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한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한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
얼핏 보면 수수해보지만 그렇지도 않은 그런 여자.
그 여자는 아름다우면서도 꾸밈이 없었다.
꾸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포기처럼 보이는 날도 있었다.
여자로서의 포기. 어쩌면 그게 더 맞는 생각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때로는 편의점 안으로 찾아들어 물건을 샀다.
담배, 바나나 우유, 주스.
나름 손님임에도 이 여자는 얼굴을 한번 쳐다보는 일이 없었다.
여자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개미 같은 목소리를 냈다.
한번은 편지를 써서 마음을 전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편지를 쓰는 것까지는 쉬워도 전해주기는 어려웠다.
결국, 나같은 사람이 된다는 거 였나보다. 스토커.
나는 여자가 편의점 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뒤를 밟았다.
여자가 혹여 뒤를 돌아볼까 노심초사였지만 여자는 길을 걸을
때에도 곧잘 땅만 쳐다보며 걷고는 했다.
그녀의 집을 알아내는 것은 너무도 손쉬운 일이었다.
나는 다음날 열쇠수리공을 불러 집 문을 열고 그녀의 방을 들어가 보았다.
그녀의 방은 뭐랄까. 향이 없었다. 여자들의 냄새.
그리고 또 특별히 뭐라 콕 찍어 설명이 힘들었지만,
이곳은 여자의 방이라는 뉘앙스가 없었다.
꼭 여자들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방에는 그 흔한 화분조차 하나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민무늬의 카키색 천 쪼가리가 볼품이 없었고,
침대와 이불도 순 카키색 옅은 무늬가 들어간 재미없는 물건들뿐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요리할 수 있는 식재료 따윈 들어있지 않았다.
물, 음료수 하나, 언제부터 얼어붙어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피자 한 조각.
TV는 존재하지 않고, 17인치로 보이는 작아 보이는 모니터와
싸구려 컴퓨터가 책상도 아닌 조막만 한 작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옷장 속은 여자의 옷장이란 느낌을 풍기며 많은 옷이 들어있었지만
오랜 시간 잠겨있던 옷장의 향이 자욱하게 풍겨왔다.
확실히 내가 그녀를 스토킹하며 봐왔던 옷은 몇 벌 보이지 않았다.
방을 둘러보다 졸업앨범을 찾아 앨범을 뒤적이며 그녀를 찾았다.
졸업 사진의 고등학생 시절의 얼굴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아 금방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2008년 졸업생. 이름 정지영.
어릴 적부터 빼어난 미모였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지금 모습을 보면 예상이 어려워 소스라칠
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조금 의아스러운 건 지금의 모습과 상반되는 사진의 모습이었다.
반의 친구들과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감 있고 밝은 활기찬 고등학생의 모습.
책장에 들어있는 책이 졸업앨범과 몇 권의 소설이 전부였다.
허리춤까지 오는 작은 책장인데도 허전함이 느껴졌다.
컴퓨터를 켜자. 바로 윈도우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겨우 60기가 남짓의 하드디스크 내용물을 살살 뒤져보자
최근의 드라마 몇 편 이외에는 별다른 데이터가 없었다.
게임조차도 하지 않는 여자 같았다.
한참 방을 뒤져보고는 텅텅 비어있는 방의 살풍경이 마치 여자의 삶을 대변하듯 느껴졌다.
스토커로서 주제넘게도 나는 정지영이란 여자를 동정하게 되었다.
방을 좀 더 둘러보다 방의 키를 찾게되어 열쇠집을 찾아가 열쇠를 복사했다.
열쇠를 복사하고 그녀의 방에 다시 열쇠를 돌려 놓으러 가는 길. 길가에서
팔고있는 선인장 화분을 하나 샀다.
여자의 방에 열쇠를 돌려두고, 화분을 올려둘 그럴듯한 장소를 찾았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화분을 책장에 얹어두었다. 허전했던 책장이
그나마 공간을 차지하며 약간은 쓸쓸함이 줄은 듯 보였다.
여자가 이 화분을 보고 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며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며칠 뒤 그녀가 출근한 것을 확인하고 다시 그녀의 방을 찾아갔다.
현관에 서서 열쇠를 넣어 돌리니 휙 하고 열쇠가 걸림 없이 돌아갔다.
'조심 좀 하지...'
방에 들어서자 이상하게 방에서 은은한 여자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커튼까지 꽁꽁 쳐 두었던 창은 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해놓은 상태였다.
오늘은 무엇을 해볼까 고민을 하다가 그녀가 읽은 책들을 한번 읽어볼까 생각이 들었다.
개중에는 여자가 편의점 일을 하면서 읽던 책도 있었다. '공중그네' 오래 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이었다.
한참 동안 엎드려 책을 읽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리며 내가 방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책을 자리에 돌려놓고 현관으로 향하는 거실에서 난 얼마 전 사뒀던 화분이 현관 신발장
위로 자리를 옮긴 것을 보았다.
'버리진 않았네?'
여자가 눈치채면 화분을 가져다 버릴 줄로만 알았다.
화분에 다가서니 포스트잇 종이에 정성껏 쓴 듯 보이는 글씨가 보였다.
'당신은 누구 신가요?'
"뭐야. 이 여자 스토커한테 누군지 묻는 거야?"
나는 별 희한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신발을 신었다.
신발을 신고 현관을 열려고 하는데 생각지도 안았던 현관문에
포스트잇이 한 장 더 붙어있었다.
'신고하지 않을게요. 또 오세요.'
"2,700원입니다."
3,000원을 내밀며 담배 각을 받아 들었다.
잔돈을 돌려받으려 손바닥을 위로 올린체 손을 내밀자.
그녀의 손이 내 손바닥 위에서 300원을 오므려 쥔 체 멈춰 섰다.
나는 잠깐 동전이 내 손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기다리다 그녀를 올려 보았다.
그녀는 "왜요?" 라며 내게 되려 물었다. 전까지는 본 적 없는 선명한 눈빛을 한
그녀의 눈빛이 날 투명한 사람 보듯 투영하는 것 같았다.
며칠 전 그녀와 그녀의 집 앞 복도에서 마주친 일이 있었다.
그녀의 방은 편의점에서 20분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나는 그녀가 퇴근하기 30분 전에 알람을 미리 설정해 두곤 했는데,
그날은 무슨 일인지 그녀가 일찍 퇴근을 한 것 같았다.
뛰어오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계단을 오르던 그녀와 스쳐 지나갈 때는
심장이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혹시나 방 안에 있을 나를
잡아채고 싶어하는 것만 같았다.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던 그녀가 갑작스레 계단을 뛰어 내려왔었다.
툭탁거리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내게 다가올 때의 긴장감은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아저씨, 여기사세요?"
느닷없이 내 팔을 움켜쥔 그녀의 감촉은 놀라웠다.
이렇게 생기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거니와,
내가 스토커라는 감을 잡았다는 것도 놀라웠다.
"아니요."
"네, 저도 아저씨 본적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요?"
"여기 왜 오셨어요?"
그때의 확고한 눈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대충 그곳에 친구가 살고 있다며 둘러대자
여자는 순순히 나를 돌려보냈다. 그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 누가 누구와 친구인지 캐물을 수 없으니
그녀도 그 정도에서 납득할 수 있는 변명을 들었다는 눈치였다.
'봐줬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둑이 제 발을 저린 다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지금 이런 행동을 보인다.
잔돈을 움켜쥔 손을 아직 풀 생각조차 안 하는 그녀였다.
"잔돈, 주세요."
그녀는 웃는 것도 인상을 짓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하며 내 손위에 동전을 떨궈줬다.
때때로 시간이 생겨 그녀의 방에 찾아가면 현관 앞에는 '열쇠는 바꾸지 않았어요.' 라는
메시지가 적혀있던가 '혹시 생각 있으시면 드세요.' 라며 냉장고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곤 했다.
컴퓨터를 켜보면 안에는 드라마 파일명에 드라마가 재미있는지
별반 재미가 없는지에 대한 간략한 평점을 별표 표시를 해서 달아 두었다.
책장에는 새로운 책들이 꼽혀있었다. 새로 구입한 책에는
'이걸 제일 먼저 읽어보세요.' 라는 포스트잇 메시지가 있었다.
평일은 일이 바빠서 그녀가 방을 비우는 시간과 내가 갈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내가 일이 끝나고 나면 그녀는 최소 일이 끝나고도 두세 시간은 지난 후였다.
때로는 그녀가 집에 있는 동안 들어가 볼까 라는 망상을 하며 가슴이 설레였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 애매한 상황은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지금 이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최근 회사에 사람이 부족했기 때문에 집에
다가올 즘이면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다리가 풀려버렸다.
'죄송해요. 다녀갑니다.'
나의 방 현관 앞에 붙어있는 메시지가 그날 편의점에서
보여준 그녀의 태도 의미를 알려주었다.
'찾았다.'
서둘러 집에 들어가 보니 집안에서 딱히 이상한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을 둘러보며 혹시나 그녀가 어딘가에 남아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소소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혼자 사는 남자 집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 내 방도 지저분했다.
대충 던져놓은 휴지 조가리, 담배 껍데기, 생수병, 컴퓨터 앞 담배꽁초가 산을 이룬 재떨이.
사라진 물건 따윈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었다.
텅텅 빈 재떨이 밑에 '다른 물건은 건드리지 않았어요.' 하는 메시지가 있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검정 비닐봉투 안에서 맥주가 식어가는 것이 떠올라 냉장고에 다가가니
'맥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안에는 열댓 개의 맥주 캔과 과일이 몇 가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냉장고 가장자리에 사온 맥주를 대충 욱여넣으며 살살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뒤돌아 대충 옷가지를 벗어 던지며 땅바닥에 널브러트렸다.
욕실 앞에는 '샴푸가 다 떨어졌어요.' 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씻으며 몸을 헹구는 동안 거울에 슬슬 김이 서렸다.
서린 김 사이로 무언가 어렴풋이 글자들이 보이는 것 같은데 잘 읽을 수가 없었다.
"뭐, 잘... 뭐지?"
물을 뚝뚝 떨구며 옷을 말려두는 건조대로 다가가자 옷가지가 전부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며 개인 빨래들을 주어 서랍장에 담으려는데 양말 더미에서 쪽지가 하나 툭
하며 떨어졌다. '이 양말 구멍 났어요.'
빨래 더미를 내려놓고 개인 양말을 펼쳐보니 정말로 뒤꿈치가 다 헤져서 구멍이나 있었다.
양말을 움켜쥐고 휴지통에 대충 던져 넣었다. 휴지통 가득하던 쓰레기들도 모두 사라졌다.
육포를 담을 접시를 씻으러 싱크대에 다가서니 그릇들이 전부 설거지 되어있었다.
'너무 오래 안 하시면 냄새나요. 오늘만 제가 할게요.'
그릇수납장에 쓰여있는 글을 읽으며 접시를 하나 집어 들었다.
육포를 조금 구워서 먹으려고 하는데 '과일 안주로 드시면 안 돼요?' 라는 글이 가스렌지 위에 붙어있었다.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와 맥주를 한 캔 집어들고 방에 들어가 TV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저희 집에서 보시던 드라마, 다운 받아놨어요.' 라는 TV 화면 위의 글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컴퓨터 책상에 앉아 컴퓨터에 전원을 넣었다.
전원이 켜지는 동안 책상에 붙어있는 책장을 슬쩍 들여다보자
내가 읽던 책에 '이 책 재미있네요.' 하는 글이 붙어있었다.
책을 꺼내 들고 펼쳐 보자, 확실히 내가 읽던 부분이 아닌 곳에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걱정 마세요. 혹시나 해서 원래 부분에도 책갈피 끼워 놓았어요.'
문득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디에서 이 책을 읽었을까?
이 의자에 앉아서였을까? 내 침대 위에 편히 누워서 봤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 말고도 곳곳에 메시지들이 많이 붙어있었다.
창문틀 위엔 '환기 좀 시킬게요.', 선풍기 위엔 '이거 안 시원하네요.'
침대 머리맡에는 '베개 높은 거 쓰시네요.' 하는 글들이 있었다.
컴퓨터 안 혹시나 하며 야한 동영상을 담아둔 폴더를 찾아보니
'남자는 남자네요.' 라는 폴더가 새로 생성되어 있었다.
정지영.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녀에게 다가가서 무엇이든 함께 시작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매만졌다.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신발을 꺼내 드는데
또 현관 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걱정마세요. 이 이상은 다가서려고 하지 않을게요.'
"대구라고."
"네?"
"아, 대구 인마 대구, 대구라고."
과장이 잔뜩 인상을 구기며 나를 노려봤다.
"내일 바로 출발이에요?"
"왜? 못 가?"
못 간다는 한마디를 기다린다는듯 과장은 비웃음을 흘렸다.
못 간다는 대꾸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더러운 새끼.
이번 주말에는 지영씨의 방에 들려볼 예정이었다.
주말을 끼워서 2주씩이나 대구에 붙어있어야 한다니,
나의 스토커 생활에 적신호가 들어오고 있었다.
퇴근길 편의점에 들려야 했다. 앞으로 거의 3주 동안 그녀와는 교류가 없을 것이다.
일단 얼굴은 한 번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편의점 앞, 투명한 유리 뒤로 비춰 보이는 그녀는 다음 교대자와 인수인계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어서 오세요." 라며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마일드세븐 하나 주세요."
"각으로 드릴까요. 팩으로 드릴까요?"
인수인계를 받고 있던 남자가 내가 물었다. 그녀는 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각을 꺼내 들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바코드 찍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체
담배각을 계산대 위에 얹으며 스윽 나를 향해 밀었다.
"2,700원입니다."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보루로 주세요. 한보루."
"예?"
그녀가 적잖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거의 매일같이 퇴근길에는 이 편의점에서 담배를 한 갑씩 사갔다.
다음날 일이 있는 날은 한 갑, 쉬는 날은 두세 갑.
한 보루를 샀던 것은 그녀를 스토킹하고 나서부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보던 남자 점원이
어물쩡 거리다가 테이블 밑에서 담배를 한보루 꺼내 들었다.
"27,000원입니다."
카드를 내밀며 그녀를 슬쩍 쳐다보았다. 내 나름대로는 한동안
편의점에는 찾아올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내주고 싶었다.
표정이 굳어가는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할 길은 없을까 고민을 해봤지만,
순간 저번 현관 앞에 붙어있던 메시지가 떠오르며 온몸에 기운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걱정 마세요. 이 이상은 다가서려고 하지 않을게요.'
이 이상 내게도 다가오지 말라는 통보처럼 느껴졌다.
내 방에 얼마든지 놀러 오세요. 제 얼굴을 보러 편의점에 찾아오세요.
저도 당신의 방에 찾아가도 되죠? 편의점에 찾아오는 당신을 기다려도 되죠?
하지만 우리 이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말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당황스러워하던 표정이 마음에 밟혔지만
성실한 스토킹을 하기 위해서 생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빨리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하며, 다음날 대구행 버스에 올랐다.
대구지사에는 내가 손봐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바로 다음날 출장을 떠나라는 말이 날 괴롭히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의외로 정말 많이 바쁜 상황이었다. 과장이 나를 마냥 떨거지처럼
생각했던 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보다 하루 일을 일찍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그동안 지영씨와 교류가 끊기는 것이 일하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동네 어귀에 접어든 나는 편의점에 들러 지영씨의 얼굴을 먼저 보고 싶었다.
"2,700원입니다."
처음 보는 여학생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카드로 하실 건가요?"
"새로 오셨나 봐요?"
아르바이트생은 내게 찝쩍거리지 말아 달라는 듯 인상을 구겼다.
"네, 그런데요."
"전에 계시던 분은요?"
"예?"
"전에 계시던 여자분이요. 여기서 일 년도 넘게 일했는데요."
자신도 급하게 뽑힌 아르바이트라 자세한 사항은 잘 모르지만,
월요일부터 원래 자리를 지키던 사람이 갑자기 결근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저야 모르죠."
"아무도 확인 안 해봤데요?"
"몰라요."
바로 편의점을 빠져나와 지영씨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주변이 어둑해졌는데도 지영씨의 방 창에선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열쇠를 조심히 돌리며 발소리가 안 나게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불 꺼진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 흐르며 사람의 기척이란 일체 느껴지질 않았다.
아무 사이도 아닌 우리는 한 지붕 밑에서 이렇게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데도 그것을 참아내는 것에
무색하지 않다는 것에도 작은 놀라움이 일었다.
애써 시선을 돌리는 그녀의 뒷모습. 오랜만에 그녀의 푸석한 머릿결을 보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청소기를 아무리 돌려도 더이상 달그락거리며 유리조각이 딸려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그녀도 청소기를 멈췄을 때가 두려웠을까, 없는 조각을 찾는 척 한참을 더 밍기적 거렸다.
청소기를 끄지 않을 구실은 찾는 듯한 지영씨가 애처롭게 보였다.
"이제 그만 돌려도 되지 않을까요?"
내가 묻자, 지영씨는 말없이 청소기의 전원을 내렸다. 청소기의 소음이
사라지자 예상한 것보다도 더 무거운 침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식사, 는..."
지영씨가 말끝을 흐렸다.
"아직 이요."
지영씨가 말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을 냉장고를
들여다보려는 그녀의 행동에 급작스레 웃음이 터졌다.
"거기 있는 거 지영씨가 다 집어던졌잖아요?"
"제 이름, 아시네요?"
당연했다. 하지만 느닷없는 질문에 가슴 한켠이 뜨끔했다.
스토커가 변명거리를 찾을 이유도 여유도 없음에도 나는 그렇게 당황을 느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녀 한쪽 손에 쥐어있는
냉장고 문에서 은은한 한기가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영씨 졸업앨범 봤어요."
"저도 성민씨 졸업앨범 봤어요."
그녀는 냉장고의 문을 슬며시 닫으며 내 정면을 향해 돌아섰다.
굳은 표정의 그녀는 나의 눈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아닌
목 언저리의 애매한 곳에 시선을 둔체 입을 열었다.
"제 이름 말고 또 뭐 알고 있으세요?"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름, 나이, 집, 얼마 전까지 일하던 편의점 정도 밖에는 없었다.
대답할 것도 얼마 없으면서도 대답을 하고 나면 벌을 받아야 할 것처럼 겁이 나고 두려웠다.
"또, 뭐 알고 있으시냐니까요?"
"이름, 나이, 집. 그게 다에요."
"스토커가 알고 있는게 그게 다에요?"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볼 염치가 없어져 고개를 떨군체 끄덕였다.
자백, 자백이었다. 뻔히 알고 있는 그녀에게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자백했다.
"왜 그것밖에 몰라요?"
"그 이상 알아서 뭐하게요?"
내가 되묻자 지영씨가 쏜살같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 방에 오셔서 뭐 하셨어요?"
"지영씨가 읽어보라던 책 읽고, 드라마 보고, 그게 다에요."
"선인장 화분은 왜 가져다 놨어요?"
"방이 쓸쓸해서요."
어째서인가 그녀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져 갔다. 그녀는 눈에 힘을 주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눈빛에 주눅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저 어떻게 할 생각인거에요?"
"모르겠어요."
"당신 바보야?"
지영씨가 화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좋았다.
자신의 방을 찾아오라는 그녀가 의외였지만 기뻤던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 이상 다가서서 그녀에게 무언가 바래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뿐이었다.
"뭘 더 어떻게 해요? 이 이상 다가서지 않는 다면서요."
"그건 제 이야기죠. 당신은 스토커잖아요."
"스토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녀가 말이 없었다. 입술을 앙다문 그녀에게서 도망치는 나는 방으로 발을 옮겼다.
잠시 잠깐의 침묵이 괴롭게 느껴진 나는 그녀에게 돌아서서 물었다.
"밥, 먹을래요?"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돌아가실래요? 저 이제 쉬고 싶은데."
그녀가 더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저 HIV 보균자에요."
"예?"
"예비 에이즈 환자라구요."
HIV 보균자. 영화에서 봤던 단편적인 지식이 떠올랐다.
HIV 균을 가진 사람이 에이즈에 걸리지만, 아직 진행되기 전에 약물의 치료로 발병을 억제할 수 있다.
언제 병이 급작스레 진전될지는 모르지만, 현대의 의학으로는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는 병.
성적행위로 전염될 확률이 있지만, 이는 현저히 낮은 편이고 혹여 전염된다면 아직 완벽한 치료약은 없다.
억제만이 가능할 뿐, 세계적으로 자연 치료된 케이스가 두건 정도 발표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그저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성민씨 전염됐을지도 몰라요. 저희 집에 자주 찾아왔었잖아요."
"..."
"병원에 안 가봐도 되요? 저한테 전염됐으면 어떻게 할 거에요?"
"지영씨한테 전염될만한 짓 한 적 없잖아요."
지영씨의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혔다.
"저희 부모님도 제가 무서워서 따로 살자시는데 성민씨는 안 무서워요?"
"뭐가 무서운데요?"
"그럼 저랑 키스하자면 할 수 있어요?"
"..."
"같이 자자면 잘 수 있어요?"
"..."
"같이 살자면 살 수 있어요?"
그녀가 흐느껴 울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좁은 어깨를 들썩이며 또 꾸역꾸역 구겨 삼키듯 한 소리와
함께 울기 시작했다. '다가서지 않을게요. 하지만 저를 찾아오세요.' 나 같은 스토커 따위에게 친절하게
구는 것이 이상스러웠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처럼 쓸쓸하게 느껴지던 그녀의 집이 눈에 밟히는 것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작고, 좁고, 어두웠던 작은 방. 누구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게 하려 했던 방.
숨을 참는 것처럼 소리 없이 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지영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
커다만한 눈이 놀라 휘둥그레진 모습이 애처로웠다. 잘 울지도 않는 다는 여자치고는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퍽 굵직했다.
"이 이상 다가서지 않는다는 뜻이 이거 때문이에요?"
내 질문에 지영씨는 대답을 하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애매한 고갯짓을 하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몸이 얼마자 자그마한지 와락 껴안기라도 하면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지영씨는 저랑 키스하자면 할 수 있어요?"
지영씨가 눈을 번쩍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한번을 꿈뻑이지도
안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지영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같이 자자면 잘 수 있어요?"
지영씨의 얼굴에 어렴풋 웃음기가 서린 것같이 보였다. 지영씨는 더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같이 살자면 살 수 있어요?"
지영씨가 더더욱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영씨의 눈가에 웃음기가 역력했다.
나도 웃음이 나와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름 심각한 고백을 했는데
나는 왜 웃음이 나오는 것일까. 그녀는 왜 웃어주는 것일까.
나도 지영씨의 앞에 풀썩 주저앉아 지영씨와 눈을 맞췄다.
지영씨의 큰 눈망울이 아직 다 못 흐른 눈물들과 함께 나를 응시했다.
"그럼 우리 같이 밥 먹어요."
"..."
오늘 처음으로 지영씨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