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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핥기 로마사(17)-디오클레티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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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악진
추천 : 2
조회수 : 1797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05/22 03:43:55
아우렐리아누스의 흉상. 1. 아우렐리아누스와 일리리아 출신 황제들 군인황제 시기 말엽 로마군대는 일리리아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성실하고도 뛰어난 통솔력으로 군대의 지지를 끌어냈다. 대국적인 안목도 뛰어나서 팔미라와 동맹을 맺어 페르시아 국경에서 시간을 번 뒤 다키아 지역을 포기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발레리누스가 포로로 잡힌 이후 독립한 갈리아제국과 팔미라를 멸망시키며 짧은 기간 동안 분열된 제국을 재통일했다. 페르시아 중장기병과 팔미라 궁기병을 로마군에도 도입했다. 이로 인해 원로원은 그에게 '로마제국의 재건자'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 역시 암살되고, 로마가 본격적인 재건을 하는 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흉상 2. 디오클레티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출신과 경력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아마도 하층민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군 경력도 황제근위대장이었던 것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다. 군인보다는 행정가로서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조직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고 질서를 사랑했으며,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제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통치를 하는 특이한 정치를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펼친 개혁의 핵심은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분권적 권력구도를 만들어두어 어느 한 지방의 행정력과 군사력이 지나치게 신장되는 것을 막았는데, 이는 반역과 내분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이 개혁에 따라 속주의 숫자가 2배 가량 많아졌다. 기존 속주를 더 잘게 쪼갠 것이다. 3. 개혁에도 돈이 필요하다 국경지대의 군단 수를 2배로 증가시키고 특정속주에 주둔하는 군단 외에 기동부대 개념을 도입했다. 징병제도를 다시 도입하여 무장병력의 수가 5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군 조직 개편은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장점이 있었지만, 한 세대만에 군이 2배나 커짐에 따라 방위비 부담이 폭증했다. 이는 신민(더 이상 시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아래 6.을 참고하라)들의 불만을 야기하고 부정부패를 초래했다. 이러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는 체제를 강화하고 사회제도를 엄격하게 통제해야만 했다. 농민은 등록된 거주지 내(조금씩 중세장원의 전조가 보인다)에서만 살아야 했고 (인류 최초의)물가상한제를 펼쳤지만, 이는 경제활동만 위축시키곤 참담하게 실패했다. 이러한 일련의 행정역량을 동원하기 위해 또 세금 세금 세금 세금 세금 세금 세금 세금이 필요했다. 보통 세금이란 직접세가 됐건 간접세가 됐건 수익이나 소비에서 몇%를 부과하기 마련인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가 1년마다 세입예산을 정해놓고는 납세자의 실제 수익과는 관계없이 세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그의 개혁조치는 그 자체로는 적절한 처방이었지만 엄청난 비용이 요구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잖아도 파탄난 국가재정의 숨통을 더욱 조인 셈이 되었다. 4. 4두정치 28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하면서 제국 서쪽을 그에게 맡겼다. 동로마에 정황제(아우구스투스)와 부황제(카이사르)를 두고 서로마에도 같은 2명의 황제를 두었다. 부황제가 정황제를 승계하고, 다시 부황제를 세우도록 하여 군인황제 시기의 끝없는 반역을 종식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오로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은퇴에만 적용되고, 그 직후 와해되었다. 다만 동서-정부황제의 4명의 황제를 두는 것만 폐지되었을 뿐, 4두 황제의 영역으로 분할해둔 행정적 분리는 이후로도 계속 유지되었다. 사실 지중해 세계는 1개의 국가로 통일되어 있기에는 너무 넓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2개로 나눌 당시 동로마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던 반면 서로마의 공용어는 라틴어였다. 이미 이 때에는 동서 간의 문화적, 경제적 격차가 현격하게 벌어져 1개의 국가로 가는 것에 무리가 발생했다. 5. 로마제국의 이념적 위기 군인황제 시기를 거치며 황제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다. 황제의 권위가 위기에 처한 것은 단지 황제 개인의 팔자문제가 아니라 여러 현실적인 문제를 야기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펼치려는 통치에도 걸림돌이 되었다. 그는 파국적인 상황을 맞은 로마제국의 이념적 문제를 일소하기 위해 스스로 신을 자칭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나라를 구하는 영웅이나 혼돈을 바로 잡는 신처럼 행동했다. 최후의, 최강도의 기독교 박해를 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6. 황제 신격화 아우구스투스 이래의 여러 황제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스스로를 신격화해왔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것은 격을 달리한다. 우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에 이르러 더 이상 원로원 의장이자 제1시민이라는 의미의 '프린켑스'칭호가 사용되지 않았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황제가 신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나마 형식만이라도 남아있던 공화정의 간판을 떼어냈다. 그나마 간판만 유지하고 있는 원로원의 입법권마저 황제의 칙령으로 대체하여 원로원을 경로당으로 만들어버렸다. 황제가 칙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전문관료들이 필요했는데, 이에 따라 전문관료조직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동양의 황제들처럼 신정일치의 황권을 구현하고자 했다.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이름을 따서 로마에 건설한 공중목욕탕. 지금은 터만 남은 유적지가 되었다. 이 목욕탕은 어마어마한 대규모여서 3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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