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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에게 수단이었을까.
게시물ID : love_445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감귤짝꿍
추천 : 2
조회수 : 78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11/04 22: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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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한 지 3개월, 900일이 넘는 시간을 돌이켜 보는데 시간을 많이 썼다.
3개월 사이에 내 삶이 이전보다 나아지고 있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네가 없다는 것일 테다.

스물 일곱의 어느날, 모든 길을 잃고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사랑받게 해달라는 비명같은 울음 사이로
네가 찾아왔다. 무엇이 좋았을 지 모를 만큼, 11월의 어느날에 찾아와 무작정 내 애인이 되겠다던 네가 생각난다.
그 시절의 생기, 그 시절의 기운참.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무엇이 그렇게 좋았던 것일까.

천 일이 가까운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널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나 외로운 시간들에, 그래. 모든 어려움도 다 제치고 내가 좋다던 네게 마음 한 켠을 잠깐 내 주어 본 것이었다.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며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 
너만큼 시간이 갈 수록 사랑하게 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긴 연애 시간동안 우리는 참 많이 어려웠다. 길을 잃고 긴 취업준비에 빠져든 남자친구와, 새로운 직장에서 늘 지치고 힘들었던 여자친구의
연애란 세상 사람들이 으레 좋아할 만큼 충분히 반짝이지도, 화려하지도 못했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서로를 보듬어가며
그 시간 속에서도 크게 다투는 일 없이, 서로를 많이 배려하며 시간을 보내왔다.

처음 내가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했을 때.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잠시 떨어져 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네가 남긴 편지들이 생각난다.
힘든 시간을 잘 넘기고 다시 알콩달콩 만나, 예쁜 꽃나무를 바라보며 걸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 헤어지고 내가 널 몇 주동안 붙잡았을 때, 다시 돌아오면서 다음에 헤어질 때에는 네 결정을 존중해 달라는 말이 깊게 가슴에 박혔다.
그럴 일 없이 잘 해보자는 나의 말에 너 역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때는 다 괜찮을 줄 알았다.

몇 달동안은 참 괜찮았다. 우리는 서로가 좋았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고, 서로를 위해 더 마음을 쓰고 서로를 아끼고자 했다.
하지만 좋은 추억이 늘어나고, 행복함 사이에서도 아마 균열은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나보다.
너는 혼자 있고싶어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조금씩 내게서 멀어져갔다. 너는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사소한 몸짓, 눈빛, 말투 하나하나에서 나는 네가 애써 끌어올려보려 힘냈던
사랑을 지켜보고자 했던 힘이 다 사라져 버렸음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렇게 어느날, 아주 한심한 이유로 우리는 이별을 했다. 뉴스기사 한 줄을 읽고 서로의 의견이 달랐다는 이유로
네가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던 나의 설움과, 더 이상 내게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너의 종언에
우리의 관계도 끝이 났다. 나는 그 동안 네게 보여준 최선과, 너를 포용하고자 했던 마음들이 억울하고 화가 나서
다시 붙잡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했다.

하루쯤 지나서였을까, 너는 나를 붙잡았다. 너무 많이 지쳐있었다고. 너무 힘들었었다고. 그런게 아니었다고.

그러나 내가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었을까. 하루하루 변해가는 네 모습이 생생했는데, 
당장 아니라는 너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마음속으로는 그 말을 믿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네가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는 말을, 그냥 별거 아닌 흔들림이었다는 말을, 그 날 이후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도
너 역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느끼고 있었지만. 결국 터져버린 것처럼.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도, 정말로 그렇다면. 나도 너도 조금 차분히 다시 이야기 할 기회를 갖자며 우리는 그렇게 
가끔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가 네게는 정말 싫었던 건지. 몇 번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너는 더 이상 연락하고 싶지 않다며 떠나갔다. 한 달 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다림의 끝이었다.  

이별의 예의가, 세상에서 없는 사람 처럼 모두 차단하고 사라져버리는것임을
몇 번쯤 네가 그렇게 얘기해 주었다마는. 막상 당하고 나니 그 충격에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늘 너를 그리워하다가도, 
차라리 얼굴을 보고 한 마디 남기고 떠나가지 그랬냐며
전화로 우리의 관계를 끝내버리고서는
이렇게 쉽사리 비워내는 네가 참 미우면서도
그 모든 말을 꾹 삼키고
그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나줘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여느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이럴 때 남자가 너희 집 앞에 찾아가서
한 없이 너를 기다리기도 한다마는
처음 헤어졌을 때, 절대로 찾아오지 말라던, 전화통화조차 무섭다던 네가 떠올라서
나는 그저 가만히 침잠해가는 나를 계속 끌어올리려 애 쓸 뿐이었다.

인간은 삶에 있어서 몇 가지 문장만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고들 한다.
그것은 삶의 목적이기도하고, 지지대이기도 할 것이다.
네가 내게 왔을 때, 나는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아왔던 문장을 막 잃어버리고 방황하던 떄였다.
그 문장이 좋아서 네가 나에게 왔지만, 이미 나는 그 문장을 잃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내게 네가 보여준 삶은 롤모델과도 같았고
어느 순간 내 삶에 남은 몇 가지 문장은 다 네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장중에서 가장 크고 깊게 새겨졌던 것은, 진부하게도 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한 마디의 문장으로, 내 삶의 인생관을 뿌리부터 바꿔버린 것이었다. 그 떄부터 나의 모든 노력은
내 삶에서 당면한 문제들을 이겨내고자 하는 힘은
다 그 문장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네가 그렇게 떠나갈 때에, 그 깊게 새겨둔 문장도 통쨰로 뜯어가버리고
나는 다시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을 채워보고자 무던히 노력했다.
찾아오는 슬픔도, 그리움도 삭여내고 삼켜내면서
괜찮아 질 거라는 믿음으로,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진다는 말들에 기대어
잘 지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오늘, 문득 깨닫고야 마는 것이다.
네가 뜯어간 그 자리에 무엇을 채워넣으려 해도
이미 잔뜩 구멍난 곳들 사이로 다 쏟아져 흩어져버릴 뿐이었음을.



하루를 온전히 내 마음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주변을 정리하기로 했다.
가볍게 알던 이들부터, 가까운 이들과, 인연이라 부를 수 있을 사람들에게
나름의 인사를 남기고, 내가 남겨온 것들을 천천히, 차분히 정리해가기로 하였다.
하루 이틀로 끝날 수 있는 일은 아니겠다마는

모두에게 예의를 갖추고 조용히, 연유를 알 수 없이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거라는 가벼운 파편만을 남기고

그렇게 떠나가리라는 문장 하나를 새기고
남은 올해와 함께 떠날 준비를 한다.

삶에는 몇 마디의 문장만 잘 새겨두면 충분하건만
이제는 도저히 그 문장 몇 가지를 골라낼 힘이 없으니
내게는 이별도, 단절도 평화롭기와는 너무 멀었으며
다만 너를 몹시도 과하고 순진하게 사랑했던 것만이 나의 어리숙함이고
첫 연애도 아닐 진데 마음 전부를 내 줘버린 것에 대한 책임이면 책임을 것이다.

떠올려보니, 배갯잎에 눈물을 적시며
한 명이라도 좋으니 깊게 사랑하고 난다면
삶은 그걸로 충분하다는, 종교도 없는 나의 주인없는 소원이
용케도 하늘에 솔직하게 닿아 소원대로 가는 구나 싶다.
조금 더 길었더라도, 좋았을 것이다마는
과분한 사랑에, 과분한 시간을 보냈다.
미움도 그리움도 걷어내고 난 자리에
고마움이 남는다는 것이야말로
네가 무척이나 기적같은 사람이었음을.


마지막 선택을 마음에 담으며
시간을 들여 정리하고자 하는 태도야말로
내가 살아온 시간동안 길들여온 책임감이 남아 있음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면 너는 내게 늘 현명하다고 했지만
진정으로 현명한 것은 너라는 생각이 든다.
일찌기 나를 깔끔하게 차단하고 도려낸 덕분에
내 소식이 너에게는 도착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 오래 살고 싶지 않다는 너에게
닿지 않을 마지막 말을 깊이 남기고 싶다.
고집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하던 너였지만
마지막 말이니 만큼 한 번정도는 고집을 꺾고
들어주길 바란다.

부디 오래, 오래,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아라.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겨주어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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