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호텔클럽 이외에 다른곳들은 영업시간이 12시였다. 호텔들도 2시. 에프터영업이란건 꿈도 꿀수 없어서 영업종료후 다들 이태원으로 갔다. 이태원에는 하시엔다, 알함브라, 탱크, 까삐땅 등등 수많은 클럽이 있었다.
지금의 엘루이? 옥타곤? 예전 하시엔다라는 곳은 더 컷고 천장이 돔구장처럼 열였고, 천정에서 할리데이비슨이 내려와서 경품으로 막퍼주고 그랬다.
나는 파라오에서 솔직히 음악연습을 할수가 없었다. 호텔직영이기 때문에...
6개월정도후에 홍록기가 리버사이드호텔로 데려갔다. 당시에 최고의 개그맨이었고, 라이브디제이의 팬층이 두터웠다.
문제는 음악을 틀줄몰라서 록기형은 앞에서 춤추고 나는 뒤에서 음악트는 척만했다. 나도 잘 못틀었으니까 -_- DAT라는 조그만 카세트 테잎이 있었는데 음질은 cd수준이고 카세트 테잎처럼 잘 늘어나지도 않았다. 믹싱셋을 3개정도 녹음해두고 레파토리를 요일마다 번갈아 가면서 틀었다.
당시에는 크게 라이브DJ. 멘트DJ. 믹싱DJ 가 있었다. 믹싱디제이들은 간지가났다. 믹싱디제이로 마음을 굳힌 이유가 딴게 없었다. 그냥 간디작살 이었으니까ㅋ
리버사이드나이트도 6개월만에 옮겼다. 당시 건달사장님은 무서웠고, 건달 파벌싸움이 심한 가게였고 턴테이블핀이 이유없이 고장나면 두려움에 벌벌 떨었어 ㅎㅎ 연습은 할수도 없었다. 조용히 연습해도 건달 지배인에게 혼이났다.
그래서 하우스로 옮긴곳이 타워호텔 GIG였다. 가장최첨단 장비였고 앞마당엔 타워호텔 수영장도 있었다. 이곳에서 연예인을 처음본날에 우와 뚜띠다! 언타이틀이다 코코다 했다가 형들이 말하는게 들렸다. "저 촌놈색히 어디서 데려왔어" 나는 다신 촌놈짓은 안해야지 생각했다.
이곳의 지배인은 인심이 좋았다. 일찍 나와서 음악 연습을 해도 혼내지 않았고, 마감후 잘수있는 공간도 조명실에 마련해줬다. 지배인님은 후에 클럽아이(청단 리베라 호텔 지하 나이트) 회장님이 된다. 조명실 한켠에 갈아입을 옷을두고 가게에서 생활했다.
가게에서 먹고자며 영업종료후 가게화장실에서 양말을 빨고 양치를 하고 잠들었다. 눈뜨면 바로 믹싱 연습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냥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웨이터보조들이 출근하면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시키고 용돈도 자주줬었다. 이곳의 월급은 더 적었고 남산 꼭대기에 있는 곳이어서 차가없이 출퇴근을 하려면 등산을 해야했다. 그곳에서 믹싱 실력이나 피치 맞추는 것 . 등등 많이 연습할수 있었다.
그렇게해서 옮긴곳이 노보텔엠버서더 호텔의 슐탄... 크기는 지금의 88수준으로 작았지만 아무나 출입을 하는 구조도 아니였다. 부스에는 항상 최민수, 고현정, 이정재, 정우성, 신성우 등등 그 당시 쟁쟁한 연예인들만 있었다. 별다른 기억은없다.
그러다 옆가게 리츠컬튼 호텔의 nix&nox 로 옮겼다 이곳은 신시계였다. 하야드 JJ마호니 같은 시스템 이였고 기타 나이트클럽과는 달랐다. 이른바 사람취급을 해주기 시작했다. DJ메인이 외국인 프레디 였기때문에 생각이 한국 디제이들과는 달랐다. 폭행은 하지도 않았고 하우스DJ 에게도 음악을 틀수 있는 타임을 주었다 @_@ CD믹서기도 한창유행이었던 터라 최첨단 기기로 연습하고 장비의 구애가 없었다.
호텔직영의 클럽이기 때문에 호텔직원 수준의 복지혜택까지... 4대보험에 식사는 리츠칼튼 호텔내부의 직원식당에서 뷔페식 식사까지하고 호텔직원 수준의 급여도 줬다. 호텔 직원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퇴직금이나 보너스까지...
디제이 2년차였기 때문에 그냥 사람취급 받는다는 것만으로 좋았던것 같다. 당시에는 디제이 5년차 밑으로는 타임을 틀수있지도 않았고 오로지 가방모찌 그분이였으니까.
5년정도는 배워야 간신히 꼬마 DJ로써 명함을 내밀수 있었다.
그러다 당시 최고의 디제이들만 들어갈수 있다는 줄리아나에 하우스로 들어갈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당시 잘나간다는 디제이들은 줄리아나가 목표였기 때문에, 인맥을 쌓아서라도 들어가고 싶어했고 그만큼 힘들었다.
모든 복지여건을 포기하고 다시 월급 50만원 짜리의 길을 선택했다.
50만원이면 작지않은건 아닌가? 라고 할수있다. 지금이야 금, 토 만 영업하지만 그때는 월화수목금토일 휴무는 한달에 한번 그것도 눈치봐서 써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