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듣는 교양 과목의 기말 과제로 쓴 글인데, 혹시 읽고 평가할 여유가 계신 분 있다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의명은 '예술교육상담'이구요. 레포트 주제는 부제로 썼듯이 '내가 받은 예술교육에 대한 비판적 반성'입니다.
<폐허를 응시하라>
예술교육상담 기말과제 <내가 받은 예술교육에 대한 비판적 반성>
나는 어릴 적 기억에 관한 고백으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학교 수업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술 시간이었는데, 도화지에다 무언가를 스케치하는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적어도 50대 중반은 되어 보이시는 여자 담임선생님께서는 교탁 옆 책상에 앉아 자기 할 일만 하고 계셨고, 나는 그림 그리는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서 그냥 옆에 친구들과 장난이나 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한창 장난을 치다가 내가 친구에게 연필을 던졌다. 그러자 친구도 맞받아치려고 나에게 연필을 던지는데, 내가 그만 나에게 오는 연필을 발로 뻥하고 차버렸다. 애석하게도 그 연필은 선생님의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가더니 칠판 한가운데로 날아가 깡!하는 소리와 함께 칠판에 부딪혔다. 연필 부딪히는 소리에 교실이 일순간 잠잠해졌다. 그 정적의 무게가 순식간에 내 가슴을 옥죄어오자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은 분명히 화가 나보였지만 차분함을 유지하시면서 나지막이 나를 교실 앞으로 불러냈다. 내가 무서운 마음에 찔끔찔끔 걸어가는 사이에 선생님이 땅에 떨어진 연필을 집으셨다. 그러더니 내가 교실 앞에 다다르자,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손을 휘둘러 나의 한 쪽 뺨을 때리셨다. 짝. “엎드려뻗쳐.” 나는 겁이 나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엎드려뻗쳤다. 그렇게 엎드려뻗쳐 있는 동안, 분명히 연필이 칠판에 부딪히는 소리가 훨씬 컸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그 주름 많던 손이 내 뺨과 맞닿아 만들어진 ‘짝’이라는 소리만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슬프게도 이 최초의 기억을 뒤엎어줄 멋진 일은 학교 다나는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노래도 못 부르는데 보는 가창 시험이 너무 부끄러웠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장난 치고 까부느라 음악 선생님한테 단소로 손바닥을 맞은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았다.그렇다고 매번 열심히 안한 것도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내 최초의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그림을 하나 그렸었다. 어느 날 미술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아무 도구, 아무 방법이라도 상관없으니 네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려봐라’라는 과제를 내어주셨다. 미술 시간은 그저 친구들과 농담 따먹기 하면서 시간 축내면 되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그 날엔 뭔가 영감이 떠올라서 마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때 내가 그려낸 작품은 ‘욕구불만’이라는 그림이었다. 크레파스로 색칠을 한, 머리가 외계인처럼 길쭉하게 솟아오른 사람의 얼굴이었는데 머리를 온통 붕대로 칭칭 감아놓았고, 눈은 화난 눈매에 온통 노란색으로 칠해놓았다. 입술은 새빨갛고 두꺼웠으며, 심지어 머리는 붕대가 터져서 그 구멍으로 피가 콸콸 쏟아지는 그림이었다. 그 그로테스크한 그림에 연두색 배경으로 색칠을 해놓으니 정말 그럴싸(?)해보였다. 옆에 있던 친구들도 내가 별 같잖은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몇몇 애들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웅성대는 친구들을 보고 선생님도 내 그림을 보러왔다. “넌 뭐 그린 거니?” / “이거요? 욕구불만이요. 욕구를 못 풀어서 머릿속에 꽉 차있던게 결국 폭발한 거예요.” 그러자 내 설명을 들은 선생님은 나를 한참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나는 아직도 그 선생님의 시선을 기억한다. 창작욕으로 빵빵하게 부풀은 풍선같던 내 마음에 가차없이 구멍을 내버리는, 싸늘하고 아찔한 바늘같은 눈빛이었다. 힘없이 바람이 빠진 나는 더 이상 그림 그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여기까지 얘기를 듣는다면 의아해할 수도 있다. “이 수업 왜 들어요?”, “이 수업 좋아서 듣는 거 맞아요?” 사실대로 대답을 하자면, 맞다. 난 수학을 공부하지만 과학보다 예술을 훨씬 더 사랑하고, 그래서 학점 잘 주는 강의는 찾아보지도 않고 이 수업을 택했다. 나는 예술이 좋다. 왜냐고? 내가 20살이 넘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방향을 바꿔줄만한 예술 수업을 만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선생님으로부터.
작년 말쯤이었다. 나는 공군에서 헌병으로 복무했는데, 어느 정도 짬이 차고 나니 밖에서 벌벌 떨면서 근무를 서다가 드디어 실내근무를 하게 됐다. 부대 내의 항공 조종사들이 따로 모인 대대였는데, 그 건물의 경비 헌병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말이 경비 헌병이지 그냥 군복 입은 경비아저씨다. 실제로 경비아저씨들이 앉아있을 법한 조그마한 방 안에 배치됐다. 이 곳에는 외부 인터넷과 연결이 되지 않는 컴퓨터 한 대가 딸랑 놓여있고 그거 말곤 아무 것도 없었다. 나의 근무 시간은 5시간. 당장이라도 할 것을 찾아내지 못하면 심심함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할 일을 궁리하고 있었는데, 문득 인터넷에서 본 강연 하나가 생각났다. 소설가 김영하씨가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자기 해방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내용이었다. 이 강연에서 김영하씨는 자신이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학생들과 글쓰기 수업을 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어느날 학생들에게 나는 용서한다...’로 시작하는 글을 쓰게 시켰다. 그런데 수업을 하다 보니 고작 두,세줄 쓰기 했을 뿐인데 모든 학생들이 용서할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로 용감하게 뛰어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저는 이게 못하겠어요.아직도 걔가 용서가 안 돼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학생의 글은 ‘나는 용서한다.’로 시작해서 ‘나는 용서할 수 없다.’로 끝났다.나는 이 강연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됐다. 용서할 거라고 선언한 이야기가 결국은 용서할 수 없음으로 끝나다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지 너무 궁금했다. 나는 결국 김영하씨의 글쓰기 수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5시간동안 골방에 틀어박혀 그 이야기가 무엇일지 나 자신으로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중학교 때 같이 다니던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체구가 어마어마하고 힘도 셌고, 축구나 격투기를 좋아하는, 한 마디로 장군감인 친구였다. 그러나 하는 짓은 도둑놈에 못 미쳤다. 어른들 몰래 담배를 폈고, 약한 애들을 괴롭히기 좋아했고, 심지어 돈도 자주 빌리고는 안 갚기 일쑤였다. 물론 나도 빌려주는 쪽에 속했다. 한 번은 그 친구가 가지고 싶다던 음악CD를 대신 사준 적이 있었는데, 계속 돌려주지 않아 어머니께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이것이 자기 어머니 귀에도 들어갔는지 그 친구는 무척이나 화를 내며 온갖 욕을 해댔고, 심지어 우리 어머니도 입에 들먹였다. 그러고 나는 그 날 학원 화장실로 들어가 몇 대 얻어맞았다. 나는 이 마주하기 싫은 얘기를 5시간 내리, 엉덩이 한 번 때지 않고 소설로 써내려갔다. 다음 근무 때도, 그 다음 근무 때도. 그러자 A4 11페이지 분량의 소설이 탄생했다. 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군 내부 인터넷(인트라넷)의 병사 커뮤니티에 이 소설을 게시했다. 그러자 이 글을 읽은 내 후임들이 다음 글은 언제 나오냐, 다른 글도 써보라며 큰 관심을 가져주었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재밌다는 댓글도 받게 됐다. 처음으로 예술에 관해 행복한 기억이 생긴 때였다.
20살이 넘어 우연히 예술을 사랑할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나는 왠지 내 유년기에 대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게 이런 경험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까. 왜 초등학생 1학년이 미술시간에 뺨을 얻어맞아야 했고, 열심히 그린 그림의 대가로 멸시의 눈빛을 받아야 했는가. 나는 이것을 미(美)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갓 태어난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으며 이렇게 말한다. ‘좋은 것만 보고 자라라.’ 과연 이것은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너무나도 수많은 일들에 정신이 몽롱해질 지경이다. 그러나 학교는 아이를 향한 아름다움의 강요를 교육현장에까지 끌고 들어와 버리곤 한다. 이렇게 되면 일부 교사는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보지 않으려는 학생을 자기 방향으로 선회시키려 들고, 끝내 말을 듣지 않는 학생에게는 왠지 모를 멸시감을 느낀다. 어느 누군가는 손찌검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처럼 교육을 받는 모든 학생이 스케치 시간에는 도화지에 무엇을 그릴지 외의 허튼 생각은 일절 해선 안 되고, 머리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저속한 그림은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사상 폭력이다. 이런 교사들은 조금만 더 생각을 바꿔 자문해보아야 한다. 모든 학생들이 다비드 상을 보면서 황홀감을 느껴야만 하는가? 한 학생도 빠짐없이 베토벤의 클래식이 가슴을 울린다고 말해야 하는가? 어떠한 예술가라도, 심지어 교사라면, 이 질문에 Yes라고 답해선 안 된다. 다른 행동,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것이 예술의 첫 걸음마다.
혹자는 예술이 아름다움을 향한 열망에서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결국 예술가 자신이 추구하는 미(美)가 무엇인지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슬픔과 절망, 좌절 속에서 자신이 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싶은지를 발견하는 단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교육이 이를 간과하여 무차별하게 예술의 고결함, 순수함, 미적 체험만 강조하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나는 학교의 예술 수업이 학생들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슬픔, 절망을 뒤돌아보게 하고 여기서 자신이 원하는 예술이란 무엇인지를 자문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폐허를 응시할 수 있어야만 폐허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가 있다. 내가 어린 시절의 폐허 속을 샅샅이 뒤지고 살펴보았을 때, 그리고 그것이 소설이라는 예술로 탈바꿈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예술을 사랑할 수 있게 됐듯이 말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예술은 슬픔과 고통의 결과물이다.” 나는 학교가 8살 아이에게의 따귀나 16살 소년에게의 멸시의 눈빛 따위가 아닌, 건전한 예술의 자양분으로서의 슬픔과 고통을 학생들에게 선물해주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