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녀석을 본 것은 대학 오리엔테이션 때였다. 녀석을 처음 봤을 때 드디어 대학에서 '신'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신은 어르신이다.
동기 중 외모로 주목받는 것은 나와 녀석이었는데 선배들은 내게 "한국 사람 맞으시죠?" 라는 질문을 그리고 녀석에게는 자연스럽게
군번을 물어봤다. 그리고 미필에 심지어 생일도 빠른 2월생이라는 말에 군번을 물어본 선배도 그리고 듣고 있는 우리도 경악에 빠졌다. 그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저 자식은 고등학교 때 교련을 배운 게 아니라 분명 노련을 배웠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녀석과 전공부터 교양까지 수업이 모두 일치해 자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져 서로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가 은근히 이국적 외모를 신경 쓰고 약간의 콤플렉스가 있었던 반면 녀석은 또래보다 20년은 앞서나가는 외모를 은근히 즐기고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녀석이 자취하는 나를 안쓰럽게 여겨 가정식 백반을 먹여주겠다고 녀석의 집으로 데려갔을 때
녀석 방에 걸려있는 큰 액자의 유치원 졸업사진을 보고 처음으로 6세 어린이의 모습에서 장난스러움, 귀여움, 천진난만이 아닌 근엄함을 발견했다.
그렇게 난 녀석을 대학 신입생 때부터 이십여 년간 봤다. 녀석이 졸업하자마자 동갑내기 동아리 친구와 결혼했을 때도 (그날 신부 측에서는
동갑이라면서 알고 보니 띠동갑 아니냐! 이러며 이 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다행히도 녀석을 닮지 않고 제수씨를 닮은 딸을 낳았을 때도
녀석은 미혼남에서 유부남으로 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을 때도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봤던 스무 살 시절의 그 외모를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었다.
얼마 전 대학 동기 모임때 동기 중 한 녀석이 대학 시절 첫 과MT때 찍은 이제는 낡은 사진을 가져와서 생애 전환기 나이를 맞은 우리는 옛 추억을
떠올렸다. 그때 사계절 내내 민소매 티셔츠만 입고 다니던 몸짱 녀석은 이제 아이들이 좋아하는 토토로가 되어 동심을 되찾았고,
동기들 사이에서 여왕벌로 추대받던 뛰어난 미모의 여자 동기는 웃는 모습만은 여전히 아름다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난 대머리...
하지만 녀석만은 그 낡은 사진 속 모습 그대로였다. 뒷짐 지고 근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 속의 녀석은 신입생 MT에 눈치 없이 따라온 교수님
모습 그 자체였고 놀라운 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저 자식.. 뱀파이어 아니야?"
우리는 세월의 풍파에도 변치 않는 외모를 가진 녀석이 뱀파이어가 아닌가 의심했다. 나는 함께 술을 마시면 항상 집에 가기 전 해장으로
선지해장국을 고집했던 녀석의 모습을 떠올리며 녀석이 뱀파이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고 있었다.
녀석은 그날 모인 동기들에게 얼마 전 태어난 늦둥이 아들의 락페스티발 초대엽서를 한 장씩 돌렸다. 그 엽서에는 늦둥이 아들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었는데, 우린 그 아이의 얼굴에서 귀여움보다 연륜을 그리고 이십여년 전 녀석을 처음 봤을 때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역시 씨도둑은 못 속인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날 녀석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는데...
니 아들 말이다.. 딱.. 너의 피규어같았어.. 그것도 한정판..
귀..귀엽다.. 막 존경하고 싶어져..
출처 |
이십여 년 전 노란색으로 염색했던 나는 대머리가 되었고
이십여 년 전 어르신으로 불렸던 녀석은 여전히 어르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