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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핥기 로마사(16) - 로마제국 몰락의 원인
게시물ID : history_44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2
조회수 : 3193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2/05/21 02:13:06
1. 일련의 군인 황제들과 군대 200년 이후 로마인들은 점점 과거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과거를 황금기로 기억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돌려받기 원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3세기의 위기'라고 표현한다. 로마인들은 3세기의 위기 자체는 그럭저럭 잘 극복했지만, 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맞아야 했던 변화들이 로마를 근본적인 곳에서부터 파괴하였다. 우리가 1800년이나 지나서 관찰하는 것보다, 오히려 당대의 로마인들이 변화의 조짐을 더 빠르게 느꼈다. 그 중에서 가장 굵직한 것을 꼽자면, 기독교가 정통신앙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과 야만족들이 로마의 영토로 밀려왔다는 것이다. 코모두스 이후 몇달간 황제난립기가 있었다. 이는 마치 네로 사후 4황제의 난립기와 유사하다.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혼란을 종식하면서 등장했지만, 그는 양자계승을 하는 5현제 전통에서 세습제로 바꾸었다. 이는 세베루스를 황제로 지지한 세력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였는데, 결국 3세기 내내 로마는 군인황제의 난립에 몸살을 앓았다. 군대의 힘이 비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지대의 위협 때문에 군대를 축소할 수도 없었다. 많은 황제가 자신을 지지해준 군대에 의해 살해당했고, 어떤 황제는 자기가 임명한 사령관과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출현할 때까지 50년간 23명의 황제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실로 끔찍한 한 세기였다. 세베루스의 가족 그림이다. 세베루스는 장남 카라칼라와 차남 게타에게 공동황제를 맡겼지만, 카라칼라는 동생을 죽이고 단독황제가 되었다. 게타의 흔적을 아주 없애버리고 싶었는지 가족그림에서조차 동생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2. 경제적 문제 -세입의 감소 세베루스가 실시한 개혁은 한 동안 효과를 거두었지만 근본적인 조세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세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원인에는 1,2년마다 교체되는 허접한 황권도 이유가 된다. 제국이 직면한 다양한 위기에 비추어 빈약한 재정상태는 로마를 몰락으로 몰아넣었다. 관리들과 유력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권력을 남용하여 불법행위를 자행했고, 매관매직도 성행했다. 구조적인 문제점도 있었다. 로마제국의 경제는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경제기반은 크든 작든 농촌의 농경지에 있었으며, 그것은 생산과 삶의 기본적인 구성단위였다. 농촌사람들은 오랜 경기침체보다는 영토확장이 중단되면서 무거워진 세금과 징발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로마의 정복이 한계에 달하자 군대를 유지할 재정적 기반이 흔들렸는데, 이는 과거에는 새로운 정복지를 통해 보급물자와 병력을 충원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것이 불가능해진 탓이다. 결국 제국 내부에서 세금을 올리고 징발을 해야만 했는데, 만성적인 전쟁으로 농지는 황폐화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부자들은 세금을 면제 받았다. -인플레이션 3세기 로마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인플레이션이다. 이 인플레이션의 원인과 결과야말로, 로마사 연구에 있어 가장 뜨거운 연구주제이다. 야만족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그들에게 매년 막대한 양의 금괴를 공물로 바쳤는데, 이것이 통화가치를 하락시켰다. 야만족이 밀려온 것 자체가 직접적으로 물자부족 현상을 촉발했고, 물자공급의 감소는 도시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 물가상승을 부채질했다. 물가가 치솟는 반면 군인봉급은 그대로였는데, 따라서 군인들은 봉급 외 보수를 줄 수 있는 장군을 쫓았다. 군인 외에도 봉급생활자라면 누구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자 4세기 초부터 관리들은 화폐가 아닌 물건으로 세금을 걷었다. 화폐경제가 퇴화하고 물물교환의 시대로 돌아간 것이다. 한국 화폐같이 그저 종이쪼가리를 두고 우리끼리 약속해서 주고받는 제도가 파탄난 것이 아니다. 금 본위제의 화폐경제가 파탄난 것이다. -인구의 감소 자영농 중에는 스스로 농노가 되려는 자들이 늘어났다. 물가는 급등했지만 소비자들에게는 돈이 없는 현상이 일어났고, 농민들은 도시빈민이 되거나 산적, 해적이 되었다. 이러한 유민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치안유지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았다. 유민의 발생은 인구가 감소한다는 뜻인데, 3세기보다 4세기의 인구감소 현상이 더욱 심각해졌다. 3. 파르티아와 페르시아 건국 이래 군대는 점점 커져간데 비해, 이에 따라 군인봉급, 식량, 전투장비 등에 드는 비용도 필요했다. 반면 야만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면 군대유지비용과는 별도의 공물을 야만족에게 바쳐야 했다. 광대한 제국의 국경 중 안심할 수 있는 곳은 남쪽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밖에 없었다. 술라 이래로 파르티아와는 냉전상태와 열전상태가 반복되었다. 앞서 다룬 적도 있듯이, 공화정 말기부터 파르티아와 엮였다가 파멸한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로마와 파르티아는 150년간 아르메니아 쟁탈전을 벌여댔고, 때로는 유대인이 반란을 일으키며 파르티아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파르티아 제국은 내부적으로 내분이 자주 일어났는데, 그 때마다 로마는 침략유혹을 느꼈다. 세베루스 역시 파르티아 정벌을 감행했지만 다스리지는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 중기병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장기병이란 마갑까지 착용한 것을 이르는데, 이런 의미에서 최초로 중장기병을 갖춘 것은 파르티아다. 팔미라는 시리아 사막에 있었던 독립적인 오아시스 도시이다. 팔미라 여왕 이야기는 역사상 수많은 레전드 여장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파르티아에 이어 225년에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들어섰는데, 이로서 페르시아 문명은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 역사상 가장 위협적인 라이벌이었다. 아르메니아는 페르시아에게 넘어갔고,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붙잡기도 했다. 297년에는 페르시아인들이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쫓겨나고 로마가 티그리스 강까지 영토를 넓히기도 했지만, 이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양국은 언제나 막상막하의 관계에 있었고 6세기가 되어서야 균형이 깨졌다. bc5세기의 페르시아가 그리스촌놈들에게 당한 것은 그리스의 지형이 산악지형이었기 때문이다. ad 3세기 이래 로마는 페르시아의 홈그라운드인 동방에서 그들과 싸워야 했다. 로마를 상징하고 로마군의 중추가 되는 것은 언제나 중장보병이었지만, 페르시아와 일진일퇴를 거듭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로마가 보유한 기병 덕이다. 4. 유럽으로부터의 위협 게르만족의 이동은 3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큰 무리가, 더 집요하게 몰려왔다. 이 중 라인강의 프랑크족, 알라마니족, 도나우강 하류의 고트족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게르만과의 싸움은 230년경부터 있어왔지만, 페르시아의 위협 때문에 게르만과는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게르만의 규모는 1만 단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적은 n천명 단위였지만, 워낙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 몰려드니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게르만들의 떡대란...;; 로마는 결국 그들이 로마영토 내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하면서 그들을 용병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게르만 용병에 대한 의존을 키운 것은 서로마 멸망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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