서 열띤 영화 토론을 벌였다.
영화 모임을 지속하고 둘만의 영화 번개를 몇 번 한 뒤 둘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모임에서 그 둘은 자연스럽게 커플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영화 모임이 있던 운명의 그 날 자연스럽게 영화 모임 일원이 되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L군과 참석한 나는 또다시 어떤 아저씨에게
이번에는 롱테이크 기법에 대해 2시간 동안 강의를 들었고, L군은 오직 그녀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평소 술이 세 보이던 그녀가 그날은 술이 잘 받지 않았는지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L군에게 그녀를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다.
L군은 마지못해 그녀를 데려다주기 위해 혜화동 길을 나섰다. 그녀의 집은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의 돈암동이었고 둘은 자연스럽게 영화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걸었다. 그때 둘의 대화 주제는 레오 까락스 영화 중 최고의 작품은 무엇인가? 였고 L군이 당연히 "나쁜 피"라고 했을 때 그녀는 "소년
소녀를 만나다" 가 당연히 최고의 작품이라면서 또다시 영화에 대한 논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논쟁은 그녀의 집 앞에 왔을 때도 그치지 않았다.
L군은 나머지 이야기는 전화로 하자며 돌아서려는 찰나 그녀가 L군에게...
"오빠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소주 한 잔 더 하면서 이야기할래?.."
"안 돼! 시간도 너무 늦었고, 너희 부모님 일어나시면 어떡해!"
"괜찮아. 말하지 않았나 본데 나 자취해."
'자취' 라는 말에 L군은 '그럼 밤새도록 그녀와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라며 속으로 흥분했다.
"그래? 그럼 장소는 네가 제공하는 것이니까 술은 내가 사지.."
L군은 소주 2병과 컵라면 새우깡을 들고 그녀의 자취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여자 혼자 사는 자취방에 대한 환상보다 이 토론에서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 자취방에서 L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창가에 있는 침대였다. '나는 4계절을 호피 무늬 담요 하나로 버티는데 얘는 자취방에
침대도 있고 집이 좀 사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둘은 나란히 앉아 길에서 주고받던 논쟁을 계속했다. 고집 센 두 남녀의 대화는 시간이 지나도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녀가 L군에게 화제에서 벗어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오빠! 궁금한 게 있는데 오빠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아니 지금 레오 까락스 영화 이야기 안 끝났잖아! 말 돌리지 말고.. 그러니까 너는 상징적인 요소...."
밀당아티스트 답게 L군은 이성에 쉽게 마음을 보여주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게 소주 2병이 비워질 떄까지 둘은 레오 까락스와
드니 라방 그리고 줄리엣 비노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은 벌써 2시를 훌쩍 넘었다. L군은 속으로 '에이 젠장.. 돈도 없는데 할증비 내고
택시 타게 생겼네..' 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가 L군에게 "오빠 시간도 늦었는데 괜찮으시면 자고 가도.." 라고 했다.
"정말? 나 자고 가도 돼? 완전 고맙다! 나 그럼 첫차 다니는 4시 30분까지만 조금만 자고 갈게!"
L군은 내 자취방에 와서 잘 때처럼 자연스럽게 바닥에 쥐며느리 자세를 취하고 누웠다. 잠시 후 벌떡 일어나 ''아! 이걸 깜박했네!' 하며
핸드폰 알람을 맞춘 뒤 다시 누웠다. 베개가 없는 것을 빼면 그다지 불편한 걸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스르륵 잠이 들려는 찰나 침대 위에
있는 그녀가 L군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오빠는 형제가 어떻게 돼?"
아니 졸린 사람을 바닥에 두고 호구조사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긴 내 집이 아니므로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했다.
"형 둘."
"그렇구나.. 나도 오빠 한 명 있는데.."
"그래.. 알았으니까 잘 자."
"그런데 오빠 바닥 차거나 불편하지 않아?"
호구조사에 이어 이제 사람을 호구로 보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딱딱한 바닥에 이불과 베개도 없이 누워있는데 불편하지.. 당연한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찬 바닥에 누워있어 입이 삐뚤어졌는지 L군은 생각과 반대되는 말을 했다.
"괜찮아. 난 원래 바닥이 편해."
"오빠 불편하면 침대로 올라와서 옆에서 자도 돼."
아니 얘가 생각이 있는 애야 없는 애야?.. 저 좁은 싱글 침대에서 성인남녀 둘이 자자고? 손님 접대 제대로 하려면 지가 처음부터 바닥에서
자던지..
"야. 니 침대 싱글이잖아! 거기서 어떻게 둘이 자냐 그냥 나 여기서 잘래!"
"오빠 불편할까 봐 그러지.."
"야! 4시 반 되려면 2시간도 남지 않았는데 잠 좀 자자! 그리고 나 불편한 거 그렇게 걱정되면 베개나 줘!"
결국 그녀는 L군에게 베개를 줬고 L군은 그녀의 샴푸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핸드폰 알람이 요란하게 울린 4시 30분
잠이 든 그녀를 바라본 뒤 그녀가 깨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L군은 택시비가 굳었다며 기뻐한 뒤 그녀의 집 골목 입구에 있는 김밥천국에서 라면을 혼자 먹으며 이런 게 바로 행복이지! 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