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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핥기 로마사(18) - 기독교의 성장
게시물ID : history_44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7
조회수 : 58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5/23 06:31:40
디오클레티아누스 다음 황제는 콘스탄티누스이지만, 그 전에 기독교의 상황을 잠깐 들여다보는 것이 적당할 것같아 따로 회차를 뗐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에게 끼워넣기에는 글이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요... 그러다 보니 1개의 독립된 글로서는 완성도가 시망입니다ㅠ ================================================================================== 1. ad 300년경의 일반적 상황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로 이어지는 ad300년 전후 로마의 기독교인은 제국 전체 인구의 1/10 정도였다. 제국 전역의 농민들은 여전히 로마전통신앙과 지방토착신들을 숭배하고 있었다. 300여년에 걸친 성장을 거쳤지만 기독교는 여전히 소수 종교였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 측이 콘스탄티누스 이전에는 극소수의 종교였던 것처럼 묘사하는 것보다는 많은 수이다. 로마제국 자체를 투쟁대상(?)으로 삼는 초기의 배타성은 어느 정도 희석되어 기독교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속주에서 지방행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고, 주교들은 로마의 관리들과 함께 실무를 보는 공인이 되어 있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에서는 저마다의 기독교 전통이 싹텄다. 예컨대 로마기독교가 일요일에 예배를 했던 반면 동방에서는 안식일(즉, 토요일)예배가 지속되었다. 상당수의 황제들이 기독교에 무관심했고 몇몇 황제가 박해를 했지만 지방에서는 기독교가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2. 초대 교회 예수와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의 교리의 흐름은 초기 교부들에 의해 흘러 왔다. 저스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겐(=오리게네스)같은 인물은 교리의 정립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철학을 신학에 끌어들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터툴리안(=테르툴리아누스)은 이러한 그리스철학의 영향에 반대한 인물이다. 하지만 많든 적든 알렉산드리아를 위시한 동방지역의 교부들에 의해 그리스 철학이 기독교에 상당 부분 녹아든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굵직한 신학논쟁들은 교회사에서는 중요하지만 로마사로서 큰 의미는 없으므로 패스하자.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 중요한 신학논쟁을 명쾌하게 정리한 신학의 거장이지만, 신학/철학이 대개 그렇듯이 거장의 출현은 기존 논쟁을 종식시킨 후 더 큰 논쟁을 탄생시킨다. 3.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종종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공격을 받거나 검투경기로 내몰리곤 했다. 대다수의 황제들이 기독교에 대해 방관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죽음의 위기를 무릅써야만 했다. 로마 중앙정부가 무관심한데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에서 박해가 쏟아졌던 까닭이다. 이러한 경향은 3세기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3세기 중반부터는 중앙정부가 발벗고 나서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박해는 기독교의 존립 자체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것이었다. 데키우스는 로마의 전통적 가치를 회복하고, 로마의 신들에 대한 숭배를 부활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데키우스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로마신들에 대한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였고, 제사를 한 자들에게만 증서를 발급하면서 수시로 검문을 하여 제사증서가 없는 자들을 체포하였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제사를 하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순교를 택하기도 했다. 발레리아누스는 스스로를 아폴로와 동일시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더 가혹하게 박해했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의 박해의 이면에는 단지 이념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고갈되어 가는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한 동기도 있었다고 분석된다. 발레리아누스가 죽고 즉위한 갈리에누스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라는 칙령을 공포했다. 오히려 기독교인 사이에서는 데키우스와 발레리아누스가 불행한 최후(데키우스는 동고트족과 전쟁 중 전사,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에게 잡혀 포로생활 중 사망)를 맞은 것이 신의 분노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퍼졌다. 303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최후의 기독교 대박해를 시작했다. 그의 박해는 단지 기독교인들에게 제사를 요구하거나 불이익을 부과하는 선에 그치지 않고 기독교 자체를 뿌리 뽑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인 관료들과 기독교 성직자, 그리고 교회 건물과 기독교 서적을 타겟으로 삼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철저하고 집요한 박해는 수많은 배교자를 양산하여, 배교자 문제를 놓고 도나투스 논쟁을 낳게 된다. 이 박해는 309년까지 활발하게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라바룸을 방패에 그리도록 명령한 것은 312년, 밀라노 칙령을 공포한 것은 313년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대에 순교한 성 세바스타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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