굥씨전
옛날 헬 조선에 굥씨 성을 가진 남정네가 살았는데 본관은 파평 굥씨로 과거시험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평소 음주를 좋아하고, 자신이 했던 과거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고질병 때문에 번번이 낙마를 하였다.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의 성격 탓에 과거시험 응시를 그만하고, 덩치가 필요로하는 다른 일을 알아봄직 했지만, 그의 독특한 고집 덕분에 8전9기 나이 32세에 뒤늦게 사헌부에 합격하여 그간 모진세월의 보상을 받듯 권세와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하였으며, 임진년(壬辰年) 모월에 ‘YUJI’라는 한 여인네와 혼인까지 하며 행복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병신년(丙申年), 한 나라의 공주가 무당에게 홀려 나라가 어지럽게 되어, 개판이 되자, 당시 지방에서 한직으로 생활하고 있던 굥은 사건의 조사자인 사헌부 특수직에 제수되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가 과거에 무심코 툭 던져 했던 말이 의도치 않게 백성들에게 회자 되며, 일약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오늘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끝내 공주와 무당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며, 백성들의 힘으로 이끌어 낸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전 사건의 추가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굥은 마침내 국가 원수에 의해 사헌부의 대사헌 자리에 제수되었다. 그는 가슴에 벅차올라 소회를 이렇게 말하였다.
“새로운 사헌부를 기대하는 백성의 목소리가 높은 시기에 대사헌의 소임을 맡게 되어 막중한 사명감을 느낍니다. 저희 사헌부는 '백성과 함께 하는 사헌부'가 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백성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오로지 법에 따라 백성을 위해서만 행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하고 평소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 못된 고질병이 재발하여, 형조판서와 전 사헌부 대사헌과 계속되는 갈등을 빚게 되며, 급기야 자신을 임명해 준 국가원수에게 도전하며, 나라의 오래전 숙제인 사헌부를 개혁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 이를 주장한 세력에 대해서는 강한 반발을 드러내며, 자신이 나라의 권력을 차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준비를 마친 굥은 사헌부 대사헌에서 물러나고 자신을 지지하는 강한 세력의 힘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기 위한 행보에 나섰다.
‘공정과 상식’
굥은 이것을 필두로 하여, ‘준’이라는 젊은 유학생 청년과 결탁하여 지지층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의 고질적인 막말 습관 탓인지 어느 지방의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한 ‘전’ 군주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분개한 다수의 백성들을 임시로 달래고자 하였으나,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발상인지, 개와 사과 사진을 게시하는 등, 인간의 상식이라고는 보일 수 없는 온갖 기행을 저질렀지만, 이 모든 기행은 손바닥에 ‘왕’(王)이라는 문구를 부적처럼 새긴 탓이였을까, 그 신통한 도력이 통했을까, 임인년(壬寅年) 모월 나라의 최고 권력까지 결국 차지하게 되었다.
권력을 차지하자마자, 굥은 궁궐을 새로 지을 궁리를 하였다. 예전부터 무학대사가 점지해 준 조선 창업의 근본인 명당자리 종로에서 벗어나, 무슨 뜻인지 자국의 군영 사령부를 강제로 쫓아내고 과거 임진년에 왜군의 주둔지로, 구한말에는 청나라군이 주둔하였으며, 현대는 아메리국의 군대가 주둔한 용산으로 터를 이전하였다.
굥이 말하기를,
“이곳이 백성과 소통할 수 있는 명당이다.”
그의 행차를 위해 동원된 친위병력이 매일 700여명이고, 그 일대가 항상 번잡해지며 마비가 되니 주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하물며 백성의 문화를 체험한다고 몸소 YUJI와 부부동반 영화를 보며, 빵을 사는 행동을 통해 그 일대가 축복과 은총으로 가득 찼었다.
굥은 자신의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 백성들의 의견을 경청하여, 자신이 예전부터 같이 일을 했던 사헌부의 사람들로 대다수 부처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적임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연결되지 않은 인사에 대해서는 공석으로 두어, 국가 운영에 순탄함을 초래하였다. 종래에는 교육을 담당하는 수장에 음주 논란에 휩싸인 여성을 임명하는 특유의 고집을 부렸다. 굥은 근심하는 백성들을 위해 짐짓 위로를 한답시고 왈
“ 전 수장 중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봤느냐?”
그러나 굥의 무리한 행보는 그녀의 34일 만의 사퇴라는 역대 최단기 기록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때는 7월, 왜국의 수장이 자국의 백성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왜국 수장의 조상은 임진년 때부터 이어져 온 지역의 다이묘 출신 집안이였다. 동학년 곰나루 우리 백성들을 진압하기 위해 ‘텐진조약’으로 경복궁을 무력으로 강제 점령한 오랑캐는 고인이 된 왜국 수장의 고조부라니, 통탄을 금치 않을 수 없으며, 그 왜국의 수장이 행했던 만행은 조상들의 혼이 되살아나 울부짖어도 시원치 않을 판이였다. 급기야 그 왜국 수장의 외조부는 세계를 혼란하게 만든 전쟁의 원흉이라니, 어찌 더 무슨 말을 이어 나가리오! 고인이 된 왜국 수장은 전범들을 추모하며, 전쟁의 야욕을 언제나 품고 있으니 참으로 군국주의의 살아있는 표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굥은 그 왜국의 수장을 향해 이렇게 조문을 하며 글을 남겼다.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故 총리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시간을 흘러 8월, 세계의 정세는 아메리국과 서국의 강대강 대결로 가고 있으니, 그 사이에 봉착한 우리나라의 외교와 안보는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이자 기회였다. 이에 동맹국인 아메리국의 서열 두 번째의 인사가 자국을 방문하니, 이보다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굥은 평소 자신이 즐기는 음주와 공연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즐기느라 결국 아메리국의 인사를 만나지 않았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한탄을 하였으나, 굥의 수하가 이르기를
“이번에 지방 이동 등을 여러 차례 검토했으나 어떤 행사나 일과 비슷한 일은 안 하기로 했다 지금은 댁에서 푹 쉬고 많이 주무시고 산책도 하고 영화도 보고, 아주 오랜만에 푹 쉬고 있는 상태.”
하늘이 노한 탓인지, 한양을 비롯하여 나라 전체에 큰 홍수가 내렸다. 평소 한강 이남 지역은 지대가 낮아서 빗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 실시간 내리치는 빗발에 마을이 잠기게 되었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되었다. 수없이 많은 백성들의 재산과 나라의 물적 자원이 피해를 입게 되었고, 급기야 사망자까지 나오게 되어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에 굥은 큰 위기를 느끼며 홍수 사태 다음 날 일가족이 참변을 당한 반지하 방에 방문하여 말하기를,
“왜 미리 대피가 안됐나”
위의 말에 연이어 홍수로 인해 새벽이 넘어가는 동안 난리가 났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논란이 되었는데 굥은 또다시 이르기를
“퇴근하면서 보니 다른 곳도 침수 시작이 되더라”
퇴근 중에 이미 굥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침수되고 있는 것을 인지하였음을 스스로 실토하는 등의 기이한 행보와 언행을 보여주었다.
한편, 서국에서 서열 꽤나 높은 사신이 우리나라를 방한하였다. 굥은 실질적 동맹국인 아메리국의 서열2위를 휴가철에 공과 사를 구분하는 확실함을 보여 만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극진히 대접하는 너그러움을 보여주었다. 시전상인들에게 멸치와 콩을 사며,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는 것과는 또 반대되는 행보여서 굥의 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때는 9월, 잉글국의 여왕이 서거하자,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이를 진심으로 슬피 여기며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잉글국으로 추모와 조문을 하러 갔다. 굥 역시 잉글국으로 전용기를 통해 하수인들을 대동하여 기행에 나섰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정작 현장에 도착하여서는 조문을 하지 않고, 왜 안갔는지, 무엇을 했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잉글국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아메리국으로 넘어가, 여러 가지 만남을 가진 것 중에 아메리국의 수장과 단 48초 회담을 대서특필하고, 홍보를 하니 오호통재라 불립문자, 이심전심, 마음으로 모든 것을 짧은 시간에 대화를 나눈 동맹국 지도자끼리의 커넥션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왜국의 수장에게는 먼저 고개를 쳐 숙이고 애걸복걸 하듯이 만나서 정상회담이라고 일방발표하니, 왜국의 사관들이 약식회담이였다며 강하게 불쾌감을 표명하였다. 심지어 왜국의 군대가 유사시에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굥의 모습에는 마치 임진년의 원균과도 같은 신출귀몰의 모습으로 뛰어난 전략전술의 구상 능력이 기대되어 감탄을 표하지 않을 수 없으며, 왜국해상자위대에 내걸린 욱일기를 보고 욱일기가 아니라는 군 수뇌부의 발언은 그 신이함에 붓을 꺾어버리고 싶은 심경이자, 백성들은 이 모든 일에 대해 또한 크게 분개해 마지않았다.
또한 이번 순방 최대의 사건이자 전대미문이며, 길이길이 역사에 회자 될 백성들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굥의 ‘날’ 발음과 ‘바’ 발음 사건이였다. 사관은 이를 ‘날바 사건’이라고 칭하겠다. 어떻게 들리느냐에 따라 전자는 우리나라의 백성 대표들에게 하는 비속어이고 후자는 아메리국의 수장에게 하는 비속어가 되는 논란을 낳았다. 하루는 굥이 근심하는 낯빛을 하고 있자 이를 본 하수인들이 아뢰옵기를,
“그곳에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소음이 많았기 때문에 아메리국의 수장에게 하는 비속어는 자칫 큰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자국 백성들에게로 가시지요.
굥은 화색하며 이르기를,
“그거 묘안이네”
결국 은혜를 입었다는 이름의 대표 하수인은 사람들의 질문에 우리나라 백성들 대표에게 했던 비속어로 발표를 하게 되었다. 진나라의 무능한 황제 호해에게 간신 환관 조고가 신하들에게 사슴을 말이라고 주장하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행태가 반복되었으니 백성들의 두 눈과 두 귀가 온전히 있고, 모든 발언이 기록되고 남아있는 이 시기에 이를 두고 세계를 비롯하여 전 지구의 모든 백성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우리나라로 돌아온 굥은 이번 사건을 최대한 덮기 위해 여러 하수인들의 입을 통해 해명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종래에는 자신의 평소 지병인 기억이 나지 않는 고질병을 언급하는 스킬을 시전하였다. 백성들은 이번 순방으로 인해 떨어진 국격과 부끄러움으로 최대 책임자인 예조판서를 해임하라는 요구를 하였으나 그대로 묵살되었다.
시간이 흘러, 도화서에서 만화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청소년이 그린 ‘굥석열차’가 장원이 되었는데, 이에 크게 기뻐한 굥은 부처에 지시를 내려, 이 청소년의 그림에 ‘엄중 경고 조치’를 친히 하사하였다. 하수인들은 이 그림에 대해 표절 의혹 및 온갖 잡음으로 지껄였으나, 외국의 저명한 평론가들의 올바른 평가에 그 주댕이는 바로 묻혀버렸고, 21세기에 사상검열이라는 혁신을 또 보여주었다.
한편, 친일파의 후손인 굥의 하수인 중책 위원장은 외교 참사의 민심과 백성들의 민심을 파악하고 이전에 있었던 왜국과 관련된 언급에서 이르기를,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일본은 조선 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
이에 대해 백성들과 여러 관계자들이 분노를 넘어 아연실색하였고, 사과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반박하였다.
“제발 역사 공부 좀 하시라.”
때는 10월 추풍이 차가운 어느 날, 배밭이 많은 동네이자 과거 임진년부터 왜군들이 귀화해서 살았다는 이곳은 예로부터 외국군의 군사 주둔지 근처라 이방인 공동체 성격이 강한 곳이다. 이곳은 매년 매해 아메리국의 풍습 중 하나가 행해지고는 하는데 자국의 젊은 남녀 백성들이 매우 즐기는 일종의 문화 행사가 된지 오래이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행해진 이유를 모를 전세계의 전염병으로 백성들의 행동에 제약이 생기고, 이러한 문화를 누리지 못한지 오래된 탓이라, 백성들은 금년 임인년(壬寅年)에 그 규제와 제재가 풀리게 되니, 모처럼 행해진 이 축제에 수십만의 인파가 이곳 거리에 몰리게 되었다. 애석하고도 슬프다. 그리고 무슨 말을 써내려가야 할지 모르겠도다. 이곳 거리의 인파에 의한 압사로 한 골목에서 백여명의 희생자가 나오게 되니, 그 비통함을 어찌 표현할 것이며, 이 슬픔을 어찌 이야기할 수 있으리오.
굥은 즉시 9년전 공주가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던 여객선 침몰 사고를 떠올리며, 이러한 일의 대응에 재빠르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며 하수인들이 발표를 내놓았다. 새벽내내 이루어진 비상회의에서 여러 가지 보고 및 조치를 내리고 있다며 공식적으로 분 단위로 발표를 내리며, 모든 정보를 한치도 남김없이 정확하게 백성들에게 발표하라는 둥 신속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발표를 내놓았다. 다음날 굥은 수하들을 거느리며, 현장에 방문하여 말하기를,
“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었단 말이야?”
“압사?, 아니 그러니깐 뇌진탕 그런 건 있었겠지.”
자국 백성들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의 백성들과 정상들도 슬픔을 나누며, 유래없는 이 참사로 인해 국가는 애도의 기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북의 수괴는 동해 바다와 영해 인근에 미사일을 수차례 퍼붓는 등의 미친 행보를 이어나가 백성들의 불안감을 키우며, 현재는 치안을 담당하는 병력과 구조를 담당했던 병력, 그리고 그 고을의 수장과 여러명에게 책임을 묻기 시작하였다.
한편, ‘천’이라는 머리가 희고도 긴 늙은 도인의 앞서 기록된 사건과 관련된 여러 강의가 이미 있었고 그것이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속설이 들리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전, 한 공주가 무당에게 홀려 나라가 어지럽게 된 일을 백성들은 기억하고 있으며, 그 공주와 무당 및 그 추존 하수 세력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시대를 백성들의 힘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역사는 되풀이 되고 있으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민족의 미래는 없다고 한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민족의 혼은 영원히 살아 숨쉰다고도 하셨다.
임인년(壬寅年) 모월 모일 모시에 여러 가지 감정에 뒤섞인 채 첼로 선율과 동백 아가씨를 들으며 이 글을 기록하였다.