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사회] 인혁당 손해배상 위자료 준 2년 뒤 대법원에서 38년 '지연손해금'(이자) 없는 것으로 '반전 판결',
준 위자료에 붙는 '지연손해금' 한 명당 3억2500만원… 서울지법에서 2일 화해권고 결정 나와
가해자는 40년 뒤 채권자로 돌아왔다.
대구에 사는 강아무개(86)씨는 지난 7월 국가정보원이 보낸 소장을 받았다.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의 소, 피고(강씨)는 원고(국가)에게 금 6억 9천만 원 및 이에 대하여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강씨가 소장의 봉투를 연 순간부터 연 20%의 채무이자가 붙기 시작했다. 세 아들에게도 각자 2억8천만원을 반환하라는 소장이 배달됐다. 강씨는 40년 전 고문의 기억이 깨어났다.
정권이 바뀌자 검찰의 입장 바뀌어
강씨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피해자다. 1974년 중앙정보부는 유신 반대 투쟁을 벌였던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고 인혁당 관련자 24명을 구속했다. 이 중 8명이 이듬해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받고 18시간 만에 형집행을 당했다. 세계가 경악한 사법살인이었다. 나머지 16명은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강씨도 무기징역을 확정받고 8년8개월을 복역하다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출소 뒤 10여 년간 직장을 얻지 못했다. 신원조회 때문에 공기업은 물론 사기업 취직도 넘보지 못했다. 보호관찰법에 따라 자신과 가족 주변에 누군가가 늘 맴돌았다. 생계는 물론이고 아이들 교육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강씨뿐만 아니라 16명의 생존자 모두 같은 처지였다.
숨죽인 세월을 지나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2005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사형수 8명의 유족이 먼저 재심을 청구해 2007년 1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이 항소를 포기해 확정됐다. 유족 46명은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내 1심에서 245억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역시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이후 16명의 생존자도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가족들과 함께 민사소송을 냈다. 2009년 1심에서 77명에게 759억원의 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이 중 위자료가 279억원, 지연손해금(이자)이 480억원(위법행위 발생일인 1974년 4월9일부터 산정)이었다.
이번에 검찰은 항소했다. 피해자들은 "정권이 바뀌자 검찰의 입장도 달라졌다"고 했다.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2009년 8월 이들에게 법원 결정에 따라 1심 배상액의 65%인 490억원을 가지급받았다. 한 명당 6억3천만원꼴이었다. 그해 서울고법은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1심 배상액을 유지했다.
하지만 2년 뒤 대법원은 반전의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통상 불법행위 시점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하지만, 불법행위 이후 장기간의 세월이 흘러 통화가치에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도 무조건 불법행위시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보면 현저한 과잉배상의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항소심) 변론 종결 시점과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는 예외적으로라도 변론 종결 당일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는 논리를 내놓았다. 이 때문에 이들의 30여 년치 이자가 순식간에 깎여 위자료 279억원만 확정됐다.
"대법원 파기하더라도 2심으로 보냈어야"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은 "참여정부 때 각종 과거사 위원회의 활동으로 재심 권고 등 결정이 많았다. 2010~2011년 사법부에서 과거사 사건 재심 무죄판결 및 국가배상 판결이 많이 나 일부 언론에서 과거사 청산에 사회적 비용이 든다는 보도가 연일 나왔다. 대법원도 그런 여론의 부담을 느꼈던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덕수의 양지훈 변호사는 "위자료 산정은 사실심(1·2심)의 재량 사항이다. 대법원이 위자료 액수를 확정하는 것은 권한을 넘어선 것이다. 파기하더라도 2심 법원으로 돌려보내 위자료를 다시 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줬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파기환송했더라면 2심에서 위자료 액수를 높이는 방법으로 가지급된 액수 수준으로 배상금을 조정하면서 해결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마저 막은 것이다.
서울고검은 가지급한 490억원 중 대법원 확정액 279억원을 뺀 211억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가족들이 반환을 거부하자 가지급받은 2009년부터 지연손해금을 붙여 지난 7월 251억원을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한 명당 3억2500만원씩 반환해야 하는 셈이다.
강씨는 4년 전 15억2천만원을 가지급받았다. 20년 가까이 가장 노릇을 못해 쌓이고 쌓인 빚을 갚았다. 그동안 가족을 도와준 사람들에게도 보답했다. 자식과 주변을 챙기느라 정작 강씨 자신은 아직 월세방에서 살고 있다. 강씨는 남은 배상금으로 여생을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6억9천만원을 반환할 처지가 됐다. 강씨는 "살아서 이런 꼴을 당한다. 고문조작 이상의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전창일(92)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은 "힘없는 국민은 법에 당할 수밖에 없다. 피해 국민에게는 이자를 안 주겠다고 하면서 국가는 고리대금의 이자를 매기고 있다. 국민에 대한 도덕성과 이성을 실종한 게 아닌가, 허무감을 안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 전씨의 딸은 배상금으로 장만한 아파트를 다시 내놨다.
배상금을 받은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난 김아무개씨의 경우 어린 자녀들이 상속받은 돈까지 국가의 소송 대상이 됐다. 일부 가족은 충격을 받고 쓰러지기도 했다.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해 배상금으로 장사를 했다가 실패한 가족도 여럿 있다. 직장을 다니는 가족들은 돈을 안 내면 월급을 가압류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에 잠 못 이룬다. 일부 가족은 공무원의 신분 때문에 겪는 압박에 못 이겨, 투병 중 소송을 감당할 수 없어 돈을 반환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35부(재판장 이성구)가 지난 10월2일 국정원이 강씨 가족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국가가 청구한 15억3천만원 가운데 절반인 7억6500만원을 내년 6월 말까지 나눠 지급하고, 국가는 나머지 채권을 포기하라는 내용의 화해권고를 결정했다. 77명을 상대로 한 소송 가운데 처음 나온 판단이다. 재판부는 "사건의 공평한 해결을 위해 당사자의 이익, 그 밖의 모든 사정을 참작했다"고 말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법원이 대법원 판결을 따라야 하면서도 피해자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보고 있다. 화해권고는 14일 이내 당사자들이 이의신청을 하지 않으면 확정된다. 법원의 화해권고 결정에 대해 서울고검은 지난 14일 이의신청을 했다. 이에 따라 다시 소송절차가 진행된다.
어린 자녀 상속받은 돈까지 소송 대상
그동안 대법원이 4건의 과거사 사건에 대해 지연손해금을 낮추는 판결을 했지만 모두 가지급액이 대법원 확정 금액보다 적거나 대법원 확정 뒤 배상금이 지급됐다. 이후 과거사 사건은 바뀐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이자를 산정하고 있다. 이번 반환소송이 유례없는 경우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이번 일은 피해자 쪽의 실수나 잘못이 전혀 없고 전적으로 국가의 관행과 판단이 달라져 생긴 문제다. 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피해를 입는 건 또 국민이라면, 결국 공권력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게 된다. 국가의 판단이 달라지는 과도기에 기계적으로 경직성을 유지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법원의 화해권고 결정이 제도 내에서 유연한 접근을 시도한 것인 만큼, 국가도 공권력 행사 과정에서 조금 더 유연한 해결 방법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